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2 | 불교에서 보는 믿음

불교에서 보는 믿음 – 의심의 해소에서 비롯되는 믿음, 붓다의 삶을 성취하는 믿음

석길암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부 교수

불교는 믿음의 종교인가
붓다는 경험되어지지 않고 합리적으로 논증되지 않는 사실에 대해 그 진실성을 주장하는 태도들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붓다의 가르침은 주체와 객관의 관계성에 대한 인식(지각) 과정을 중심으로 구성된 것이었고, 그의 가르침에는 어떤 인식되지 않는 세계에 대한 관념 등에 대한 진술이 배제되어 있었다. 그의 가르침은 세계에 대한 그릇된 인식, 그 그릇된 인식의 오류를 수정하는 체계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릇된 인식의 원인과 오류를 수정하고, 수정된 ‘올바른’ 인식에 의해 사유하고 행동함으로써 ‘평화’와 ‘행복’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따라서 여기에 ‘믿음’이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어 보인다.
이러한 사실이 온전히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그’가 선행자(先行者; 진리 체험자, 부처)일 경우에만 그렇다. 하지만 붓다의 뒤를 좇는 자들에게도 그렇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붓다의 뒤를 좇는 자들에게 그러한 합리적인 과정은 여전히 불가해(不可解)의 영역이고, 미지의 영역일 수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붓다의 발자국은 뒤좇아야 하는 영역이지만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다.
불교의 ‘믿음’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불교는 선행자 곧 붓다가 보여준 길을 좇는다. 좇는 자들은 끊임없이 의심을 일으킨다. ‘잘 알려진 길’이 아니라 ‘잘 알려지지 않은 길’을 좇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후행자(後行者, 수행자, 입문자)에게 그 길은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의 혼란을 야기하는 길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 길의 출발점에서는 불교 역시 ‘믿음’을 필요로 한다. 다만 ‘무엇’에 대한 믿음인가의 문제는 차이가 있다

여시아문(如是我聞)과 신수봉행(信受奉行)으로부터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불교 경전은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如是我聞]’는 구절로 시작된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는 모든 불전의 첫머리에 ‘여시(如是)’란 말을 사용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시(如是)’라는 것의 의미는 믿음이다. 만약 사람이 마음 가운데 신청정(信淸淨)이 있다면, 이 사람은 능히 불법(佛法)에 들어간다. 만약 믿음이 없다면 이 사람은 불법(佛法)에 들어갈 수 없다. 믿지 않는 자는 ‘이 일은 이와 같지 않다’고 말하니, 이것은 믿지 않는 모습이다. 믿는 자는 ‘이 일은 이와 같다’고 말한다. 비유하면, 소의 가죽이 부드럽지 않다면 구부릴 수 없는 것과 같으니, 믿음이 없는 사람 또한 이와 같다. 비유하면 소의 가죽이 이미 부드러우면 용도를 따라서 만드는 것과 같으니, 믿음이 있는 사람은 역시 이와 같다.”
초기 불교가 주로 법행(法行) 곧 수행자 스스로 부처님이 깨달으신 바의 진리에 따라 실천하는 것에 초점이 있었다면, 대승 경전의 이 같은 구조는 법행보다는 오히려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받아들여서 행하는 구조에 가까운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대승 경전 나아가 대승불교에서 출재가를 막론한 수행자들의 입장은 법행보다는 오히려 신행(信行)을 초점으로 하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다만 이 과정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지점이 있다. 경전을 듣는 자-사실은 수지하고 독송하는 자-가 ‘믿음을 일으켜 받아들이는[信受]’ 부분이다. 보통 경전에서는 이 부분을 믿음을 ‘더한다’거나 ‘증장(增長)한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표현상으로는 더하고 증장하는 것이지만, 실제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믿음이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의심이 해소되는 과정에 해당한다.
의심이 해소되면 곧 사라지면,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을 우리는 믿음[信]이라고 부른다. 더 이상의 의심이 남아 있지 않게 되므로, 가르침에 따라 실천하는 것에 머뭇거림이 없게 된다. 그때부터의 삶은 의심이 없는 행동, 곧 믿음에 기반한 행동이 된다. ‘받들어서 행한다[奉行]’는 그래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화엄경』이 믿음을 말하는 방식
사실 불자들은 믿음을 쌓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의심을 해소한다는 것이 정답이다. 대승 경전은 붓다의 말씀을 독송을 통해서 듣는다는 것에 초점을 둔다. 이때 붓다의 말씀 곧 가르침은 붓다가 제시한 중생이 삶에서 부닥치게 되는 일체의 괴로움을 해소하기 위한 네 가지 카테고리를 기준으로 한다. 고(苦)·집(集)·멸(滅)·도(道)가 그것이다. 초기 불전도 대승 경전도 이 네 가지 카테고리를 단순히 나열하는 경우는 없다. 고(苦)의 원인으로서 집(集)이 제시되고, 멸(滅)의 원인으로서 도(道)가 제시된다. 청법자는 고(苦)로 표현되는 현실을 고민하는 자이고, 설법자는 멸(滅)로 표현되는 고로부터 해방된 붓다이다. 실존적 고민이 주어지고, 그 고민에 대한
연기법적 관점에서 원인의 해석이 가해진다. 그리고 원인의 해석으로부터 고로부터 벗어나는 길[道]이 설명되는 것이다. 그 길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 의심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에서의 길이기에 온전히 받들어 행하는 길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화엄경』 보살문명품의 주제가 재미있다. 우리는 왜 붓다처럼 살지 못하는가 하는 질문으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붓다와 우리의 삶이 ‘왜 그리고 어떻게 다른가’라는 질문과 그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구성되어 있는 셈이다. 여기에서 핵심은 ‘왜’ 그리고 ‘어떻게’라는 의문이다. 그리고 그 의문을 해소했을 때 따르는 삶의 정화(淨化) 과정을 설명하는 곳이 바로 정행품이다

불교는 선행자 곧 붓다가 보여준 길을 좇는다. 좇는 자들은 끊임없이 의심을 일으킨다. ‘잘 알려진 길’이 아니라 ‘잘 알려지지 않은 길’을 좇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길의 출발점에서는 불교 역시 ‘믿음’을 필요로 한다.

『화엄경』은 이 과정을 ‘견불(見佛)’과 ‘문경(聞經)’으로 집약해서 표현한다. 따라서 화엄은 문혜를 앞세우고 거기에 따르는 사혜를 통해서 신심의 완성을 기약하는 구조를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화엄경』 대경 구성의 전체적인 의도를 신심을 중심으로 표현한다면, 불자내증경계에의 도달을 신심의 완성으로, 그리고 불자내증경계에서의 실천을 일승보살도로 하는 신[信]과 행[行]의 체계로 구성한 것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도 신심의 성취는 의심의 해소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므로, 신심의 성취가 아니라 의심의 해소가 바로 믿음[信]에 이르는 길이 된다.

다시 불교의 ‘믿음’이란?
붓다의 가르침을 좇는 방식에는 ‘이해하고 믿는다’는 이성적 방식과 ‘믿고 이해한다’는 감성적 방식의 양자가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물론 어느 쪽이나 믿음[信]과 이해[解]가 쌍운(雙運)해야 한다는 점에는 차이가 없다.
이해하고 믿는다는 방식은 초기 불교 이후의 주류적 사유 전통이다. 이것은 수행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좇는다는 의미에서 수행의 시작이다. 사성제에서 현실을 직시하고, 그 현실의 원인을 고찰하는 데서 불도가 시작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반면 많은 대승 경전은 믿고 이해한다는 방식을 채용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역으로 멸제(滅諦)에서 시작된다. “내가 도달하고 있는 세계는 이와 같은 세계이다. 이와 같은 세계는 이와 같은 길을 좇아서 늘 도달할 수 있다”는 선언이 붓다에 의해 주어지고, 그 선언으로부터 현실을 맞닥뜨리는 구조이다.
왜 이런 방식을 채용했을까? 필자는 그 답을 신수봉행의 봉행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붓다를 좇는 것이 아니라, 붓다를 믿어서 받아들이고, 붓다처럼 살아간다는 것에 방점이 두고 읽는 것이다. 불교에서 믿음은 도달해야 하는 자리인 동시에, 그 자리에서 붓다로서의 삶을 시작해야 하는 자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대승 경전은 그것을 강조하고 싶어 했던 것이고, 그렇기에 ‘여시[믿음]’와 ‘여시에 따른 봉행(奉行)’을 경전의 첫머리와 끝머리에 두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결국 붓다 그리고 붓다로서의 삶을 목표로 삼는 것이 대승 경전이고 대승불교임을 ‘믿음’을 말하는 방식에서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석길암 한국외국어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과정을 졸업했다(철학 박
사), 한국불교연구원 전임연구원,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HK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는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부 교
수로 있다. 저서에 『불교, 동아시아를 만나다』가 있고, 「원효의 보법화엄사상연구」 등의 논문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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