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사회화 3 | 행동하는 불교와 사회 소통을 위한 불교적 해법

행동하는 불교와 사회 소통을 위한 불교적 해법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기초교육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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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과 식견, 수행자의 ‘단순하고’ 말끔한 삶으로 인해 도반 스님들의 존경을 받는 한 스님을 안다. 한눈팔지 않고 선방에서 화두를 참구하던 그 스님도, 예전에 한국 스님 사이에서 남방불교에 대한 관심이 크게 일어나자, 한번 가서 직접 접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영어 공부를 ‘새로’ 시작해 미얀마의 수도원에 가셨다고 한다. 그 사원에서 수행하는 와중에 여러 사원을 참방하고 신문을 찾아 읽었는데, 대부분의 사원이 학교를 비롯해 어렵게 사는 이들을 위한 시설들을 운영하고 있었고, 대중들의 일상적 삶을 위한 많은 활동을 하고 있음을 알게되었다 하시며, 그 이후로 ‘남방불교는 소승불교’란 말을 머리에서 지워버렸다고한다. 개인적인 깨달음만을 추구한다며 ‘소승’을 비판하는 한국의 ‘대승불교’에 속해 있지만, 당신이 한국의 절에서 듣고 배웠던 것이야말로 냉정하게 말하면 개인적 깨달음을 위해 촌음을 아껴 쓰라는 말이었고, 위대한 수행자의 모범 또한 절구통처럼 꼼짝 않고 앉아 수행하는 분들이었던 반면, 거기서 직접 보고 겪은 것은 대중들의 삶과 함께하며 중생을 제도하는 불교였기에, 소승과 대승이 바뀐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불교에 대해 잘 모를 때, 불교나 절이란 말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속세와 연을 끊고 산속에서 사는 모습이었다. 불교에 대해 관심이 생겨서 책을 읽고 절에 드나들면서도 이런 이미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어쩌다 ‘대승’의 삶이 속세와 연을 끊고 산속에 들어가는 게 되었던 것일까? 생각해보면, 이는 도성 출입마저 금지당한 채 산속에서 ‘천민’의 삶을 살아야 했던 조선시대의 억불정책을 그 연기적 조건으로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굳이 원효 스님의 예가 아니어도,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는 절이 단지 산속에만 있지 않았고, 스님들의 삶이 세간의 삶과 유리되기는커녕 국가 권력과 너무 가까워서 문제였으니까.
그러고 보면 지금의 한국 불교도 아직은 그 역사적 조건에서 충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사회적 억압이 사라져도 그러한 조건 속에서 몸과 생각, 습속과 문화에 밴 억압의 힘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역으로 그것을 ‘전통’이란 이름으로 보존하려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렇다면 ‘깨달음의 사회화’나 ‘행동하는 불교’는 어쩌면 이미 역사적 조건은 사라졌으나 습속과 관성의 형태로 아직도 지금 여기의 불교를 사로잡고 있는 이 ‘업’의 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보다 근본적인 문제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다행인 것은 그래도 근자에 이르러 사회적 삶을 바꾸려는 불교적 실천이 여러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으며, 그 확산에 공감과 신뢰의 기운이 실려 있다는 사실이다. 몇몇 스님들이 시작한 ‘삼보일배’는 종교를 떠나 사회적 실천의 잘 알려진 방법이 되었고, 구속을 각오한 운동가들이 더 이상 기댈 수 없게 된 명동성당 대신 조계사를 찾게 된 것은 그런 사실의 한 단면일 터이다. 지금 상태가 어떤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지금’을 관통하는 흐름이 어떤 추세를 그리고 있는가라고 할 때, 확산과 상승의 방향은 오래된 업력에서 벗어나는 이탈의 힘에 희망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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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을 표방하는 불교가 보살행을 가르치기 위해 제시했던 6개의 바라밀행 가운데 이전에 가르치던 8정도와 크게 다른 걸 하나 고르라 하면 아마도 ‘보시’를 고르게 될 터이다. 지계부터 선정까지 대개 ‘나’를 향해 눈을 돌리게 하는 덕목임에 비해 보시는 남을 향한 나의 언행에 눈을 돌리게 한다는 점에서도 다른 것과 다르다. 보시는 선물이나 증여를 요체로 하는 삶의 방식을 가르친다. 선물이나 증여는 주는 이나 받는 이 모두에게 기쁨을 주고 생존의 압박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게 해준다. 또 주고받는 행위를 통해 개인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준다. 서로 부딪쳐서 피곤할 수도 있을 ‘기대어 사는 삶’을 기쁨과 평화의 방향으로 이끌어준다. ‘보시’를 첫 번째 바라밀로 제시한 것은, 서로 기대어 사는 삶을 어떤 식으로든 피할수 없다면, 함께하는 삶의 평화와 기쁨 없이는 ‘극락’은 있을 수 없다는 깨달음을 표현한다고 나는 믿는다. ‘대승’이란 말로 표명되는 사회적 실천의 문제의식이 거기서 새로 부상하고 있음을 본다.
그런데 절에서 ‘보시’란 말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생각해보면, 약간의 당혹감이든다. ‘보시한다’란 말을 신도가 절에 재물을 증여했다는 의미로 쓰는 경우는 많지만, 절이 누군가에게 재물을 증여했다는 의미로 쓰는 일은 별로 없는 듯해서다. 절은 보시 바라밀의 ‘주어’가 아니라 그것을 받는 ‘대상’이 된 것일까? 물론 보시에는 재물의 보시만이 아니라, 법보시도 있고, 무외시도 있으며, 스님들의 설법이나 절이란 공간이 주는 평온함이 일상적으로 증여되고 있음도 안다. 눈에 보이는 재물의 증여만을 보시로 보게 되는 중생의 감각이 문제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해도 ‘보시’라는 말이 절을 떠나 신도들 손에 들어가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은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가난한 절집 살림 때문일까? 하지만 유심히 보면 속세에서도 어려운 이들에게 눈길을 주고 무언가 주는 것은 부자보다는 가난하거나 가난을 아는 이들이다. 많든 적든 살림 탓을 하며 보시하지 않는 것은, 현실적 가난보다는 마음의 가난 때문인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승가 공동체라면 재물 말고도 줄 수 있는 것이 많다. 법보시를 한다고 하지만, 신도들 모아놓고 설법하는 정기적 법회 정도라면, 다른 종교는 물론 세간의 학교와 비교할 수 없다. 더구나 절에서는 가르침도 배움도, ‘공부’라는 말 자체도 말이나 글이 아니라 몸으로 행하는 실천을 통해 이루어짐을 강조하지 않는가? 재물의 증여가 없어도, 설법이 없어도 중생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실천이 있다면, 그것의 촉발로 무언가 삶의 지혜를, 삶의 방향을 잡게 되었다면, 중생들은 무언가 증여 받았다고 느낄 것이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종교 단체든 운동 단체든, 무언가 애써 행해서 무언가 소중한 것을 지켜내거나 새로운 삶의 조건을 만드는 데 기여할 때 대중들이 갖는 호감과 지지는 그들이 무언가 ‘받았다’고 느끼고 있음을 의미한다. 보시의 주어로 느껴지는 일이 적다면, 그들에게 준 것이 많지 않아서일 것이다. 중생들을 지도하는 스승이라면 중생보다 더 많은 능력을 갖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보시 능력을 겨루는 일종의 시합에서 마땅히 ‘이겨야’ 한다. ‘불교 행동주의’ 같은 게 있다면, 아마도 이를 첫째 원칙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중생들의 존경과 감사를 받는 보시행은 중생들의 보시를 다시 불러 모은다. 그에 대해 좀 더 훌륭한 보시로 다시 응답하고, 중생들은 다시 그에 부응하는 보시로 응답하는 보시의 되먹임이 형성된다면, 무엇을 주고받았는가와 다른 차원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과 관계가 출현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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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보시하는가 이상으로 어떻게 보시하는가도 중요한 문제다. 중생들은 중생인지라 대개는 자신이 보시했음을 확인받고 표시되기를 바란다. 그러니 기왓장이나 연등에 이름을 적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종교 단체가 보시하면서 보시자를 기억하게 하거나 생색을 내게 되면, 심지어 어떤 응분의 행위를 요구하며 보시를 하게 되면, 주고도 욕을 먹는다. 전에 종묘공원에서 노인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면서, 성경을 읽거나 예배에 참여하길 요구하는 걸 본 적이있다.

불교적 가르침을, 깨달음을 사회적으로 공유하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의 삶을 제약하고 규정하는 연기적 조건을 포착하고 그에 부합하는 새로운 형태의 가르침으로 변환시켜야 한다

사실 종교 단체가 ‘자선’을 행할 때 빈번히 보게 되는 일이다. 그러나 옆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대개는 얻어먹으면서 욕들을 하고, 옆에서 지켜보면서 욕들을 한다. 그건 증여 받는 사람을 일종의 ‘거지’로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누가 주는지도 모르게 하면 대체 누가 주는 것인지 알려고 애를 쓸 것이며, 그렇게 생색 없이 주는 이들에게 감사와 존경의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불교 행동주의’의 또 하나의 원칙이 여기에 있다.
보시도 그렇다. 아무리 좋은 선물도 생색을 내면 선물이 되지 않는다. “선물을 ‘선물’이라 하면 선물이 아니다.” 일종의 채무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주었다는 생각도 없이 주는 보시, 무주상보시를 설했을 것이다. 법보시도 그렇다. 불교의 가르침은 다른 종교와 달리 현대 과학이나 철학 등 현대적 지식과 매우 부합한다. 심지어 현대의 지식을 한 걸음 더 밀고 나가도록 할강력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불교 교리와 현대 과학을 대응시키며 하는 말은 비불교도들의 저항을 야기한다. ‘내 것’이란 생각이 ‘사회적 소통’을 가로막는다. 불교 색채를 지우고 말할 때 가장 효과적인 법시가 이루어진다. 그래도 불교에서 온 것임을 말하고 싶겠지만, 말하지 않아도 대개는 알아차린다. 흔적을 깨끗이 지우기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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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적 가르침을, 깨달음을 사회적으로 공유하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의 삶을 제약하고 규정하는 연기적 조건을 포착하고 그에 부합하는 새로운 형태의 가르침으로 변환시켜야 한다. 가령 법륜 스님 같은 분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고 지지를 받는 것은, 지금 사람들의 삶과 감각 속으로 들어가 말하기 때문일 것이다. 종교가 과학과 같을 이유는 없지만, 과학적 지식이 지식의 준거가 된 시대라면 그 속으로 들어가 말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과 불교를 섞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인공지능으로 표상되는 기술이 대중의 일상을 규정하고 있다면, 그 기술에 대해 불교의 눈으로 분석할 수 있어야 하고 거기서 좀 더 나은 사회를 위한 길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돈이 모든 걸 지배하고 돈을 증식하는 게 모든 욕망을 빨아들이는 시대라면, 그로 인해 중생들의 삶이 양극화가 심해져서 많은 이들이 삶의 안정성 과 최소한의 경제적 자원이 부족해 고통받는 시대라면, 그 고통을 덜기 위한 불교적 출구를 찾으려 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대중 속으로’ 들어가고 ‘사회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이는 불교 행동주의의 또 다른 원칙이라 하겠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일자리가 크게 줄어들고 일을 해도 빈곤에서 벗어나기 힘든 시대, 그래서 더욱더 돈에 얽매이게 되는 시대일수록 긴요해지는 것은 함께하는 삶, 서로가 기대어 살면서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 또한 서로에게서 받는 삶의 방식이다. 가족마저 공동체적 성격을 잃고 와해되어가는 상황이기에, 새로운 종류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게 더욱더 중요하다. 일할 곳은 없지만 일할 능력이 있다면, 그걸 필요로 하는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필요하지만 돈이 없는 이들에게 일을 해줄 수 있다. 역으로 도움이 필요하지만 돈이 없을 때 다른 이의 도움을 받을 수 있
다. 돈을 매개로 하지 않는 다른 관계가 가능해진다. 공동 식사는 같은 비용으로 좀더 나은 식사를 할 수 있게 해준다. 무엇보다 직장이나 가족이 제공하던 유대마저 최소화되어 발생하는 고립과 고독에서 벗어나도록 해줄 가능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공동체를 이루어 산다는 건 결코 쉽지는 않은 일이어서 당연히 발생할 갈등을 조정하고 해결하는 능력을 요한다. 2,000년 이상 승가 공동체를 지속해오면서 쌓인 노하우, 공동체적 삶을 사유하고 다루는 불교의 가르침이 사회적 의미를 갖는다면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함께하는 삶을 어렵게 만드는 게 ‘나’라는 집착, ‘내 것’에 대한 집착이며, ‘우리’와 ‘남’을 구별하고 내 편과 네 편을 가르는 생각임을 안다면, 그러한 상들을 버리거나 약화시키라는 가르침, 그를 위한 실천의 기술들처럼 지금 시대에 다른 삶을 여는데 유효하고 소중한 것은 없을 테니까.
사회적 활동을 활성화한다는 것은 단지 ‘자선사업’을 확장하고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사회적 발언을 확대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건 어쩌면 불교 아닌 다른 집단에서 잘하는 것이고 열심히 해온 것이다. 그에 대해 관심을 접어선 안되겠지만, 불교에는 불교만의 사회적 행동을 사유할 개념과 이론, 실천의 기술들이 있다. 현재의 연기적 조건에서, 불교가 갖는 이런 남다른 능력과 자원이 새로운 사회관계를 형성하는 힘을 발휘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반복해서 묻고 창조적인 길을 찾아야 한다. 깨달음의 사회화란 단지 깨달음이라 명명되는 경지를 찾아 나서는 사람들을 늘리는 일도, 깨달음을 지향하는 집단의 사회적영향력을 확대하는 일도 아니다. 그건 차라리 불교에서 성취한 깨달음이 사회적으로 공유되게 하는 일이다.

이진경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박태호라는 이름으로 서울과학기술
대학교 기초교육학부 교수로 강의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불교를 철학하다』, 『철학의 외부』, 『자본을 넘어선 자본』, 『역
사의 공간』, 『삶을 위한 철학 수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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