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과 불교 3 | 불교 입장에서 본 인공지능의 활용

불교 입장에서 본 인공지능의 활용

이상헌
서강대학교 전인교육원 교수

 

문명의 과정에서 보면, 새로운 문물이 도입되고 그것이 우리의 생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때, 대중은 그것에 관심을 갖는다. 대중이 가장 관심을 갖는 신문물은 당연히 문명의 이기다. 자동차와 기차가 그랬고, 전화기와 컴퓨터, 스마트폰이 그랬다. 요즘 대중의 이해 관심을 집중시키는 문명의 이기는 인공지능이다.
인공지능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위에 열거한 문명의 이기들과 조금 다른 점이 있는데, 바로 자신들의 삶을 위협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글의 알파고 이벤트 이후 인공지능에 대한 사회경제적 관심이 급격하게 고조되었으며, 다보스 포럼에서 제시된 4차 산업혁명이라는 새로운 화두와 더불어 21세기 인류 문명을 지배할 기술로 부각되었다. 4차 산업혁명과 묶어서 생각할 때 인공지능의 첫인상은 두려움이다. 인공지능으로 인해 숙련된 노동과 지식 기반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머지않은 장래에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는 경고가 울렸다. 그러면 미래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지능과 경쟁하는 삶을 살아야 할까? 글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인공지능과 지능 로봇이 지금의 가전제품들만큼 우리의 생활에서 흔한 것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부터 이런 인공지능을 그 쓰임과 관련해서 불교적 시각에서 살펴보려 한다.

인공지능,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어야
인공지능은 우리 생활에 편리를 제공하고 생산성 향상 등의 유익을 가져다줄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일자리 문제의 야기, 인간 정체성과 존엄성의 위기 등여러 가지 해악을 동시에 수반할 것이라는 예측이 일반적이다. 레이 커즈와일(RayKurzweil) 같은 기술낙관주의자들은 2050년경을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추월하는 시점이 될 것으로 예언하며, 인간과 거의 식별 불가능할 정도의 인공지능의 출현을 장담한다. 한편 영국의 철학자 닉 보스트롬(Nick Bostrom)은 초지능에 대한 통제 문제 해결의 긴급성과 ‘존재적 위험’을 지적했다. 이런 이야기들 속에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
인류의 대표적인 종교적 전통 가운데 불교만큼 과학기술에 호의적인 종교는 없다. 이것은 아마도 인간과 세상을 보는 시각이 불교가 독특하기 때문일 듯하다.
예컨대 인간과 식별 불가능한 안드로이드를 개발하는 것에 대해 여러 종교가 반대할 듯한데, 불교는 안드로이드가 인간을 닮았는지, 인간과 구별 불가능한지에 크게 관심이 없을 것 같다. 문제는 그런 안드로이드가 우리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행복해지는 데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이다.
사성제(四聖諦)는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로서 인생의 문제와 그 해결 방법에 대한 지혜를 담고 있다. 인간은 욕망의 존재이며,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다. 인간은 욕망이 있어 살아가지만 다른 한편으로 한없는 욕망 때문에 고통받는다. 갈애를 극복하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리가 찾아야 할 유일하고 참된 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인공지능이나 기술 자체가 문제가 아니고 그것이 어디에 쓰이는지가 문제이다. 인공지능은 단지 수단일 뿐이며, 그것의 선용과 악용은 그 목적에 달려 있다. 그래서 위에서 한 질문을 이렇게 다시 할 수 있다. 인공지능 연구자들은 왜 그것을 연구하는가?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연구자들은 어디에 쓰이길 바라고 인공지능을 연구하는가?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먼저 인공지능 연구자들에게 있어서 스스로에게 던지는 이런 물음이 연구에 선행되어야 할 듯하다. 초기 인공지능 연구의 목표는 존
설(John Searle)의 구분에 따르면, 약한 인공지능이었다. 최근 일부 기술낙관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인간을 완벽하게 모방한, 더 나아가서 인간을 능가하는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것이 연구의 목표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생겼다. ‘로봇’이라는 용어를 고안한 것으로 유명한 카렐 차페크의 희곡 <로섬의 유니버설 로봇>의 스토리 속의 파국은 인간을 대신해 노동을 전담하는 로봇을 개발한 과학자의 지적 호기심에서 비롯되었다. 연구와 그 결과를 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연구 자체를 목적으로 착각한 과학자의 분별없는 행동이 로봇과 인류의 전쟁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불러왔다. 이런 맥락에서 강한 인공지능을 추구하는 인공지능 연구에 대해 경고한더글러스 호프스태터(Douglas Hofstadter)의 지적은 탁견이다.

욕망에 봉사하는 AI와 고통을 덜어주는 AI
현재 인공지능의 활용으로 가장 걱정스러운 것이 전투 로봇이다. 로봇을 군사용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전투 로봇을 사용하는 쪽에서 보면, 전장에서 희생되는 병사가 줄어들게 되니 좋을 것이고, 행복에 보탬이 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전투 로봇은 인간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기보다 남보다 막강한 힘을 가져서 다른 사람을 굴복시키고 지배하기 위한 수단이다. 전투 로봇은 인간 병사보다 월등한 능력으로 적군을 살상할 수 있다. 지금 사용되는 전투 로봇은 사람이 원격지에서 조종하는 무인 로봇이다. 대표적으로 일명 드론으로 불리는 무인 폭격기는 지구 반대편의 조작실에서 화면을 보면서 조종하는 조작자의 명령에 따라 목표물을 타격한다. 이런 무기는 방어가 아니라 공격적인 방식으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게 한다.

이제 불교는 인공지능 연구자들에게 자신들이 왜 그것을 연구하고 있는지 생각해볼 것을 요구하고, 인공지능을 악용할 소지를 사전에 차단하고 선용할 용처를 찾는 일에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보고에 의하면, 폭격기가 보내오는 영상을 화면으로 보고 미사일 발사 단추를 누르는 조작자는 인간을 살상한다는 느낌을 별로 받지 않는다고 한다. 인간을 살상하는 지능 로봇은 갈애의 충족에 봉사하고 타인의 고통을 증가시키는 기술의 악용 사례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선용된다면, 우리는 보살의 마음을 인공지능의 행동에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사회적 로봇들(social robots)은 가족처럼 우리 곁을 지키며 우리의 기분과 건강, 안락함, 즐거움, 정신을 돌볼 것이다. 1인 가구와 2인 가구가 지배적인 가족 형태가 된 오늘날 사회적 로봇은 우리 삶의 동반자 역할을 할 것이다. 사회적 로봇은 현재 동물이 담당하는 역할을 일부 나누거나, 아예 대체할 것이다.
미래의 병원을 상상해보자. 진료실에서는 IBM 왓슨과 유사한 인공지능 의사가 선입견이나 감정 변화, 육체적 피로감 없이 정확하게 환자의 상태를 진단한다. 왓슨이 발견하지 못하는 질환은 치료법조차 없는 것뿐이다. 전문의에게 진료를 받기 위해 몇 달 전에 예약하고 진료 당일에도 한두 시간씩 기다리는 일이 없다. 왓슨은 동시에 여러 명의 의사를 진료할 수도 있다. 혹시 질병이 발견되어 병실에 입원하게 된다면 간호 로봇들이 최상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 보살은 남을 위하는 것 자체가 나를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를 구체하기에 앞서 남을 구제하는 수행을 실천한다. 인공지능이 보살일 수는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인공지능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보살행과 다를 바 없는 경우를 상상할 수있지 않을까? 선용되는 인공지능은 중생의 고통을 덜어준다는 불교의 목표에 부합할 듯하다.

보살의 얼굴을 한 인공지능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기술을 통해 인간을 육체적·정신적으로 향상시키고, 그렇게 하여 인간을 고통과 번뇌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다고 여긴다. 인간 향상에는 다양한 기술적 방법들이 동원될 수 있는데, 그 가운데는 인간 지능과 인공지능을 결합하는 방식도 있다. 이른바 인간의 사이보그화다. 이런 식으로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기술낙관주의자들이 특이점을 언급하며 미래를 기술 유토피아로 그려낼 때, 보스트롬은 초지능(superintelligence)의 위험을 경고한다. 이론적으로 초지능은 인공지능이 인간 지능의 거의 모든 능력을 두루 갖춘 단계인 인공 일반 지능이 출현한 이후에 지능 폭발을 통해 등장한다고 한다. 따라서 초지능은, 보스트롬에 따르면, “과학적 창의성, 일반적 지혜, 사회적 기능 등 실제적인 모든 영역에서 최고의 인간 두뇌를 크게 능가”할 것이어서 “초지능이 풀 수 없거나, 최소한 인간이 푸는 것을 도울 수 없는 문제란 없다”고 할 수준이다. 보스트롬은 초지능의 압도적인 능력 때문에 인간이 그것에 대한 제어력을 유지할 수 없을 것으로 본다. 그래서 초지능이 내린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의사 결정이 인간에게는 치명적인 것이 될 때, 인류는 존재의 위험(existential risk)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scientia est potentia)’라고 외친 베이컨의 정신을 계승한 현대 산업 사회는 지식과 기술의 힘으로 물질적 풍요를 이루었다. 그런데 이런 풍요가 인류의 고통을 덜어주고 우리를 번뇌로부터 해방시켰는가? 현대 산업 사회에서 지식과 기술은 힘으로 인식된다. 경쟁력이고 지배력이며 효율성과 생산량을 증대시키는 원천이다. 풍부한 물자와 넘쳐나는 문명의 이기는 우리를 탐욕스럽고 욕망에 충실한 존재로 붙잡아두는 역할을 했다. 오늘날 우리는 기술을 소비하고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급급해 기술은 목적이 아니라 단지 수단일 뿐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기술과 관련해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우리 자신도 되돌아볼 줄 모른다.
우리는 지식과 기술이라는 힘을 가진 것이 아니라, 시장의 논리를 통해 지식과 기술의 노예로 전락한 듯하다. 이런 상황은 지식과 기술을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는 지혜로 이해하지 못한 데 기인한다.
불교경제학을 창시한 에른스트 슈마허는 기술의 본성에 대한 반성을 통해 ‘인간의 얼굴을 한 기술’을 주창했다. 불교적 관점에서 인공지능에 대해서도 그것이 선용될 수 있는 사용법과 사용처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실 불교는 인공지능 연구가 인간 지능을 거의 모방하는 데 이를 수 있을지, 특이점이 도래할 것인지, 초지능이 출현할 것인지에 관해 별 관심이 없다. 불교의 관심은 그것이 중생의 고통을 덜어줄 좋은 방편인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제 불교는 인공지능 연구자들에게 자신들이 왜 그것을 연구하고 있는지 생각해볼 것을 요구하고, 인공지능을 악용할 소지를 사전에 차단하고 선용할 용처를 찾는 일에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가능하다면, 보살의 얼굴을 한 인공지능을 기대하면서 .

이상헌 서강대학교 철학과 및 동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국대와 가톨릭대 강의 전담 교수, 세종대 교양학부 교수, 한국철학회 사무총장을 지냈다. 현재 서강대 전인교육원 교수로 있으면서 생명문화연구소 상임연구원을 맡고있다. 주요 저서로는 『융합시대의 기술윤리』, 『철학, 과학기술에 말을 걸다』 등이 있고, 「자연에서 배우는 청색기술」, 「인간 뇌의 신경과학적 향상은 윤리적으로 잘못인가」, 「칸트 도덕철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포스트휴먼」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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