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절에 가면 불교를 만날 수 있다 | 궁궐터보다 더 명당인 문수보살의 상주처, 봉화 청량사

궁궐터보다 더 명당인 문수보살의 상주처, 봉화 청량사

권중서
문화학자·정견불교미술연구소장

 

청량산(淸涼山) 열두 봉을 붉게 물들이는 단풍은 사바가 곧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임을 알려주려는 듯 화려하다. 청정 법신의 모습은 중생이 보고 느끼며 감동을 받는 바로 그 자체인데 중생은 먼 곳에, 더 높은 곳에 법신이 따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무명이고 번뇌다. 이런 번뇌를 떨쳐버리기 좋은 곳이 ‘궁궐터보다 더 명당은 산속의 절터’라는 그 말이 실감나는 청량산 청량사다.
고려 문신 박효수(?~1377)는 청량사에 대해 말하길 “이 절에 오르면 황홀하여 공중에 있는 것 같으니, 열두 봉우리들이 서로 등지기도 하고 마주 보기도 하네. 먼 마을의 단풍 든 나무에는 저녁볕이 머무르고”라고 했다. 단풍 든 청량사는 피안(彼岸)의 세계라 여겼던 것 같다. 청량산은 원래 중국 산시성(山西省)에 있는 오대산(五臺山)을 말하는데, 이 산은 자장 율사가 문수보살로부터 부처님의 정골 사리를 받아온 곳으로 혹서기(酷暑期)에도 더위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청량산이라는 별칭이 생겼다고 한다. 『화엄경』 「보살주처품(菩薩住處品)」에 심왕보살이 여러 보살에게 말하길 “동북방에 보살들이 사는 곳이 있는데, 이름은 청량산으로서 과거에 모든 보살들이 거기 살았고, 현재에는 문수사리라는 보살이 살면서 1만 보살을 권속으로 두고 항상 그들을 위해 설법하고 있습니다” 했다.

청량사 유리보전. ‘琉璃寶殿(유리보전)’ 편액 글씨는 공민왕의 친필로 전해온다.

문수보살이 청량산에 머무는 이유는 무엇일까? 『신화엄경론』에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선근(善根)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며, 보살이 세간에 항상 머무는 것을 밝힌 것이며, 방위를 따라 법을 나타내서 쉽게 보이도록 밝힌 것이다. 방위는 염부제 한 경계의 동북방이니, 청량산이 이에 해당된다”고 했다. 우리 조상들은 염부제 동북방에 자리한 바로 이곳 청량산이 문수보살의 상주처로 믿어왔다.
청량산의 청량의 의미를 『불설대방광만수실리경(佛說大方廣曼殊室利經)』에서는 “여래의 자재한 위신력은 마치 세간의 청량한 달빛 같은 청량한 빛으로 중생을 두루 비추자 들끓던 중생들의 번뇌가 모두 없어지고, 깊고 어두운 곳까지 비추지 않은 곳이 없이 비추었다”고 했다.
이처럼 불교적인 산을 유학자 주세붕이 1544년 청량산을 유람하고 열두 봉우리 이름을 거의 유가(儒家) 스타일로 바꿔놓았다. 하지만 청량산 곳곳에 자리한 사찰과 암자의 이름까지 바꿀 순 없었다. 숭유억불의 고난과 핍박을 견디며 불교를 이어온 스님들이 너무 고맙다. 퇴계 이황의 제자 송암 권호문(權好文, 1532~1587)은 청량사 원효암 스님에 대해 이렇게 공경심을 드러냈다.

벼랑 끝에 매달린 원효암에서 (着屋懸崖畔)
몇 해나 참선하며 머물렀던가 (禪居第幾秋)
흰 구름 이내 먹구름 되더니만 (白雲看走狗)
붉은 절벽엔 폭포 소리 들려오네 (丹壁聽飛流)
시 지으니 품은 생각 열리고 (覓句胸襟豁)
불경 보니 앉은 자리 그윽하네 (探經几案幽)
우리 스님 불도의 기운 넘치니 (吾師多道氣)
세상 밖에 있는 참 휴식처라네 (方外是眞休)

청량사 금당에는 공민왕이 친필로 썼다고 전해오는 ‘琉璃寶殿(유리보전)’ 편액이 걸려 있다. 유리보전은 동방정유리세계(東方淨琉璃世界)를 말하는데 유리와 같은 칠보로 이룩된 약사불이 계신 정토를 말한다. 중앙에 약사불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偏袒右肩)에 오른손은 항마촉지인, 왼손은 약합을 든 모습이다. 눈은 중생을 굽어 살피시느라 내려다보고 계신다. ‘유리보전’이란 편액 때문에 약사불로 불리고 있지만 영락없는 석가모니불이다.
좌측에는 통견(通肩)에 결가부좌한 문수보살을 모셨는데 4단의 대좌가 무릎보다 작아 청량산 정상에 앉은 모습처럼 보여 이채롭다. 머리에는 낮은 원통형 보관을 쓰고 양쪽 세 갈래로 땋은 긴 머리카락은 어깨 밑 팔꿈치까지 내려왔다. 이마 백호가 도드라진 중년 부인의 후덕한 모습이다. 설법인은 문수보살의 지혜로 중생의 번뇌를 시원하게 없애주려는 듯하다.
우측에는 통견에 반가부좌한 지장보살을 모셨다. 왼손에 중생의 어둠을 밝히는 구슬을 들고 오른손엔 육환장을 들어 지옥 중생의 고통을 없애주기에 여념이 없다. 그래서인지 언제라도 지옥 중생이 부르면 곧 달려 나가려는 편한 자세라 특이한 모습이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불이 열반 후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중생제도를 부촉받으신 보살이다.

(왼쪽부터) 청량사 약사불, 문수보살, 지장보살


(왼쪽부터) 청량사 응진전 옥졸, 나한

다른 보살과는 달리 보관을 쓰지 않고 깎은 머리를 하고 있는데 이는 미륵불이 오실 때까지 중생 제도는 스님들이 하고 계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원래 옆에 서 있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과 함께 지장전에 모셨으나 지장전이 소실되어 이곳 유리보전에 약사불의 협시로 모시고 있다. 이 지장삼존은 임진왜란 이전인 1578년에 조성된 형상 불로 조형성이 우수하다.
옛날 외청량암(外淸凉庵)이었던 응진전은 원효 스님이 머물렀던 곳이고 고려 공민왕이 인근 안동으로 피난 왔을 때 왕비 노국 공주가 16 나한을 모시고 기도를 했던 곳이라 전한다. 산봉우리를 바라보기 좋은 장소로 청량산에서 가장 경관이 뛰어나다고 한다. 응진전 출입문 양쪽으로 선 문지기는 서양의 카우보이처럼 생겼다. 서양인도 깨달음을 이루고 싶었는지 이역만리 말을 타고 방금 도착한 듯 모습이 특이하다. 창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장화를 신거나 맨발로 서거나 한 모습으로 손에는 총 대신 칼과 육각 방망이를 잡고 눈알을 부라리지만 영락없는 카우보이 모습의 옥졸이다. 청량산의 아름다움에 홀랑 빠지셨나? 문지기의 역할보다 바깥 단풍 구경에 여념이 없는 듯하다.
그 옆에는 근엄하게 홀을 든 저승의 판관, 허리를 굽혀 명부를 전하는 저승사자가 관모를 쓰고 입시해 있다. 응진전에 옥졸, 저승사자와 판관이라? 고개가 갸우뚱하지만 청량사 응진전의 저승사자와 판관은 염라대왕에게 보고하기 전 미리 청량사 나한들에게 보고하나 보다. 이때 장난기 많으신 나한들은 평소 나한 기도 잘하는 불자들의 이름을 명부에서 슬쩍 빼주어 수명을 늘려주려는 듯하다. 양옆 단 위에는 구름 문양의 화려한 보관을 쓴 제석천과 홍조를 띤 범천이 가을 단풍의 아름다움을 얼굴에 담고 있는 듯하다. 또한 호랑이를 안고 있거나 용과 장난치거나 팔을 긁거나 하는 16 아라한의 격의 없는 모습에 보는 사람도 편안하다.
세상일에 빠져버리면 다시 오는 것을 쉽게 기약할 수 없는 곳이 산중의 사찰이다. 늦가을에 남은 단풍 구경도 좋으리라. 복숭아꽃은 물 따라 가버렸지만 온 산을 만산홍엽(滿山紅葉)으로 물들이는 무릉도원 별천지인 청량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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