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과 불교 5 | 색도 없고, 수·상·행·식도 없다

불교에서 본 인공지능(AI)

색도 없고, 수·상·행·식도 없다

앤드루 크베르코
약물중독 치료사, 명상 지도자

 

날이 갈수록 우리는 온전한 의식을 갖춘 새로운 인공지능을 창조해내는 데 한걸음 더 다가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전 글에서도 필자가 밝혔듯이 이는 많은 종교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특히 이 우주 안에서 인간이라는 존재와 인간 의식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 종교라면 문제의 양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이런 문제에서 불교는 예외적인 종교로 부각된다. 불교의 종교사상 체계는 인간이라는 종(種)이 만들어내는 모든 인공지능을 수용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대체로 종차별주의가 없는 불교의 자세에 기인한다. 불교는 그 시원부터 모든 생명을 동일하게 돌봄을 받을 자격이 있는 생명으로 존중했다. 전해 내려오는 가르침에 보면 붓다는 동물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행복을 추구하고 해침에서 보호받기를 바란다는 것을 누누이 설했고, 이런 믿음에 근거해 붓다가 당시 풍습이었던 동물 희생제를 반대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물론 이런 가르침이 불자들의 채식으로까지 연장되지는 않았음을 인정해야 하겠지만, 그래도 불교의 역사를 보면 많은 스승들이 고기를 먹지 않는 채식이나, 우유, 달걀까지도 먹지 않는 엄격한 채식을 윤리적 식생활의 방식으로 독려해왔다.
이런 윤리를 기반으로 해서 후기 불교 사상가들에 이르면 이것이 더욱 확장된다. 불도 수행의 궁극적 목적인 깨달음은 초기 불교에서는 인간에게만 가능한 것으로 열려 있었다. 그러나 철학의 발전과 함께 불교 사상가들은 모든 생명체가 동일하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후기 문헌은 동물이 인간과 동일하게 깨달을 수 있음을 설하고, 최근 많은 불교 사상가들은 여기에 식물과 미생물까지도 포함하기 시작했다. 불교는 실제로 ‘인간성 또는 인격’이라는 것을 인간을 넘어서 발견한 최초의 철학일 것이다. 불교는 모든 형태의 생명에서 의식과 창발(創發)1)하는 지능의 가능성을 인정한다.
불교가 비록 모든 유기 생명체를 높이 평가하긴 하지만 무엇 때문에 인공지능도 동일한 방식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간단히 답한다면 마음과 의식에 관한 불교의 시각으로 볼 때 모든 지능은 다 인공적이다.
우리가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고 있는 ‘자아’에 대해 그 존재를 불교가 부정하고 있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런 관점은 붓다 당시 시대의 대부분 인도인의 믿음과 반대되는 것이었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관점과 매우 다르다. 불교는 생명체가 다섯 가지 ‘무더기’로 구성되어 있다고 설한다: 바로 우리의 육체적 형태[색], 우리의 느낌[수], 지각[상], 정신적 형성물[행]과 의식[식]이다. 어떤 면에서 이 관점은 생명이 기본적 화학 물질의 구성물이라고 보는 현대적 물질주의적 생명관의 전신이라고 불 수 있다.

1) 창발(emergence): 카오스 이론에 자주 등장하는 말로 그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어느 순간에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즉 상위 수준의 특성 중에서 그것을 이루는 하위 수준의 특성들 속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환원 불가능한 특성이 나타나는 현상.

지각이 창발되는 것으로 보는 불교적 관점과 모든 생명이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는 불교의 수용성을 검토할 때 대부분의 불자와 불교 사회는 분명 인공지능을 온전히 수용할 것으로 보인다.\

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무더기 중 어떤 것도 우리의 지배하에 있지 않으며, 그무엇도 ‘나’ 또는 ‘우리’라고 할 수가 없다. 다섯 무더기[오온]가 합쳐져서 생명을 만들지만, 각각 분리한다면 단지 일시적 에너지의 결합체에 불과해 결국에는 스스로 소멸되고 만다. 불교 경전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경전 중 하나인 『반야심경』은 이 오온을 ‘공성(空性)’의 렌즈를 통해 묘사해, 궁극적으로 이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시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컴퓨터를 프로그램할 수 있듯이 인공지능은 개정이 쉬운 까닭에 의식으로 간주하기 어렵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불교철학은 다시 한번 인공지능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이는 관점을 취한다. 불교의 눈으로 볼 때 인간은 모두 ‘프로그램 가능’하며, 이의 가장 분명한 사례로는 명상이 있다. 명상 및 심신 수행 과정 중 불자들은 자신의 존재를 새로운 의식의 차원으로 바꿀 수 있다고 느낀다.
이 체계가 기반으로 삼고 있는 개념은 우리 뇌를 고쳐 쓸 수 있다는 것이다(이는 깨달음이 일어날 때 개인의 관점과 의식이 바뀌는 것을 묘사하는 한 방식이기도 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향정신성 의약품, 뇌엽 절리술, 충격적 뇌 손상 심리 치료 등이 가져오는 효과를 보면 우리 뇌가 외적 자극으로 프로그램될 수 없는 불변의 물체가 아님이 분명해진다.
불교의 시각에서 볼 때 모든 생명은 창발하는 개체로서 그 부품들의 합보다 더 큰 능력으로 기능하고 있다. 한 형태의 지능을 다른 형태의 지능에서 분리하는 특별한 검증자는 없다(의식 역시 ‘우리가 아닌’ 것들의 목록에 있음을 주목하라). 이는 한 지능이 로봇의 몸에 있든 컴퓨터에 있든 또는 인터넷 세상에 있든 그것은 한 마리 다람쥐나 한 인간, 또는 하나의 박테리아처럼 ‘살아 있는’ 것으로 간주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더하여 불교는 육체가 없는 생명의 존재도 받아들인다. 불교 신화에서 신체가 없는 세계에 거하는 존재들은 신체가 있는 존재들과 동일하게 기술되고 취급된다. 물론 이 윤리는 신화적 존재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무색계’에 있는 실제 존재들을 우리가 보기 시작한다면 대부분의 불자들은 이들을 살아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불교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컴퓨터 지능을 새로운 형태의 생명이지만 오온을 가지고 있고 창발적 행동과 깨달음이 가능한 생명으로 볼 것이다. 달라이 라마, 틱낫한 및 다수의 유명한 불교 사상가들이 이미 인공지능을 생명으로 보는 것을 지지했다. 물론 예외도 있다.
한 스님은 답하기가 프로그램된 지능은 본질적 한계가 있으므로 생명의 형태로 볼 수 없다고 했고, 또 인공지능은 지각을 가진 유정(有情)처럼 보이지만 실제 지각을 가진 것은 아니라고 느끼는 사람도 다수였다. 하지만 지각이 창발되는 것으로 보는 불교적 관점과 모든 생명이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는 불교의 수용성을 검토할 때 대부분의 불자와 불교 사회는 분명 인공지능을 온전히 수용할 것으로보인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공지능이 인류 사회의 지평선에 떠오른 가능성일 뿐 아니라 확실한 문제라는 결론은 기정사실이다. 수백 년 또는 수천 년 전에 살았던 불자의 관점에서 인공지능을 볼 때 새로운 형태의 지능이 오랫동안 예측되어온 것이 분명하고, 실은 불교철학은 어떤 형태의 새로운 지능도 능숙하게 반길 준비가되어 있음이 확실하다.
달라이 라마는 “불교와 과학이 불일치한다면 불교가 변화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이는 지금뿐 아니라 차후 수백 년이 지난 미래가 우리에게 가져올 어떤 것에도 적응할 수 있는 철학의 조건을 수립해놓은 것이다.

발췌・번역|로터스불교영어연구원

● 이 글은 2014년 1월 신기술윤리연구소의 건강 문제 관련 섹션에 실린 글을 발췌, 번역한 것이다. 본 연구소는 21세기에
인류에게 큰 영향을 미칠 신기술을 선별해 그 기술이 인류와 문명에 끼칠 윤리적 문제, 그 기술이 가져올 가속된 변화,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오기 위한 정책 등을 연구 토론하기 위해 결성된 단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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