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과 불교 4 | 인간과 동일한 감정과 욕망을 갖는 인공지능은 가능한가?

인간과 동일한 감정과 욕망을 갖는 인공지능은 가능한가?

박찬국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강한 인공지능과 약한 인공지능
인공지능 연구자들 상당수는 인공지능의 작동 방식이 인간 정신의 작동 방식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본다. 따라서 이들은 인간처럼 감정과 욕망은 물론이고 심지어 자기의식과 윤리의식마저 갖는 이른바 강한 인공지능이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이들은 인간이 이러한 강한 인공지능을 만들 수 없을 경우에도 인공지능이 자체적인 진화를 통해서 그러한 존재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인공지능 연구자들 중에는 특정한 능력만을 갖는 이른바 약한 인공지능만이 가능하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에 따르면 인공지능은 알파고처럼 바둑을 두는 능력이나 왓슨처럼 의학적인 판단을 내리는 능력과 같은 특정한 능력에서만 인간보다 앞설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은 인공지능이 인간과 동일한 감정과 욕망 그리고 자기의식이나 윤리의식을 지닐 수 있는 가능성을 단호하게 부정한다.
강한 인공지능이 가능하다고 보는 사람들은 인간 정신마저도 물질로 보는 유물론적 관점을 취한다. 이들은 인간의 생각, 감정, 욕망, 심지어 자기의식과 윤리의식도 단지 뇌라는 물질에서 일어나는 전기화학적인 작용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들은 이러한 사실을 뇌의 부위를 자극하거나 제거할 때 사람의 감각과 성격, 욕망이 크게 변화된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며 물질에 불과한 인공지능도 더욱 복잡해지고 정교해지면 감정과 욕망을 갖게 될 뿐 아니라 심지어는 도덕적 판단을 내리면서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 존재’라고 보았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내가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뇌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은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자신의 삶을 형성하는 존재다. 인간은 동물처럼 자연이 부여해준 본능에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는 삶을 구현하려고 한다. 인간의 삶은 단순히 자기 자신을 유지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좋은 삶’에 대한 자신의 근본 신념을 구현하려는 욕망에 의해서 근본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부자가 되는 것을 ‘좋은 삶’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부자가 되는 데 자신의 모든 열정을 다 쏟는다. 예수나 부처처럼 되는 것을 ‘좋은 삶’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나 부처처럼 되는 데 자신의 모든 열정을 다 쏟는다. 따라서 사람들의 구체적인 생각과 행동은 좋은 삶에 대한 근본 신념에 의해서 규정된다. 인간은 홀로 고립된 채로 살 수 없기 때문에 ‘좋은 삶’에 대한 자신의 근본 신념을 다른 사람들과 사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실현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과 사물이 자신의 근본 신념을 실현하려는 우리의 노력에 부응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이 우리의 노력에 부응할 때 우리는 기분이 좋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기분이 나빠진다. 인간의 감정은 이렇게 ‘좋은 삶’에 대한 어떤 근본 신념을 실현하려고 하는 의지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인간은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자신의 삶을 형성하는 존재다. 만약 인공지능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실존적 성격을 갖게 되면서 자신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뇌하게 된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것을 인간과 동일한 존재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뇌하면서 좋은 삶에 대한 근본 신념을 실현하려고 하는 인간 특유의 존재 방식을 실존이라고 불렀다. 이 점에서 우리는 인간을 실존적 존재라고 부를 수 있다. 인간이 갖는 특수한 존재 성격을 염두에 두고 이제 인공지능과 인간을 비교해보자.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에 대한 논의를 사람들은 흔히 인간과 인공지능의 우월성을 비교하는 식으로 개진하곤 했다. 혹자들은 인간이 인공지능보다 더 창조적이라는 점에서 인간이 인공지능보다 더 우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유사 이래로 창조적인 사람이 몇 명이나 되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이미 여러 전문 분야에서 인공지능은 대부분의 인간보다 더 창조적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예를 들어 음악의 작곡에서도 인공지능은 대부부의 인간보다 더 창의적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바둑에서도 이미 알파고와 같은 인공지능이 가장 창의적인 기사(棋師)보다도 더 창의적일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특정한 일의 수행 능력뿐 아니라 창의성 면에서도 인공지능이 이미 앞선다는 사실이 입증되자 사람들은 이제 인공지능이 감정이나 욕망 그리고 윤리의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들어 인공지능에 대해서 인간이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했다. 이러한 시도에 대해서는 인공지능도 감정뿐 아니라 욕망 심지어 윤리의식까지도 가질 수 있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논의에서는 흡사 감정이나 욕망 그리고 윤리의식을 갖는 것이 장점이며 인공지능도 그러한 것을 가질 수 있다면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그런데 과연 인간이 감정이나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장점인가? 인간은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욕망이나 감정으로 인해 얼마나 괴로워하는가? 충족되지 못하는 욕망에 시달리고 갖가지 불쾌한 감정에 시달리는 우리는 경우에 따라서는 아무런 욕망과 감정도 갖지 않는 하늘이나 돌을 부러워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욕망이란 기본적으로 결핍감이라는 감정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욕망은 굳이 쇼펜하우어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밑 빠진 독과 같으며, 그것은 아무리 채워도 만족할 줄 모르고 항상 결핍감에 시달린다. 그런데 왜 굳이 인공지능에 욕망과 감정을 투입해 힘든 삶을 살게 하려고 하는가? 인공지능에게 인간에게서 보이는 것과 동일한 욕망을 심는다는 것은 인공지능에게 결핍감을 느끼는 상태를 투여하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좋은 것인가?
윤리의식이라는 것도 인간이 원래부터 윤리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인간의 생각이나 행동이 원래부터 항상 윤리적이었다면 윤리의식도 없었을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윤리의식은 우리가 윤리를 항상 어길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결국 인공지능이 윤리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과 윤리규범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인공지능에게까지 욕망과 윤리의식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고통을 부여하려고 하는가?
인간과 인공지능의 궁극적 차이는 이미 언급한 것처럼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 실존적 존재인 반면에, 인공지능은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이 갖는 모든 욕망과 감정, 자기의식과 윤리의식, 심지어 신체조차도 이러한 실존적 성격에 의해서 규정되어 있다.
만약 인공지능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실존적 성격을 갖게 되면서 자신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뇌하게 된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것을 인간과 동일한 존재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인공지능을 만들 수 있는지 의문스럽지만, 그 이전에 과연 그런 인공지능을 만들 필요가 있을지가 의문이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인간이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서 고뇌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 무언가 불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의 삶에 대해서 불만을 품는다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닐 것이다.
더 나아가 인간은 ‘좋은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자주 오류를 범한다. 인간은 특정한 종교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광신적으로 사로잡히는 삶을 ‘좋은 삶’으로 착각하기도 하고, ‘많은 물질적 부를 소유하는 삶’을 ‘좋은 삶’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착각으로 인해 서로 적대하고 서로 착취하면서 심지어는 서로 살육하기까지 한다. 오죽하면 니체가 인간을 ‘병든 동물’이라고 불렀겠는가?

기계와 유기체 그리고 인간
마음의 활동이 그것의 물질적인 기반인 뇌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마음의 활동이 뇌에서 일어나는 전기화학 작용에 불과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의가 제기될 수 있다. 이는 물리화학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 어떻게 해서 슬픔과 기쁨으로 표현될 수 있는지는 아직은 과학에 의해서 도저히 해명될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이 가져다주는 지식을 우리는 실로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자연과학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정보는 현실의 일면일 뿐이다. 하나의 식물에 대해서 자연과학이 제공하는 모든 정보를 다 합해도 우리는 그 식물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낼 수는 없다. 하나의 통일체로서의 유기체는 물리적인 부분들의 조합이 아니다. 이에 반해 인공지능을 포함해 인간이 만들어내는 모든 기계는 해체한 후 다시 조립할 수 있는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인간은 물론이고 풀과 같은 식물조차도 여러 부분으로 분해해버리면 죽고 말며 복원이 불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칸트는 물리학의 천재인 뉴턴과 같은 사람이 수백수천 명이 나와도 들풀 하나도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들풀 하나도 만들 수 없는데 인간과 동일한 인공지능을 만든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할 것이다. 인간은 하나의 유기체일 뿐 아니라 자신이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 고뇌하는 실존적 존재다. 이에 반해 인공지능은 아무리 정교하더라도 하나의 기계다.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근본적 차이를 그동안 무시한 결과, 인간을 기준으로 하여 인공지능의 성격을 파악하려는 많은 논의가 나타났다.
그러나 인간의 다리를 보완했던 자동차나 포클레인처럼 흙을 퍼 나르는 인간의 손을 보완하는 여러 기계들은 인간의 손이 움직이는 방식을 모방함으로써 개발된 것이 아니다.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만드는 데 성공한 것도 새의 날갯짓을 모방하는 그동안의 연구를 포기하고 공기의 흐름과 기압 등에 대한 공학적인 연구를 수행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에 입각해 인공지능 연구자들 중에는 인공지능의 작동 방식과 인간 정신의 작동 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인간의 지능을 유일한 지능으로 보지 않으며, 인공지능은 인간의 지능과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특정한 능력에 있어서 오히려 인간을 훨씬 능가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이들은 인공지능의 연구는 인간의 지능이라는 자연 지능을 모방하기보다는 정보 처리라는 지능 행위에 대한 공학적인 연구를 통해서 훨씬 더 생산적으로 행해질 수 있다고 본다.

박찬국 서울대학교 철학과 졸업 및 동 대학원 철학 석사, 독일 뷔르츠부르크대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호서대 철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 철학과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 『니체와 불교』, 『원효와 하이데거의 비교 연구』,『인간과 행복에 대한 철학적 성찰 : 실존철학의 재조명을 통하여』 등이 있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fifteen + twent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