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사회화 1 | 깨달음의 사회화란 무엇을 말하나

깨달음의 사회화란 무엇을 말하나

정병조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전 금강대학교 총장

 

불교는 중생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
불교와 국가 사회의 지향점은 다를 수 있다. 오히려 정반대의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따라서 양자의 조화를 이루는 일은 불교와 사회에 모두 중요한 일일 수밖에 없다. 과거의 불교는 국교로서의 영광을 누렸었다. 한국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모든 불교 국가의 사정이 동일했다. 서양의 경우는 불교가 차지했던 위상을 기독교가 노리고 있었다. 과학이 발달하기 이전의 불교는 국가의 이데올로기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모든 분야에 강력한 영향을 행세했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면서 이와 같은 불교의 영향력은 현저히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우선 거의 세계의 모든 국가에서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헌법에 명시하고 있다. 불교가 가졌
던 우주적 상상력은 이제 과학의 몫이 되었다. 또 지적(知的) 권위는 대학과 연구소가 다 가져가고 말았다. 이제 불교에 남은 영역은 도덕적 청정성 정도이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의 사회적 위치가 현저하게 낮아진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윤리적완성은 어떤 과학이나 지성으로도 이루어낼 수 없는 지고(至高)의 가치 기준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오랫동안 국가 사회의 기본적 이념 틀이었다. 그 결과 종교는 사회를 리드하고 재단하는 무소불위의 권위에 사로잡히게 된다. 고대 인도 사회에서 사성제(四姓制)의 최상위 계급은 브라흐마나(Brahmana)였다. 고대의 인도인들은 인간의 길흉화복이 온전히 신에게 달려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인간이 행복을 보장받
으려면 신께 예배드리고 신을 찬양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베다(Veda) 등고대 신화시대의 저술에는 이 신들에게 예배드리는 방법, 제사 의례의 구체적 전개 등을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나 신께 예배드릴 수는 없다. 오직 신의 영역에 접근할 수 있는 영적(靈的) 체험과 지혜의 완성자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그들이 바로 브라흐마나였다. 행복을 추구하려면 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신들을 기쁘게 해야 한다. 그러나 그 제사 의례를 진행하려면 먼저 브라흐마나를 공양하지 않을 수 없다. 즉 브라흐마나는 바로 ‘살아 있는 신’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 질식할 것 같이 집요한 제사 만능주의와 카스트의 인도 사회에 석가모니라는 위대한 인격이
출현했다. 그는 제사 의례뿐 아니라 신분 질서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역설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의 신분으로 고귀함과 비천함이 나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중생은 그가 무엇을 하는가에 따라 고귀할 수도 비천할 수도 있는 법이다” 라고 ‘마음의 밭을 가꾸는 일[心田耕作]’이라는 유명한 부처님 법문에 언급하는 내용이다. 신라나 고려 때 우리에게는 왕사, 국사 혹은 국노(國老)라는 직책들이 있었다. 비록 스님들이 현실적 정치에 나서는 일은 자제했을지라도 절대 권력을 멋대로 조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요승(妖僧)이라는 달갑지 않은 칭호를 받은 묘청, 신돈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게 된다. 권력과 종교는 밀접할수록 위험해진다. 종교는 타락하게 되고 국가 권력은 더욱 교만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양자가 서로 으르렁거리며 다투기만 하면 국가는 존립이 위태롭게 되고 종교는 끝없는 박해 속을 헤맬 수밖에 없다. 불교의 역사 위에서 이와 같은 비극적 대립을 법난(法難)이라고 부른다. 중국에서는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난, 즉 무(武) 자 들어가는 임금 셋, 종(宗) 자 하나가 그 대표적인 예이고 한국의 경우에는 태종, 연산군 등이 불교 박해의 군주로 꼽힐 만하다. 따라서 국가와 종교의 가장바람직한 관계 설정은 적당한 거리를 둔 ‘긴장 관계’이다. 불교는 사회를 위해서 존재해야 하며 중생의 아픔을 어루만질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국가가 종교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국가를 위해 있을 때, 이 양자의 원만한 기능이 유지될 수 있다는 뜻이다. 국가와 종교는 서로 존중하면서도 늘 ‘거리’를 유지하는 견제와 호혜(互惠)의 관계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불교의 사회화를 위한 제언
불교의 목표는 성불이다. 즉 부처님의 깨달음을 증득하기 위해서 수행해야 하는 것이 불자의 자세여야 한다. 원효대사(617~686)가 역설했던 문(聞), 사(思), 수(修)는 불교적 믿음의 나침반이다. 불교 입문의 첫 단계는 ‘많이 듣는 일’이어야 한다. 똑같은 법문일지라도 듣고 또 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법문은 일음(一音)이지만 듣는 나는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변하는 만큼 이해의 심도도 달라진다. 다음 단계는 그 배운 불법(佛法)을 마음속에 새기는 일이다. 깊이 생각하고 응용해보며, 서서히 불교의 진리가 내 안에 자리 잡게 된다. 끝으로 들어서 알고 깊이 생각했던 불교를 실천해야 한다. 따라서 불교는 ‘알고 믿어야 하는 종교’이자 아울러 그아는 바를 ‘실현해야 하는 가르침’이다. 결국 깨달음의 사회화, 즉 불교 사회화는 불교가 수행해야 하는 사회적 목표이다. 사회화(Socialization)라는 뜻은 불교적 사유가 우리 사회 속에 뿌리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표현이다. 그러나 사회화가 되려면 먼저 불자들의 자세가 건강해져야한다. 즉 내면의 평화가 저절로 사회 속에 스며들게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화는 곧 인간화(Humanization)일 수 있다. 다만 여기에 하나의 문제점이 잠재되
어 있다. 즉 내면의 정화가 반드시 사회의 정화로 이어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반대로 완벽한 사회적 조직과 법령의 완비가 곧 인간 행복을 이룰 수 있느냐 하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불교 사회화는 불교가 수행해야 하는 사회적 목표이다. 사회화라는 뜻은 불교적 사유가 우리 사회 속에 뿌리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표현이다. 21세기 불교적 깨달음이란 ‘더불어 사는 지혜’그리고 ‘타인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한다

도덕 시험 성적이 좋은 학생이 반드시 도덕적 인간이 아닐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불교의 교리와 발자취를 해박하게 이해하고 논술할지라도 과연 그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남게 마련이다. 따라서 가장 바람직한 방향은 이 불교적 내면 정화의 이상이 이 사회의 지배적 성향으로 안주하는 길 밖에 없다. 우리가 포교와 불교의 현실 응용을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까닭이다

깨달음의 현대적 의미
부처님은 보리수 밑에서 무엇을 깨달았을까? 근본불교에서는 그 핵심을 사제팔정도(四諦八正道)라고 이해한다. 대승불교는 그 표현 방법이 훨씬 다양하다. 반야(般若) 불교의 입장에서는 공(空)이고 유식(唯識)에서는 마음이다. 법화의 입장이라면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이 되고 화엄에서 말한다면 ‘법계연기(法界緣起)’, 임제선(臨濟禪)의 입장이라면 ‘자성성불(自性成佛)’이다. 이것은 결국 중생들의 근기에 따른 방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불교는 그 시대정신에 따라서 깨달음의 내용을 다양하게 각색할 수 있다. 불교의 깨달음을 그 시대정신과 공유할 수 없다면, 불교는 끝내 세속에서 도태되거나 관념적 이상주의자로 전락할 수밖
에 없다. 불교를 현실 속에 적응시키려는 노력이 바로 응용불교(Applied Buddhism)이다. 응용불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적 지식을 현실 속에 적용시키는 노력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불자들은 불교적 가치와 현실 세계를 별개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오계(五戒)는 스님들만 지켜야 하고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여기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불자의 조건은 석가모니 부처님 시대부터 지금까지 삼귀오계(三歸五戒)이다. 삼귀의를 마음속 깊은 곳에서 받아 지니고, 오계를 지키려는 결심을 굳건히 해야 한다. 나는 이 불자들의 이중성을 “절에서만 불자, 문 밖에 나서면 불자아님”이라고 진단한다.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선데이 크리스천(Sunday Christian)’이
많다. 따라서 이것은 종교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한국인의 종교 수용 형태에서 찾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불자인 까닭은 절에 자주 가고, 보시함에 돈을 넣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부처님처럼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걷는 길에는 여러 가지 격려와 응원의 팻말들이 꽂혀 있다. 사섭(四攝), 사무량(四無量)이라는 팻말, 또 육바라밀(六波羅蜜)이라는 격려가 성불의 여정에 나부낀다. 실천하기 어렵다는 것과 어려워서 못 하겠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라고 생각한다. 나는 21세기라는 시점이 불교 사회화의 큰 전기가 된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새로운 불교를 가꾸려면 불교적 원리를 시대 상황 속에 맞춰야 하고 그 속에서 해답을 찾아내야 한다. 그것이 이 시대 불교 지식인들의 사명 의식이어야 한다고 본다. 21세기의 불교적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더불어 사는 지혜’ 그리고 ‘타인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한다.

정병조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졸업 및 영남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동국대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도
네루(Nuhru) 대학 교수 및 동국대 윤리문화학과 교수, (사)한국불교연구원 이사장 겸 원장, 동국대 부총장, 불교학 연구
회 회장, 금강대학교 총장 등을 역임했으며, 『불교방송(BBS)』 라디오 프로그램 <무명을 밝히고>를 오랫동안 진행했다. 현
재는 동국대 명예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인도철학사상사』, 『불교문화사론』, 『한국 불교철학의 어제와 오늘』 ,『불교
강좌』, 『반야심경의 세계』, 『현대인의 불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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