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재가열전|내가 만난 붓다_부처님의 가르침이 좋아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좋아서

이수덕
전 불교텔레비전 사장

 

사람마다 신앙을 갖게 되는 원인이나 계기가 있겠지만 각자의 업이 다르듯이 계기도 다양하니 그 다양함을 공유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원고 청탁에 응했다. 그런데 막상 자신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에 얼른 시작하기가 난감했다. 글을 시작할 수 없었던 이유는 혹여 스스로를 미화하는 글이 되어 읽는 사람이 불편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그래서 최대한 자랑을 한다거나 나를 미화시킬 용어의 선택을 피하면서 시작하려 한다.
나는 산골 오지인 경남 합천의 샘실(泉谷)이라는 곳에서 6남 3녀의 일곱째로 태어났는데 여섯 형제 중 다섯째 아들이다. 그 당시 대부분의 부녀자는 사찰이나 사당에 가서 안가태평(安家太平)을 빌고 남자들은 서당을 드나들며 한학을 배워 선비로서의 권위를 유지했듯이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어머님은 정월 보름 기도, 이월 바람 기도, 삼월 삼지 기도, 사월초파일 기도, 오월 단오 기도 등에 정성을 기울이셨고 아버님은 부모님 봉양과 가족의 생계, 그리고 우리 9남매의 교육을 위해 전각과 종묘상을 경영하시고 적지 않은 농사일을 두 명의 일꾼과 함께 지으시며 동리에서 남부럽지 않게 생활하셨다.

이수덕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고, 스페인 마드리드대학교 문과대학에서 수학했다. 동국대 불교대학원에서 선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불교 텔레비전(BTN) 사장, 참여불교재가연대 공동대표, 생명나눔실천본부 후원회장, 대한불교진흥원·불교방송 이사를 역임했다.

 

사랑방에선 동리 학동들이 모여 한문을 공부하는 소리가 끊기지 않았고 매일 새벽과 저녁에는 본체 중간 방에 차려져 있는 간이 법당에 예를 올리고 염불을 하셨다. 그리고 합천읍에 있는 경원서당과 태을당이란 사업장에는 늘 한복차림의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그때 어린 마음에 우리 아버님은 정상적으로 한문 교육을 받았고 처음부터 부유했던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철이 들어 아버님의 지난날을 살펴보니 아버님은 서당에 입문만 하셨지 끝까지 공부하실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았다. 소위 주경야독을 하며 시간 나는 대로 스승과 동문들을 만나 공부한 내용을 점검받으셨다.
아버님이 제일 먼저 들어갔던 서당은 율계 정기 선생의 무산정사(武山精舍)였는데 1927년 율계 선생이 전남 구례로 20여 명의 제자들과 함께 이거하자 아버님은 스승을 따라갈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해 합천의 창계 김수(金銖) 선생의 문하로 들어가서 공부를 계속하시다가 집안이 곤궁해지자 주경야독의 길을 택하셨다고 한다.
이렇게 한학을 하시던 어른이 30대 중반에 충청도 모 절로 출가를 하시어 불교에 귀의하셨다는데 그 실질적인 동기에 대해선 들어보지 못했다. 절에서 행자 생활을 계속하시다가 할아버님의병환이 깊어지고 할머님의 건강도 좋지 않아 할아버님을 용추사에 모시고 가서 요양을 시키셨다. 절과 속가를 오가면서도 철저하게 오신채를 금하시는 등 계율을 지키셨는데 내가 지금까지 오신 채를 피해 온전한 채식을 하는 것은 나의 아버님과 어머님의 영향이 크다 하겠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부처님의 품으로 녹아들어간다. 부처님께서 걸었던 길과 같은 길을 걷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닮아가려는 나의 발원은 점점 더 깊어만 간다.

내가 천자문을 달달 외우던 유아 시절의 기억을 빼고 나면 늘 아버님의 손에 끌려 해인사, 연호사, 그리고 사찰 건립에 깊이 관여하셨던 합천읍에 소재하는 용흥사 등에 자주 다녔으나 신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용흥사에서 통학하다가 새벽 예불이 힘들어 뛰쳐나왔고 다시 해인사 말사인 연호사에 의탁되어져 한동안 통학했으나 주지 스님께서 “너는 훌륭한 중이 되어야 한다”는 채근에 두려움을 느껴 오래 견디지 못하고 짐을 쌌다. 지금도 그때 행자의 길을 계속 걸었으면 내 삶이 좀 더 나았을까?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연호사에서 견디지 못하고 나온 후부터는 학교 가까이 미륵부처님을 모시는 작은 암자에서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생활했다. 불교에 대해 지식이 없었으나 어쩐지 부처님이 좋았다. 기독교 계통의 고등학교에서 의무적으로 하는 주 2시간의 『성경』 공부와 2회의 예배 시간에 참여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접했고 대학에서는 『대학』, 『중용』, 『논어』 그리고 노자 『도덕경』 등을 경기여고 교사와 합천중·고의 교장을 역임하셨던 장성균 선생님으로부터 사사했다. 스페인어를 전공했던 관계로 스페인 신부인 모렐로(Molero) 씨와 멕시코의 로메로(Romero) 씨 등으로부터 스페인어로 된 『성경』을 중심으로 공부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가르침 그리고 유교와 도교의 사이에 같은 점과 다른 점에 대해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마드리드 대학에서 공부하며 독실한 가톨릭 국가의 사회상을 보며 나름 많이 배우기도 했다. 그리고 귀국해 사업을 하면서 시간 나는 대로 명상하는 곳을 돌아다니며 열심히 수련을 했다. 하지만 교학에 대해서는 많이 소홀했다.
나의 본격적인 불교 공부는 1999년 5월 당시 부도 위기에 있던 불교TV주식회사에 관여하면서부터다. 그냥 불교가 좋아 언제 어디를 가나 “나는 불자다”라고 했으나 경전 한 권 독파한 일도 없이, 다시 말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정확한 이해도 없이, 이곳저곳 다니며 명상 수련한다고 떠돌던 어설픈 불자인 내가 불교TV의 이사장이 되니 당시 32명의 이사 중 27명의 이사가 스님으로 구성된 이사회의 원만한 운영을 위해선 불교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이에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불교 공부를 시작했고 목동의 건물 꼭대기에 법당을 세워 많은 도반과 교학과 선학을 동시에 익혀나갔다.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 논문을 위해 대만과 중국을 오가며 많은 스승과 좋은 자료를 접하고 다른 사람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해 12년 만에 대학원을 졸업했다. 학위 취득이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는 제2의 시작이 되었다. 특히 대만의 여러 사찰을 방문해 스님과 신도들의 수행 과정을 지켜보며 불자로서의 처신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성찰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부처님의 품으로 녹아들어간다. 부처님께서 걸었던 길과 같은 길을 걷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닮아가려는 나의 발원은 점점 더 깊어만 간다.
아무튼 나의 부처님에 대한 경외심이나 믿음과 유교나 도교 그리고 기독교를 공부하면서도 초지일관 부처님의 가르침이 제일 수승하다는 생각을 한시도 잃지 않았던 것은 부모님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또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신심이 깊어감도 그 시작은 평생을 깨끗한 소식(素食)과 기도를 계속해오신 부모님으로부터 말미암았음을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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