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4 | 유신론적 믿음관

유신론적 믿음관 – 기독교에서의 믿음

이영환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

이 글은 기독교인이자 철학자로서 신을 믿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설명하는 다분히 자기 고백적인 글이다. 우선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필자는 신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필자의 기독교 이해가 다수의 기독교인들을 대표할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먼저 밝힌다. 다만 합리적 근거에 따라 사고하는 것을 삶의 근간으로 삼는 철학자가 단지 신의 존재뿐 아니라 신의 성육신(예수가 신이라는 것), 죽음과 부활 등 사뭇 합리성의 기준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러한 믿음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하나의 설명을 시도하고자 한다.

믿음 – 어떤 명제를 참으로 받아들임 vs. 신뢰
‘믿는다’는 말은 대표적으로 두 가지 방식으로 쓰인다. 우선 첫 번째는 어떤 명제(주어와 술어로 구성된 문장의 내용)를 참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신에 대한 종교적 믿음을 예로 들자면, ‘신이 존재한다’, ‘신은 선하다’ 등등을 참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철학에서 일차적으로 주목하는 믿음은 이런 종류의 “명제적 믿음”이며 이런 종류의 믿음은 물론 종교적 맥락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이런 의미의 믿음에서는 주어진 명제를 이해하고 수긍하는 의식적이고 인지적인 과정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믿음은 영어로는 ‘believe that…’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믿는다’는 말은 또한 문장이 아니라 대상(의 이름)을 직접 목적어로 가지기도 한다. ‘철수를 믿는다’는 말은 철수를 “신뢰”한다는 말이다. 물론 철수를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은 ‘철수가 존재한다’가 참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즉 대상에 대한 신뢰가 명제적 믿음과 무관한 것은 아니며 표준적으로 어떤 명제적 믿음을 전제한다. 하지만 철수를 믿는다는 말이 철수와 관련된 몇몇 문장을 참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철수를 믿는다는 것, 인격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은 철수에 대해 어떤 특정한 태도를 지닌다는 것이고 최소한 원칙적으로 이 태도는 명제를 이해하고 수긍하는 데 필요한 의식적, 인지적 과정과 독립적으로성립할 수 있다. 이러한 믿음은 영어로는 e‘blieve in’ 또는 ‘rtust’로 표현된다.
때로 우리는 기독교의 믿음을 어떤 특정한 명제를 참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설명하곤 한다. 기독교에서 특히나 중요한 그러한 명제들의 집합을 ‘교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교리를 둘러싼 신학에서의 이단 논쟁과 그로 인한 수많은 교파의 분열의 역사는 기독교의 믿음이 일차적으로 명제적 믿음인 것 같은 인상을 주곤 한다. 하지만 기독교 믿음의 근본은 어떤 특정한 명제에 대한 믿음이라기보다는, 본래 죽을 수 없는 분이시면서도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를 기꺼이 사랑하시어그 사랑 때문에 고통받고 죽기까지 하셨던 분에 대한 신뢰에 있다.
믿음을 명제에 대한 것으로 이해하면 머리로 하는 이해와 인지작용이 강조된다. 반면 믿음을 일차적으로 신에 대한 신뢰로 인해하면 단지 인지의 영역을 넘어서는 신뢰의 행위, 신과의 신뢰 관계가 강조되며 머리보다 가슴이 중심에 놓인다.
기독교의 믿음이 명제에 대한 태도를 넘어선다는 것을 분명히 할 수 있는 방법은 한 번 악마를 상상해보는 것이다. 만약 믿음이 어떤 명제들을 참으로 받아들이는 것일 뿐이라면 악마도 기독교 신앙을 가질 것이다. 악마가 만약 존재한다면‘신이 있다’, ‘신이 선하다’는 등등의, 기독교인이 참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명제를참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신을 통한 감동, 그리고 그에 따른 신에 대한 사랑과 신뢰의 관계에 들어서지 못함으로, 아니 의식적으로 거부함으로 악마는 악마로 남는다. 기독교에서 신을 믿는다는 것은 신과의 친밀한 신뢰 관계를 믿고 그 관계를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기독교에서 실천은 머리로 믿은 다음 후속적으로 따라나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 그리고 믿음의 감동과 함께 성립하는 것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신에 대한 신뢰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명제를 참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죽음과 내세에 대한 태도를 통해서 또한 쉽게 드러낼 수 있다. 기독교에는 물론 죽음 이후에 대한 교리들이 있고 때로는 그런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기독교인됨의 기준처럼 이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기독교인의 믿음이 특정 명제에 대한 태도보다는 신 그분에 대한 신뢰의 관계/태도라면 내세에 관련한 특정 명제를 참으로 받아들이지 않고서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된다. 혹시 소위 천국이 있든지 아니면 육체가 죽을 때 개인의 의식도 함께 소멸되어 이 우주의 일부분으로 온전히 돌아가든지 간에 나의 신뢰를 받기에 합당한 그 분은 나와 인간들에게, 또는 모든 만물에게 적절한 좋은 것으로 준비하셨을 것이다

존재가 먼저인가 아니면 속성/성품이 먼저인가
그런데 도대체 그렇게 신뢰할 만한 신이 정말로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신을 신뢰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종교에 대해 얘기하자면 가장 먼저 제시되는 선택지가 유신론인지 무신론인지 인 것 같다. 특히나 기독교를 불교와 비교하는 맥락에서는 더더욱 그런 것 같다.
한편으로 이러한 생각은 너무 당연해 보인다. 어떤 것이 도대체 존재하는지가 먼저 확정되지 않으면 그것이 어떤 속성을 가졌는지를 논의한다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존재하지 않는 그것의 속성/성품에 대해 논하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겠는가?
하지만 종교적인 주제에 대해 논할 때 과연 신의 존재 여부가 신이 어떤 분인지보다 앞선 일차적인 중요성을 가지는지 필자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신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맞닥뜨리는, 그 내용이 결정된 대상들과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사실 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너무나 다양한 이해 방식이 존재하는데(필자의 전공분야인) 서양 고대 시대로만 한정해도 그렇다. 서양 고대 시대에 등장했던 네 종류의 신관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물론 이 네 종류의 신관을 언급하는 이유는 이 여러 신관과의 대비를 통해 기독교의 신관의 특징을 더 명확히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 다 .)1) 고대 그리스 대중들이 믿었던 것처럼 각자 다양한 욕망, 성격, 역할을 가져 때로는 서로 대립하고 싸우기도 하는, 영원히 살고 좀 더 강력한 힘을 가진다는 것 말고는 인간들과 별 차이 없어 보이는 신들에 대한 믿음이 있다. 2) 헬레니즘 시대의 스토아학파처럼 이 우주 전체를 지배하는 변함없는 자연 법칙이자 곧 이 우주 자체인 신을 믿을 수도 있다. 3) 플라톤은 신은 정의로워서 인간사에서의 정의/부정의에 관심을 가지며, 진실로 올바르게 사는 것 말고는 제사나 기도를 통해 환심을 살 수 없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4)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 식의 신관이 다분히 의인화된(anthropomorphic)신관이라고 비판하면서, 가장 고귀한 존재인 신은 영원히 관조하기만 하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관조만이 신에게 걸맞는 가장 고귀한 활동인데 신의 관조의 대상은 우리 같은 하찮은 인간일 수 없으니 신은 인간사에 관여하기는 커녕 인간사를 인지하지도 않는다. 신의 관조의 대상이 되기에 적합할 만큼 고귀한 대상은 자기 자신 외에는 없으므
로 신은 영원히 자기 자신을 관조하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는 존재이다. 이렇듯 다양한 신관이 있음을 생각할 때 신이 존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먼저 확정하고 그 다음에 그 신이 어떤 속성/성품을 가졌는지에 대해 얘기할 수는 없다.
이 대목에서 ‘신’을 ‘가장 깊은 의미에서의 존경과 흠모의 대상’으로 이해해보자. 그렇다면 위의 네 종류의 신관 중 어떤 신관이 가장 깊은 의미에서 존경하고 흠모할 만한,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닮고 싶은 신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는가? 필자라면 2) 또는 3)을 택할 것 같다. 1)의 신관에서의 신들은 어떤 면에서 인간보다 못한 신들이며 4)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신도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되기에는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2) 스토아의 신관과 3) 플라톤의 신관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은데 특히나 플라톤의 신을 한마디로 말하면 “정의의 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기독교의 신을 플라톤의 신과 비교해보자. 플라톤의 신이 ‘정의의 신’이라면 기독교의 신은 ‘사랑의 신’이다. 정의는 받은대로 돌려주는 것, 모든 이에게 공평한 것이다. 서로 자격이 다르다면 그 자격에 따라 더 많은 자격을 가진 이에게는 더 많이 주고, 적은 자격을 가진 이에게는 더 적게 주는 것이다. 정의의 관념은 사실상 단순하며 철학자들의 합리적인 틀 안에서 얼마든지 논의 가능한, 상상 가능한 개념이다. 만약 신의 관념을 인간이 만든 것이라면 정의의 신은 (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규정된 대상은 더 이상 신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신에 대한 인간의 상상력의 최소규정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반면에 사랑은 겉보기에는 이율배반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함축을 내는, 역설적인 개념이다. 받지 않았는데 돌려주고, 자격이 없음에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주는 것이다. 그 역설의 극치는 본래 죽을 수 없는 신이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를 기꺼이 사랑하여 그 사랑 때문에 스스로 인간이 되어 고통 받고 죽기까지 하셨다는 성육신의 메시지이다. (중생의 구제를 위해 해탈을 기꺼이 포기하는 보살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도 그 정신에 있어서 일맥상통한다.) 삶에서 실패하고 나락에 떨어져 다른 사람으로부터 질시 받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로 고통받는 사람에게 기독교의 사랑의 메시지는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희망을 준다. 만약 신의 관념이 인간의 상상력의 산물이라면 사랑의 신은 그 상상력의 최대 규정이거나 그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선 것일 것이다.
정의의 신을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최고의 원리가 정의라는 것이고 그런 정의의 신의 편에 서서, 그런 신의 모습을 닮아가면서, 즉 정의롭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사랑의 신을 믿는다는 것은 그런 정의의 원칙을 넘어 이 세상을 지배하는 더 상위의 원리가 사랑이라는 것, 그리고 그런 사랑의 신의 모습에 감동하여 그 신을 사랑하며, 닮아가며 살겠다는 결단이다. (물론 기독교의 믿음이 단지 정의와 사랑을 행하겠다는 실천적 결단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 글에서는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요소인 ‘은총’(값없이 주는 선물)의 개념과 그 개념이 어떤 전제 위에 서 있는지를 충분히 논의하지 않았다.) 이 맥락에서 필자는 다만 ’은총‘의 개념이 기독교 안에서 자신에 대한 겸손과 타인에 대한 너그러움의 기반이 된다는 것을, 그리고 이러한 겸손과 너그러움이 정의와 사랑의 삶에서 빠져서는 안 될 요소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나가며
불교에 대해 과문하지만 “만약 길을 가다 신을 만나면 그 신을 죽여라”라고 일갈했던 고승의 이야기를 안다. 아마도 여기서 죽여야 할 신이란 구도자가 자신이 능동적으로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의존적이 되게끔 만드는 존재를 의미할 것이다. 그러한 신은 없어야 할 신이기에 구도자가 만약 그런 신을 맞닥뜨린다면 해야 할일은 그 신을 죽이는 일이다.
하지만 구도의 길에 방해되는 신과는 반대로 정의와 사랑 자체이신 신은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는 모른다고 하더라도) 있어야 할 신이라고 동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만약 정의와 사랑이신 신이 있어야 할 신이라고 동의할 수 있다면 거꾸로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만약 세상에 (정의와 사랑이신) 신이 없다면 네가 그 신이, 혹은 그런 신의 편이 되어 그 신이 할 그런 일을 하라.”

이영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적 본질주의」, 「아리스토텔레스 행복관에 대한 몇 가지 오해에 대한 해명」 등의 논문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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