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사회화 4 | 불자들의 사회적 각성, 사회의 기본 선을 위한 제언

불자들의 사회적 각성, 사회의 기본 선을 위한 제언

구상진
대한불교진흥원 이사・헌법을생각하는변호사모임 회장

 

들어가는 말
송월주 조계종 전 총무원장은 1995년 2월 “깨달음의 사회화”를 주창했다. 그전에는 베트남 틱꽝죽(Thich Quang Duc) 승려 등의 소신(燒身)에서 연유된 ‘참여불교(Engaged Buddhism)’ 또는 틱낫한(Thich Nhat Hanh)의 ‘사회 참여적 불교’ 운동이 있었고, 1980년대에는 ‘민중불교’라는 이름으로 정부 비판 운동도 있었다.이들 움직임의 요지는 불교도가 개인적 수행이나 기복에 그치지 말고 국가 사회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자는 것이었지만, 그 주장에는 부처님 가르침과는 거리가 있는 사회주의적 투쟁 색채도 적지 않았다.

불교는 출세간의 종교인가?
과거 유가(儒家)는 불교를 “무부무군지교(無父無君之敎)”라고 폄훼했고, 정도전은 『불씨잡변(佛氏雜辨)』에서 불교의 윤회론, 인과론, 심성론 등을 비판하면서 불교에는 사회윤리적 측면이 결여된 것처럼 매도했다.
학자 중에도 선(禪)불교에서 말하는 공(空) 중심의 깨달음의 초월성이 사회적 윤리 실천에 장애가 된다는 견해(길희성), 개인적 해탈이라는 목표가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대한 소극성을 초래한다는 견해(붓다의 관심은 개인을 변화시키는 데 있었고 현실세계는 변화의 대상이 아니라 영원히 떠나야 할 것으로 가르쳤다는 주장: Winston King), 불교는 은둔해 세속 밖에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신비적 주술적 종교로서 세속내적(世俗內的) 합리
성과 윤리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견해(막스 베버) 등의 비판이 있어왔다. 이러한 주장에는 중요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점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부처님 가르침의 진면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부분적 지견을 내보이는 데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부처님께서는 당시의 육사외도(六師外道)를 비판하셨다. 푸라나 카사파(PuranaKassapa)의 도덕부정론,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ala)의 숙명론, 아지타 케사캄발린(Ajita Kesakambalin)의 유물론, 산자야 벨랏티푸타(Sanjaya Bbelattiputta)의 회의론, 파쿠다 카차야나(Pakudha Kaccayana)의 불멸론, 마하비라(Mahvra)의 자이나교를 모두 비판하신 것이다. 이것은 세상사의 근본 이치를 밝혀서, 올바른 삶의 방법을 가르치기 위한 것으로써, 결코 세상을 벗어난 가르침이 아니다. 부처님의 명호 중에는 세간해(世間解)·조어장부(調御丈夫)·천인사(天人師)·세존(世尊) 등이 있고, 싯다르타 태자 출생 시 석가족 외에도 천신과 아시타 선인 등 인천(人天)이 다 환희했다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이 세간에 아무런 의미가 없을 리 없다. 대승 경전에 의하면, 여래의 최종 서원은 ‘광도중생(廣度衆生)’이고, 사홍서원의첫째도 ‘중생제도(衆生濟度)’이며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 보살의 길이다. 기도문 중에는 “원멸(願滅) 사생육도법계유정 다겁생래제업장 아금참회계수례 원제죄장실소제 세세상행보살도”라는 엄청난 것도 있고,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 처한 곳마다 주인으로서 맡은 바 일을 하라, 그곳이 모두 진리의 자리이다)이라는 임제(臨濟 義玄)의 말도 널리 알려져 있다. 불교 원리로 국가를 운영한 사례도 적지 않다. 인도의 아소카왕(?~BC 238)의 대제국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한 굽타 왕조(AD 320~480)까지 불교 국가였다. 중국의 당(唐)과 원(元),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의 융성도 불법에 기초했다. 삼국 특히 신라와 고려는 말할 것도 없다. 현재도 태국이나 스리랑카, 네팔 등지에서는 불교가 현실 규범으로서 훌륭하게 작동하고 있다. 근자에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서도 불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수행이 활발해지고 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가르침 자체가 세속에 무능력한 것이 아니고, 오늘날의 한국 승려나 신도가 복잡다단한 현실 문제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데 있다.

불교의 인과응보 사상은 사회적 부조리를 해소하는 데 무능력한가?
혹자는 불교 교리에 의하면 현세의 고통은 모두 전생의 업보로 인한 것이므로 구제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된다면서, 불교 교리가 기득권 수호를 위한 엉터리 이론이라고 비난하나, 이는 무지의 소치이거나 의도적인 왜곡에 불과하다. 부처님께서는 수드라(sudra) 계급인 우바리 존자(10대 제자의 한 분, 지계제일)의 출가를 받아들이고, 귀천은 출생이 아니라 행위에 의해 정해진다 하셨고, 가르침 전체가 중생을 고해에서 건져내기 위한 방편인데, 업보로 인한 고(苦)는 면할 길이 없다는 것은 종지(宗旨)일 수 없다.
오히려 인과응보 사상은 존재의 원리인 연기(緣起)사상과 함께 현상의 원인을 밝히고 올바른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지혜이며, 그것만이 도덕적 해이와 같은 부작용이 없고 지속 가능한 해결책을 만드는 방법이다. 전체 이치도 알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을 도와줄 만한 준비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충동적으로 또는 선동을 위해 제기하는 일시적 방안은 잠시 사람을 현혹할 수는 있다하더라도 종국적으로는 고통을 증진시킬 뿐 진정한 해탈로 이끌 수 없다. 성서에도 “소경이 어찌 소경을 인도할 수 있겠느뇨?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뇨?”라는 구절이 있다. 구성원 개개인의 변화 없이, 사회나 국가를 이리저리 짜 맞추어 강제한다고 해서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기는 어렵고, 지도 세력 자체에도 문제가 많다면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올바른 삶의 길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정진이 불교도의 삶이 되어야 한다. 그와 같이 나아가면 세상, 즉 내 주변의 사람과 자연을 바로 이해하게 되고, 바른 행실을 하게 되는 것이며, 점차사회의 일, 나라의 일을 맡아도 훌륭하게 처리할 수 있게 되고, 지혜와 복덕을 갖추면 나라와 세계를 다스릴 수도 있게 될 것이다.

불교는 무엇을 가르치는가?
부처님의 가르침은 실로 광대무변해 성불하기 전에는 그 전체를 요해하기 어렵고 진정한 법력을 발휘할 수도 없다. 그러나 초발심부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나름의 깨우침을 얻게 되고 힘도 받게 된다. 그리하여 몸과 마음 모두 올바르게 변하게 되고, 지혜도 늘어나게 된다. 그러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주변 사람에게는 공덕이 되고, 그러한 사람의 일거수일투족, 한마디 말, 한순간의 눈빛도 감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국가 사회적 문제 중에는 개인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고, 집단적 대책이 필요한 일도 허다하다. 집단 활동에도 개인적 미덕은 중요하고, 집단 활동을 위한 지혜, 용기 등도 개인적 능력이다. 개인적으로는 무능하거나 패륜적으로 보이는 인물도 중요한 기능을 하고, 때로는 그런 사람이 더 큰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도구로서 기능한 것에 불과하고, 종국적으로 수련된 사람의 인도가 필요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잘못된 길로 오도하지 않는 완전한 가르침이라는 것은 이러한 점을 표현한 말이라 할 것이다.

불교도의 세상살이는 어떠해야 하는가?
◦ 팔정도(八正道)와 육바라밀 불교는 귀의(歸依)하는 종교다. 부처님의 위신력과 가피력이 있는 것도 분명하지만, 신통 가피를 구하는 것보다는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올바른 삶의 길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정진이 불교도의 삶이 되어야 한다. 그와 같이 나아가면 세상, 즉 내 주변의 사람과 자연을 바로 이해하게 되고, 바른 행실을 하게 되는 것이며, 점차 사회의 일, 나라의 일을 맡아도 훌륭하게 처리할 수 있게 되고, 지혜와 복덕을 갖추면 나라와 세계를 다스릴 수도 있게 될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팔정도(八正道)’와 ‘육바라밀((Pāramitā)’이라는 분명한 답을 주셨다. 정견(正見 : 바르게 보기), 정사유(正思惟 : 바르게 생각하기), 정어(正語 : 바르게 말하기), 정업(正業 : 바르게 행동하기), 정명(正命 : 바르게 생활하기), 정정진(正精進 : 바르게 정진하기), 정념(正念 : 바르게 의식하기), 정정(正定 : 바르게 집중하기)이 그것이다. 무엇이 바른 것인가는 신심으로 염불하고, 간경하고, 참선하면 알 수 있다. 공산당이 주장하는 정치적 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은 당(黨)의 정략적 해석에 의해 정의되지만, 부처님이 가르치신 바름은 탐진치 삼독심을 버리고 정진하면 누구나 직심(直心)으로 알게 되고 즉각 우주와 합일되어 다이도르핀(didorphine)이 분비되는 바름이다. 육바라밀은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반야(般若=知慧)이다. 방편(方便), 원(願), 역(力), 지(智)를 더해 십바라밀을 들기도 한다. 팔정도, 육바라밀로 이 혼탁한 세상을 어떻게 헤쳐 나가느냐는 걱정도 있겠지만, 『법화경』의 「방편품」을 비롯해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사마악도라도 제압하고 선도할 충분한 방법이 베풀어져 있고, 진실한 수행자에게는 불보살의 가피가 있으니 두려워할 까닭이 없다.

국가 사회 문제에 대한 대처
요즘 나라 안팎이 대단히 어지럽고 세상이 변하고 있다고도 한다. 좌파나 기독교도들은 맹렬히 활동하고 있는데, 불교도들은 뚜렷한 대응책을 만들지 못한 나머지 눈과 귀를 막은 채 나 몰라라 하고 은둔하고 있거나, 어떻게 흘러가겠지 하 면서 체념하고 있는 듯하다. 개인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국가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을 나누고 힘을 합할 수 있도록, 사부대중이 합심한 조직을 만들어 대처해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 먼저 승려들은, ‘중생은 스님의 지도와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억지 주장을 버리고, 수행자로서의 본분으로 돌아가서 스스로 정진하고 불교계 대동단결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귀의승은 기본적 공덕행이지만, 여기의 승보는, 사부대중의 귀의처인 제1의승(第一義僧)을 말하는 것이고(『대승이취육바라밀다경』), 최소한계행과 공덕을 갖춘 스님을 말하는 것이지, 승려 일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승려 일반은, 전업 수행자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재가 신도와 큰 차이가 없고 세속적문제에 관해서는 잘 모르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승려라고 해서, 예컨대 동성애 문제와 같이 잘 알기 어려울 세속사에 관해 개인 의견에 불과한 것을 부처님의 가르침인 것처럼 주장하거나, 교단의 일반 사무 등 불교계의 중대사를 전횡하고 있는 것은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불자들도 사찰별 지역별 직장별 신도회, 교수 학생 등 신분별 신도회 등으로 결집해 도반이 되는 동시에 세상사에도 집단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조직을 구축해 부처님 가르침의 차원에서 대책을 협의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함으로써 유대를 강화하고, 방안을 강구해가는 것이 긴요하다고 본다.
일본의 공명당(Komeito, 公明党)이나 독일의 기독민주연합(CDU)과 같은 종교적 정당 활동으로 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의견을 수렴해야겠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이 훼손되고 중생이 도탄에 빠지게 되는 데도 이를 방치하는 것은 불교도의 도리가 아닐 것이고, 부처님께서는 실지실견 시제중생(悉知悉見 是諸衆生)하시니, 진실로 정진하면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구상진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검사 생활을
했고, 서울시립대학교 법학과 교수 및 동 로스쿨 원장, ‘법조불교인연합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헌법을생각하는변호사모임’ 회장, 대한불교진흥원 이사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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