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생명 윤리 | 고통받는 인간의 자력구제가 불법

고통받는 인간의 자력구제가 불법

남시중 미국 변호사

 

불교경전에 자주 등장하는 말은 ‘무상(無常, anicca)’과 ‘고(苦, dukkha)’이다. 초기경전에 그려진 붓다는 기회 있을 때마다 삶의 모든 현상은 무상하고 괴롭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일체개고(一切皆苦)를 강조했다. 그 때문에 붓다는 당대에 이미 염세주의자라는 공격을 받았다. 논박하는 대신 “나는 언제나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을 말한다”라고 답했다. 붓다의 설법은 왜 인간이 괴로움을 겪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괴로움을 해소할 수 있는지에 집중하고 있다. 붓다가 말한 괴로움의 발생 원리를 이해하고 그 해소 방법론을 정확히 실천하려면 반드시 명상 수행이 있어야 한다고 난 믿는다. 불법은 고도로 정밀한 명상을 통해 얻은 무아(無我) 자연현
상에 대한 통찰이기 때문이다.
『법구경(法句經)』을 보면, “모든 것은 무상하다. (명상에서 얻어진) 지혜의 눈으로 관찰해야 괴로움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 괴로움을 넘어서 마음의 고요함(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다(一切行無常 如慧所觀察 若能覺此苦 行道淨其跡)”라는 구절이 나온다.

『법구경』은 3세기 초 팔리어에서 한자로 번역되었는데,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일체행무상(一切行無常)’은 팔리어로 ‘sabbe sankhara anicca’이다. 무상을 논한 위문장에 이어 ‘모든 것은 괴롭다’로 시작하는 ‘일체중행고(一切衆行苦)’ 구절이 나온다. ‘일체중행고’ 역시 팔리어로 ‘sabbe sankhara dukkha’이다. ‘삽베(sabbe)’는 지금도 인도 방언에서 사용하는 ‘모든(all)’이라는 형용사이다. ‘아닛짜(anicca)’는 영원불변한다는 ‘닛짜(nicaa)에 부정 접두어 ‘a’를 붙여 영원불변하지 않다, 즉 무상하다는 뜻이다-늘 변한다는 ‘상변(常變)’과 같은 말을 쓰지 않고 ‘무상’으로 옮긴 건 팔리어 원문의 맛을 그대로 살린 뛰어난 번역이다-. ‘두카(dukkha)’는 불교에서 말
하는 괴로움이다. 『법구경』 팔리어 원문과 한자 번역을 비교해보면, ‘일체행무상’에서 나오는 ‘행(行)’이나 ‘일체중행고’에 나오는 ‘중행(衆行)’ 모두 ‘상카라(sankhara)’라는 걸 알 수 있다. 무상하다는 구절에서는 ‘상카라’를 ‘행’으로 옮겼는데 괴롭다는 ‘일체중행고’ 구절에서는 왜 ‘衆(무리 중)’ 자를 붙여 ‘중행’으로 번역했을까?
한자어 ‘行(갈 행)’은 사람들이 오가며 모이는 사거리에서 그 모양을 따온 문자이다. 오가는 곳이기에 ‘가다’, ‘행동하다’라는 뜻으로 사용하지만, 원래는 ‘각기 다른 곳에서 와서 모인다’ 혹은 그렇게 ‘모인 것’이라는 뜻이다. 이 어원을 모르면 지금 우리는 왜 ‘상카라’를 ‘행’과 ‘중행’으로 옮겼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상카라’는 움직이는 것을 의미하는 ‘카라(khara)’에 모아 묶는다는 의미의 접두어 ‘상(san)’이 붙은 말이다. ‘각기 따로 움직이는 것을 모아 묶는다’ 혹은 그렇게 묶인 것’이라는 의미이다. 팔리어 불경을 영어로 번역한 미국인 상좌부 학승 보디 스님(Bhikkhu Bodhi)은 ‘상카라’는 연기설에 따라 ‘인연으로 모여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디 스님의 결론은 바르다고 보지만, ‘연기설’이라고 부르는 설법도 붓다의 명상 체험에서 나온 지혜이기에, ‘상카라’는 명상 통찰에서 나온 용어로 보아야 한다. 경전만 보고 불법을 이해하려고 하면 중요한 용어가 명상에서 얻은 통찰을 설명하기 위해 억지로 만들 수밖에 없었던 말이라는 것을 간과하게 된다.

불법(佛法)은 고통받는 생명이 자력구제에 나서는 또 다른 차원의 진화이다. 제행무상이다.

‘상카라’를 과학 용어로 치환해 풀면, 우리 뇌에서 전기 신호로 흐르는 감각 정보와 생각인 언어 정보를 가리킨다. 정보 데이터다. 감각과 언어 정보 데이터가 결합하면 판단(분별 혹은 생각)이 일어나고, 그 판단의 언어 정보에 따라 과민한 호르몬 반응이 일어날 수 있다. 과민한 호르몬 반응은 현상 세계의 우리 입장에서 보면 괴로움 혹은 즐거움으로 느껴지는 흥분이다. 일체가 괴롭다는 ‘일체중행고’는 상카라가 어울려 만들어내는 이 두뇌 현상을 가리키고 있다. ‘일체행무상’에서는 행(상카라)이 무상의 특성을 가졌다는 사실을 강조했고, ‘일체중행고’에서는 ‘모인 무리’라는 뜻의 ‘중’을 굳이 덧붙여 행이 모이면 고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려 했다고 난 읽는다. 팔리어 원문 뒤에 숨은 고도의 명상 체험을 정확히 공유한 자만이 적확하게 옮길 수 있는 놀라운 번역이다. 삼특상(三特相)으로 알려진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일체개고(一切皆苦)’처럼 구호 식으로 압축된 한자 표현에는 『법구경』에 나오는 중요한 구분이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말과 영어 번역도 이런 세밀한 차이를 드러내지 못한다.
붓다는 당연히 상카라의 물질적 본질은 뇌에 흐르는 전기 신호임을 몰랐다. 하지만 명상으로 살펴볼 때 이 모든 상카라는 일어났다 곧 사라지는 무상임을 보았고 동시에 그 무상한 전기 신호가 결합해서 괴로움, 즉 과민한 호르몬 반응이 일어난다는 점도 간파했다. 바늘로 피부를 찔렀을 때 오는 따끔한 느낌 그 자체는 피부 신경조직에서 뇌로 전달되는 단순 전기 신호에 불과하다. 흐르는 전류라 금세 사라진다. 무상하다. 감각 신호는 그냥 느낌일 뿐 대뇌피질(大腦皮質, cerebral cortex)에서 ‘아프다’라는 생각으로 이어지지 않는 한 고통 호르몬이 방출되지 않는다. 간호사가 몰래 주사를 놓아버리면 아프지 않다. 바늘에 찔렸다고 해도 전기 신호를 뇌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쾌감 호르몬이 방출되어 오히려 즐기게 된다. 신체 고통을 즐기는 피학성애(被虐性愛, masochism)가 극단적인 예이다.
‘괴롭다’ 혹은 ‘행복하다’는 느낌은 모두 뇌의 인지 판단에 따른 2차 호르몬 반응이다. 뇌의 감각 정보 처리와 인지 판단 그리고 연계된 호르몬 반응이 찰나에 일어나기에 우리는 괴로움과 행복감이 생각이나 분별 혹은 언어 상상으로 촉발된다는 사실을 쉽게 자각하지 못할 뿐이다. 하지만 깊은 단계의 명상에서는 감각 정보(체험)와 언어 정보(생각)가 구별된다. 어떻게 모여 어울리면서 호르몬 반응(감정)을 일으키는지 뇌 스스로 뇌 정보 처리 과정을 세세하게 조망할 수 있다. 호르몬을 조절하는 뇌의 시상하부는 파충류나 인간이나 해부학적으로 그 구조와 작동 방식이 동일하다(인간 진화의 역사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우리 두뇌에 남아 있는 이 ‘원시 뇌’는 실제 체험에서 오는 감각 정보와 대뇌피질에서 이루어진 정보 해석(분별)을 구분하지 못한다. 뇌에서 만들어진 생각만으로도 시상하부는 호르몬 반응을 일으키고 그 호르몬 작용에 의해 새로운 생각이 촉발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성냄과 같은 격렬한 감정적 반응은 물론이고 인간의 모든 심리적 고통이 이런 생리적 원리로 발생하고 반복된다. 상카라가 모여 일으키는 과장된 호르몬 반응은 생물학적 생존에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이다. 극도로 에너지를 절약해야 하는 두뇌 및 신체 시스템에 결국 부담을 준다. 고통은 물론 쾌감을 일으키는 상카라 역시 다 피로감과 스트레스로 이어진다. 젊은 왕자 시절 탐닉했던 쾌락 역시 괴로움이었음을 붓다는 회고한 바 있다.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삶의 심리적 괴로움을 피해가지 못한다. 진화 생물학 관점에서 보면, 진화론적 부작용이고 컴퓨터에 비유하면 시스템 내부 오류인 글리치(glitch)이다. 괴로움을 근원적으로 해소하려면 우리 뇌의 알고리즘 ‘기본 설정(default)’을 고쳐 잡아야 한다. 고의 뿌리를 직접 제거해본 붓다는 고를 그 근원에서 해소할 방법이 있다고 자신 있게 천명했다.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로 붓다의 그 가르침이 방편 문자로 전해져 온다. 하지만 문자만 보고는 이해하기도 어렵고, 고가 사라지지도 않는다. 흔히 이렇게 말한다; 괴로움의 뿌리인 무지, 집착, 욕망, 분별을 없애야 한다고. 중생은 괴로움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에서 온다고 착각한다; 머릿속에서 만들어짐을 모른다; 무지하다. 집착이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생각과 호르몬 작용의 악순환이다. 욕망은 동물적 호르몬 충동이다. 분별은 호르몬 자극을 일으키는 생각이다. 하지만 ‘집착을 내려놓아라,’ ‘욕망을 버려라,’ ‘무지에서 벗어나라,’ ‘분별하지 말라’고 하는 식의 설교는 불법의 관점에서 보면 아예 말도 되지 않는다. 듣는 이에게 도움을 주지도 못한다. 내 의지로 욕망을 내려놓고 내 선택으로 분별하지 않고 내 의도대로 집착하지 않을 수 있다면 고통받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자유의지의 ‘나’라는 주체가 있다고 믿는 유일신 종교에서나 그런 교훈 설법이 통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나’를 몸과 마음의 주체로 보고 그렇게 말하고 생활하지만, 불법과 현대 뇌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나’ 역시 생각 작용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생각이고 괴로움의 원인일 뿐이다. 마음(두뇌) 작용도 무아의 자연현상이다. 마음 작용의 주체가 자의식의 ‘나’라는 착각도 ‘나’라는 생각이 사라지는 선정 체험이 거듭되어야 사라진다. 선정의 경험 없이 제법무아(諸法無我, anatta)의 실상을 볼 수 없다.
붓다의 가르침을 머리로만 이해하려고 하면 불교라는 이름의 가사만 걸친 여러 망상에 빠진다. 몸으로 실천하는 수행으로만 불법을 볼 수 있다. ‘명상’을 좁은 의미로 해석해 좌선으로만 오해하면 안 된다. 불교 명상은 현실과 내 마음 작용을 늘 함께 살펴보는 자성(自省)이다. 드러난 고의 해소가 열반이 아니다. 고가 발생하는 원인의 제거가 열반이다. 수행으로 뇌의 알고리즘((algorithm)을 고쳐 잡는 게 열반이다. 태어날 때 이미 유전적으로 설정되어 일어나는 현상은 다 알고리즘 ‘아웃풋(output)’이다. 알고리즘을 붓다는 당대 베다 용어를 빌려 ‘업(業, 카르마)’이라고도 표현했다. 알고리즘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붓다 시대에도 성행했던 운명론
이 된다. 열반도 성불도 다 불가능하다. 불교는 아예 존립할 필요조차 없다. 다행히 우리 뇌는 학습과 훈련에 의해 유전 인자로 결정된 알고리즘도 바꿀 수 있다.
불교는 이미 2,500년 전에 체험으로 알고 있었지만, 현대 과학은 80년대에 들어서야 이 사실을 실증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뇌 신경계가 명상 수행과 같은 훈련에 의해 스스로 알고리즘을 바꾸는 것을 뇌과학에서는 ‘신경 가소성(neuro-plasticity)’이라 부른다. 뇌신경(neuron)도 플라스틱(plastic)처럼 자유롭게 변형할 수 있다는 뜻이다.
‘모든 상카라는 무상이고 고이다’라는 붓다의 가르침은 우리 뇌의 알고리즘을 들여다본 최고 경지의 명상에서 나온 위대한 통찰이다. 우리가 보고 경험하는 이현상 세계는 우리 밖에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다. 뇌가 재구성하고 동시에 스스로체험하는 일종의 3차원 시뮬레이션(simulation)이다. 세상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게 아니다. 뇌가 감각 기관으로부터 들어오는 전기 신호를 선택 분류해서 생존과 번식이라는 진화론적 목표에 맞게 다시 ‘해석’한 것이다. 명상이 알고리즘 코드를읽는 것이라면 현실 세계는 모니터에 드러난 입체 영상이다. 내 몸이 그 가상현실의 일부이기에 미망과 망상에서 깨어나기 힘들 뿐이다. 명상 세계와 현실은 둘이아니다. 명상에서 본 게 무상이라면 반드시 현실에서도 무상이다. 현실에서 고라면 그 원인은 코드를 읽는 명상에서 밝혀진다. 명상과 현실이라는 두 수레바퀴를 동시에 조화롭게 굴리라고 붓다가 가르친 이유이다.
현대 진화 생물학의 관점에서 보면, 붓다의 등장은 인간이 감내해야 하는 괴로움이 진화의 변수로 작용할 만큼 과다해졌음을 시사한다. 불법(佛法)은 고통받는 생명이 자력구제에 나서는 또 다른 차원의 진화이다. 제행무상이다.

남시중 성균관 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Northwestern University Medill School of Journalism에서 석사 학위를, University of California Hastings College of the Law에서 법학 박사(Juris Doctor) 학위를 받았다. 현재 캘리포니아 실리콘 밸리 현지에서 변호사 및 투자자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 『개를 위한 변명 – 보신탕과 동물 권리론에 관한 철학적 성찰』, 『벤처@실리콘 밸리』, 『Why Meditat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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