믿음 1 |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이란 무엇인가 – 종교적 믿음의 두 유형

한자경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

믿음은 앎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이다’ 또는 ‘물은 H₂O이다’에 대해 우리는 ‘안다’고 말하지 ‘믿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어떤 것이 어떠어떠하다’라는 명제적 내용, 경험적 사실을 확실하게 알지 못할 때, 그래서 개인적 의견의 방식으로 추측하거나 짐작할 때 우리는 ‘믿는다’고 말한다. 이런 믿음은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고 따라서 참이나 거짓으로 판가름 날 수 있는 경험적 내용에 대한 믿음으로 일종의 의견, 추측, 짐작에 해당한다. 이런 의미의 믿음은 ‘경험적 믿음’, ‘명제적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우리의 일상의 삶을 지탱해주는 믿음들, 예를 들어 집에 있을 때 집이 무너지지 않고 땅을 걸을 때 땅이 꺼지지 않으리라는 믿음, 도로를 운전할 때 반대편 차가 중앙선을 넘어오지 않으리라는 믿음, 내일도 해가 뜨리라는 믿음 등은 특정한 경험적 사실에 대한 의견으로서의 믿음이라기보다는 내가 나의 일상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나를 거기에 맡기고 의지한다는 의미의 믿음인 일종의 ‘신뢰’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저 사람을 믿는다’고 할 때의 믿음도 일종의 신뢰이다. 이러한 신뢰는 곧 일상의 삶을 살기 위한 ‘본능적 믿음’, ‘자연적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의견으로서의 믿음도 아니고 신뢰로서의 믿음도 아닌 또다른 의미의 믿음이 있다. 의견이나 신뢰는 우리의 삶의 영역, 경험의 영역에 머무르는 것이지만, 그러한 경험 가능한 삶의 영역을 넘어선 것들, 우리에게 경험적사실로서 주어지지 않는 것들, 따라서 인간 이성의 분별적 사유로써 알기 어렵거나 알기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물음을 던지며 알고 싶어 한다. 예를 들어 인간은 어디에서 왔고,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인간과 우주의 실상은 무엇이고, 일체 존재의 근원은 무엇인가 등을 묻는다. 이와 같은 궁극(窮極)에 대한 물음은 인간의 경험 가능성의 영역, 삶의 영역을 넘어선 물음들이기에 상식이나 과학으로 대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초경험적 영역에 대해 답을 제시하는 것이 바로 종교이며, 따라서 종교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은 ‘종교적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진지한 논의 대상으로 삼는 믿음은 바로 이러한 종교적 믿음이다. 종교적 믿음은 과학의 발전을 통해 밝혀질 수 있는 진리를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갖는 의견이나 짐작으로서의 믿음과는 구분된다. 종교적 믿음은 일상적 또는 과학적으로 인식 가능한 경험의 영역을 넘어선 것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종교적 믿음은 상식이나 과학으로 환원될 수 없는 종교의 영역을 인정할 때에만 그 의미가 살아난다. 아직 과학적으로 알지 못하기에 추측하는 방식으로 경험적 내용을 믿는 것이라면 그 믿음은 잘못 알고 믿는 ‘미신(迷信)’으로서의 믿음일 뿐이고, 일상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의지하는 방식으로 믿는 것이라면 그 믿음은 현실적 복을 기도하는 ‘기복(祈福)’으로서의 믿음일 뿐이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종교적 믿음과는 구분된다.
종교적 믿음은 존재의 궁극을 향한 믿음으로 이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알고자하는 물음의 답을 인간이 스스로 알 수 없다고 보는가 아니면 알 수 있다고 보는가에 따라 두 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우주의 시작과 끝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 등에 대한 물음의 답을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알수 없다고 보면, 그에 대해 답을 제공하는 종교적 가르침에 대한 믿음은 인간이 그 너머로 나아갈 수 없는 마지막 종착점이 된다. 그 답을 알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종교가 제시하는 그 답을 믿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존재의 궁극에 대한 물음의 답을 그 물음을 제기한 인간 자신의 힘으로 알 수 있다고 보면, 종교적 믿음은 스스로 그 물음의 답을 찾아나가기 위한 발판으로서의 시작점에 불과하다. 이 경우 인간은 믿음 너머의 앎인 깨달음을 얻기 위해 일상적 경험이나 과학적 사유와는 구분되는 종교적 수행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우리는 첫번째 형태의 믿음을 기독교에서, 두 번째 형태의 믿음을 불교에서 발견한다.
기독교는 인생과 우주에 관해 인간이 던지는 궁극적 물음이 인간 이성의 힘으로 대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인간을 포함한 우주 전체는 신(神), 야훼가 만든 피조물이며, 인간과 우주의 시작과 끝은 오로지 전지전능한 창조자인 신만이 알 수 있지 유한한 피조물인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이 인형을 만들면, 인형을 아는 것은 인간이지 인형이 아닌 것과 같다. 인간과 우주는 신이 만들었고, 따라서 인간과 우주의 실상을 바로 아는 것은 신이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그 자신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인간을 포함한 우주 전체의 시작과 끝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아낼 길이 없다. 이것이 정통 기독교가 강조하는 인간 이성의 유한성이며, 인간이 그러한 자신의 유한성을 망각하고 ‘신과 같이 눈이 밝아지고자 하는 것’, ‘신과 같아지고자 하는 것’은 오히려 원죄(原罪)로 간주된다. 이성 너머의 영성(靈性)은 오직 믿음의 영성일 뿐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믿음을 강조한다. 궁극에 대해서 인간은 인간 이성을 통해 스스로 알 수 없다. 다만 인간 너머의 신(神) 야훼가 특정 인간에게 특정한 방식으로 진리를 계시해 그 말씀이 성스러운 경전인 『바이블』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인간은 그 『바이블』의 내용을 믿음으로써만 존재의 궁극에 대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적 믿음은 과학의 발전을 통해 밝혀질 수 있는 진리를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갖는 의견이나 짐작으로서의 믿음과는 구분된다. 일상적 또는 과학적으로 인식 가능한 경험의 영역을 넘어선 것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반면 불교는 믿음을 바른 앎에 포함시키는 것을 비판한다. 성스러운 경전의 말씀인 성인의 가르침을 믿는 것과 그것을 아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믿음은 앎에 포함되지 않으며 따라서 바른 앎에서 배제된다.
그렇다고 불교가 믿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불교에서 종교적 믿음은 인간이 종교적 관심을 갖고 도달하는 마지막 지점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적 물음의 답을 스스로 찾아나가는 출발 지점에 해당한다. 믿음은 종교적 관심이 지향하는 궁극에 대한 바른 앎에 이르기 위한 첫 단계일 뿐이다. 불교의 ‘신해행증(信解行證)’이 이를 말해준다. 우선 불교에 대한 믿음을 갖고(신) 그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고(해) 그 가르침을 따라 몸소 수행해(행) 궁극의 깨달음을 직접 증득해 아는 것(증)이 신해행증의 네 단계이다.
신해행증의 첫 단계인 믿음은 우선 불교에서 말하는 세 가지 보물, 불법승(佛法僧) 3보(寶)를 믿는 것이다. 불(부처)을 믿는다는 것은 부처인 인간 석가모니가 궁극에 대한 종교적 물음의 답을 발견했다는 것을 믿는 것이고, 법(진리)을 믿는다는 것은 부처가 제시한 답이 진리라는 것을 믿는 것이며, 승(승려)을 믿는다는 것은 그 진리를 내게 전해 가르쳐주는 스승을 믿는 것이다. 대승의 믿음을 확립하고자 한 『대승기신론』은 이 세 가지 믿음에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믿음 하나를 추가한다. 즉 인간은 누구나 석가모니와 마찬가지로 궁극에 대한 물음의 답을 직접 깨달아 알 수 있다는 믿음, 누구나 깨달음의 능력, 불성(佛性)을 갖고 있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말하자면 불법승 3보가 내 밖의 보물이 아니라 바로 내 안의 보물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이다. 이 깨달음의 성품인 불성(佛性)이 곧 신령한 성품인 영성(靈性), 영지(靈知)의 영성이며, 이는 곧 인간을 궁극의 깨달음으로 이끄는 깨달음의 영성이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의 믿음은 알지 못하기에 믿는 믿음이 아니라, 수행을 하면 결국 알 수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다. 따라서 이 믿음에서 출발해 해행증으로 나아가게 된다.
신해행증의 해(解)는 불법승 및 자신의 불성에 대한 믿음 위에서 불교의 성스러운 경전인 불경에 담긴 교학(敎學)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왜 무아(無我)이고 공(空)인지, 어떻게 연기(緣起)의 원리에 따라 윤회가 성립하고 또 해탈이 가능한지, 세계는 왜 공(空)이고 가(假)이며, 인간의 마음은 왜 여래장(如來藏)이고 일심(一心)인지 등에 대한 바른 견해인 정견(正見)을 확립하는 것이다. 이해해야 할내용 중에는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수행론도 포함된다. 따라서 해(解)로써 정견을 확립한 이후에는 그 내용에 따라 몸소 실천하는 수행이 요구되는데, 이것이 바로 신해행증의 행(行)이다. 해와 행은 교(敎)와 선(禪)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교는 인간과 세계가 어떤 존재인지, 어떤 의미에서 아공이고 법공인지를 이해하는 것이라면, 선은 실제로 그런 존재가 되는 것, 객진번뇌와 허망분별을 넘어 스스로 공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교가 지도를 보고 산의 지형을 이해하는 것이라면, 선은 지도를 손에 들고 직접 산에 들어가는 것, 산이 되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이처럼 구체적 수행을 통해 마음이 마음의 본래 자리로 들어설 때 우리는 비로소 그 마음의 본래 자리에서 던졌던 궁극의 물음, 인간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우리가 경험하는 이 존재의 실상이 무엇인지의 답을 확연하게 알게 된다. 이러한 궁극적 앎, 궁극적 깨달음의 증득이 신해행증의 증(證)으로 이때 비로소 우리는 생사 문제를 해결하고, 부처의 일체지를 갖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종교적 믿음은 우리가 던지는 궁극적 물음에 대해 우리가 스스로 그 답을 찾을 수 없다고 보는가 아니면 있다고 보는가에 따라 양상이 달라진다.
궁극적 물음의 답을 인간 스스로 찾을 수 없다고 볼 경우, 그 답을 제공하는 종교에의 믿음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종 지점이 된다. 반면 그 답을 인간 스스로 찾을 수 있다고 볼 경우, 종교적 믿음은 스스로 그 답을 찾아나가는 해행증의 길을 여는 출발 지점이 되며, 이는 곧 내 안의 보물, 내 안의 부처를 믿는 것이고, 바른 이해와 바른 수행을 거쳐 나도 부처가 되어 인생과 우주 전반의 수수께끼를 풀고 생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종교적 믿음이 인간이 나아갈 수 있는 마지막 지점이라면, 그 믿음은 믿음의 대상을 우러르는 대상적 믿음, ‘신앙(信仰)’으로서의 믿음일 뿐이다. 반면 종교적 믿음이 그것을 기점으로 바른 이해와 바른 수행 및 궁극의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하는 출발점이 된다면, 그 믿음은 인간 스스로 궁극의 답을 찾게 만드는 주체적 믿음, ‘구도(求道)’로서의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미신으로서의 믿음 : 의견, 추측
기복으로서의 믿음 : 의지, 신뢰
종교적 믿음 – 신앙으로서의 믿음 : 대상적 믿음
종교적 믿음 – 구도로서의 믿음 : 주체적

한자경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서양 철학(칸트)을, 동국대 불교학과에서 불교철학(유식)을 공부했다. 현재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칸트와 초월철학: 인간이란 무엇인가』, 『유식무경: 유식 불교에서의 인식과 존재』, 『불교철학과 현대 윤리의 만남』, 『심층마음의 연구』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철학의 원리로서의 자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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