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재가열전|내가 만난 붓다_‘덕(德)을 산(山)같이 베푼 회향의 전범

덕산 이한상 거사
‘덕(德)을 산(山)같이 베푼 회향의 전범

이덕주
문학평론가, 시인

 

불교계 발전의 초석이 된 불자의 삶
대한민국 불교 교단이 형성되는 과정에 덕산(德山) 이한상(李漢相, 1917~1984) 거사는 불교계 발전의 한 축을 이룬 재야 거사다. 덕산 거사가 불교계에 영향을 끼친 기간은 대략 1963년부터 1972년까지 10년 정도로 길지 않다. 하지만 거사가 불교계의 실질적인 발전을 위해 남긴 공적은 참으로 지대하다 아니할 수 없다.
덕산 거사가 불교계에 끼친 중요한 공적 중 특히 앞세울 업적은 1964년 당시 폐간 위기까지 내몰렸던 월간지인 『대한불교』 사장으로 경영을 맡아 현재의 『불교신문』으로 거듭나게 하고 신문을 정상화한 일이다. 다음으로 거사는 삼보학회, 삼보법회, 삼보장학회를 창립, 불교 교육을 위한 중등교육 교재를 출판, 불자 대학생 장학금 지급과 같은 젊은 인재 육성 등 불교계의 재가 운동에서 새로운 전형을 제시하며 실사구시의 불교계 발전을 이룩한 일이다. 또한 비록 완성을 보지 못했지만 『현대 불교 백년사』 집대성을 위한 편찬 사업 추진도 그 기초를 세워놓았다는 데 중요한 의미를 두고 있다.

이한상 거사

거사가 불교계를 위해 남긴 업적은 그 무엇보다 한국 현대 불교 발전을 위해 본질적인 확산을 하게끔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점이다. 재가의 삶에서 하화중생, 그 회향의 전범을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거사는 재가의 삶에서 불교적 덕목을 실천한 불자의 삶을 살았다. 그의 공적에 따른 특별한 실행력을 거듭 밝히고 기리는 일은 불교계 후학들이 거사를 롤 모델로 각자의 행실을 점검해보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또한 거사를 귀감 삼아 우리 불교계가 나아갈 방향과 해야 할 책무를 확인해보는 좋은 전기가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덕산 거사를 추모하고 거사의 주요 공적을 조명해보는 일은 시대적으로 필연적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대한불교신문』 경영과 불교계 인연
재가 불자인 덕산 거사가 불교계 전면에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현재 『불교신문』의 전신인 『대한불교』 사장이 된 1964년부터다. 『대한불교』는 1960년 월간으로 창간되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개인에게 위탁 경영한 탓으로 재정난이 극심했고, 5년도 되기 전에 폐간이 거론될 정도로 경영 사정이 원활하지 못했다. 언론 경영을 전혀 모른다고 극구 고사하던 거사는 거사가 속한 달마회 행원 스님의 설득과 종단의 적극적인 권유로 『대한불교』 경영을 맡게 되었다. 당시 거사는 도급 한도 10위권 안에 드는 풍전산업과 3,000명의 직원을 거느린 대한진척의 경영주로 알려진 기업인이었다. 거사는 기자의 인사권과 논설 방향 같은 경영의 핵심 방침은 종단의 간섭을 배제할 것을 신문사 인수 조건으로 내세우고 이를 보장받고 경영에 참여했다. 이러한 경영 방침은 종파의 기관지에 국한되지 않고 범불교적인 차원에서 공론지를 지향하는 의미가 자못 크다고 할 수 있다.
거사는 신문을 인수하자마자 『대한불교』 제호를 『대한불교신문』으로 변경했다. 『대한불교신문』 사장에 취임한 거사는 『대한불교신문』이 독자를 통해 포교 활동을 크게 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경영을 맡았다고 한다. 거사는 월간에서 주간으로 바꾸고 서울 본사 외에 부산 등 주요 도시에 지국과 지사를 설치하며 취재진을 보강하고 보급망을 확충했다. 또 기자 외에 국내 12명의 특파원과 14명의 통신원을 별도로 둘 정도로 과감한 투자를 하며 빠른 속도로 신문사의 체질을 강화했다. 1967년에는 해외에도 3명의 특파원을 두며 보도 영역을 넓혔다. 경영난의 가중으로 폐간 위기까지 내몰린 신문사를 맡아 혁신적인 경영 수완을 발휘해 신문사를 정상 궤도에 올려놓은 것이다. 또한 공정 보도를 지향하며 지면 혁신을 단행하고 일간지 수준의 편집으로 신문사 체계를 정비해 오늘날 불교계 최대의 신문사인 『불교신문』의 성장 동력이 되며 그 위상에 맞게 『대한불교신문』의 입지를 다져놓았다. 거사의 경영으로 신문사는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음은 물론이다. 거사는 1972년 3월 26일자 제447호를 끝으로 정상 궤도에 오른 신문사의 사장직에서 물러나며 신문사 지분은 조계 종단으로 귀속시켰다. 덕산 거사다운 보살행의 실천이고 과감한 투자이며 때에 맞는 용퇴였다.
거사의 불교계 활동은 1968년 대한불교달마회 회장 취임을 계기로 더욱 확산되었다. 1958년 보문동 미타사에서 창립된 달마회는 거사가 회장을 맡은 이후 재가 불교 수행 단체로 각종 불교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불교 활동의 중심이 되기도 했지만 때로는 측면에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재정적 지원을 해주었다. 동국대 송재운 명예교수는 거사가 회장을 맡기 이전부터 행원 스님의 지도로 달마회의 참선 수행에 매진한 재가 불자로 널리 알려졌다고 회고한다. 그만큼 거사는 불교계와의 교류에 밀착된 인연 관계를 드러냈다.

불교 교재 편찬 등 불교 교육 활성화
거사는 불교 교육에 특별한 관심과 열정을 보였다. 중고교 및 대학 불교 학생활동의 초석은 거사에 의해 다져졌다고 할 수 있다. 거사는 광동학원 이사장을 맡아 1965년 설립된 전국 불교 학교들의 협의체인 불교종립학원연합회의 창립을 주도했다. 그 실제적 목표는 각급 종립 학교의 종단 학교로서의 위상 재정립, 교법사 제도의 현대적 개선 및 활성화, 중고교 불교 교재 편찬 계획 수립 등이었다. 거사는 전체적으로 효과적인 포교를 위해 청소년들에게 먼저 통합적이고 체계적인 불교 교육을 해야 한다는 자신의 지론을 반영했다. 인재 양성을 범종파적으로 불교 이념에 입각하자는 기본적 목표를 갖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불교 교재 편찬 과정에서, 중등교육 불교 교재로 사용하던 『밝은 생활』은 내용이 어려워 학생 교재로 부적합하다는 일선 교사들의 고충과 의견을 반영해 새로운 교재 제작에 착수했다. 이 작업은 거사의 적극적인 경제적 지원에 의해 계획대로 1967년 성공적으로 출판되었다. 새로 편찬된 교재는 청소년의 정서에 맞게 불
교를 해석한 실용적이고 현대적인 교과서라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1,600년 한국
불교 역사상 불교 교육을 위한 중등교육 교재를 출판한 것은 이때가 최초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불교 교육을 중요하게 여긴 거사의 헌신적인 보살 정
신, 그 덕행이라고 할 수 있다.

삼보장학회와 대학생불교연합회를 통한 인재 양성
1960년대와 1970년대, 경제가 어려웠던 시절, 불교계의 장학 사업은 조계종단에서 동국대 불교 관련 학과 학생을 대상으로 장학금을 제도적으로 지원했다. 이와 함께 덕산 거사는 종단 장학 사업보다 훨씬 체계적이고 커다란 규모의 장학사업을 주도하며 청년 인재를 앞장서서 육성했다. 한국 불교학의 진흥을 목적으로 설립된 삼보학회가 주관하는 장학 재단인 삼보장학회를 세워 불교계 최초로 체계적인 장학 사업을 펼쳤다. 사실 거사는 이전부터 여러 차례 불교계에 장학금을 익명으로 희사하곤 했다. 이를 통해 젊은 인재들이 힘을 얻고 우리 불교계가 더욱 발전되었음은 물론이다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는 1960~70년대 청년 불교 운동의 한 축으로 현재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대불련은 전국의 각 대학과 3군 사관학교의 불교학생회,불교연구회 등 학생 불교 단체가 주축이 되어 1963년 결성되었다. 창립 이후 대불련 산하 대학생 수도원의 건립과 운영으로 불교계에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1965년 대불련의 구도부(求道部)가 봉은사에 대학생 수도원을 설립했고, 그 구도부원 중 일부는 봉은사에 수도원을 두고 합숙하면서 실제로 출가 생활을 체험하며 학업과 수행을 병행했다. 대불련은 대학생 불자 중심으로 이들을 이끌었던 지도교수와 지도법사의 면면도 학계와 교계의 명망 높은 교수, 스님들이었다. 대불련이 창립된 이후 1969년까지 수도원의 운영과 재정 대부분을 총재인 거사가 지원하며 운영되었다.
대불련은 1970년 3월 27일 전국 지부를 대표하는 35명의 대표자 대회를 열었다. 이때 80개 대학에서 3,000명의 회원이 등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대학생들은 재정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거사는 대불련의 운영 경비를 지속적으로 지원해 대불련이 흔들리지 않고 본연의 책무를 실행하도록 지원했다. 이에 대한 실례로, 대불련의 전년도 회계 결산 공고를 보면 수입 총액 147만2,029원 중, 90%가 넘는 133만2,980원이 거사의 지원금이었다. 대불련 재정의 대부분을 거사혼자서 도맡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대불련의 활동에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거사는 대불련 발전의 실질적인 공로자다. 대불련은 크게 보면 불교계의 밝은 미래를 위해 불교계의 진흥과 인재 양성을 위한 공부와 자립의 기회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불교 백년사』 편찬, 미국 이민
1960년대 초중반에 100년의 불교 역사를 집대성해 불교가 지나왔던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기자는 의견이 학계에 제기되었다. 하지만 한국 불교 사료의 총정리에 필요한 재원이 문제였다. 이러한 고충을 전해 들은 거사는 흔쾌히 경제적 부담을 자임했다. 추진력을 얻은 이 사업은 거사의 후원 아래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65년 9월 덕산 거사가 회장인 삼보학회의 주관으로 풍전빌딩에 『한국 불교 백년사』 사무실을 마련하고 편찬 사업을 개시했다. 이 불사는 수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대작 불사로 많은 원로 스님들과 명망 있는 불교 학자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편찬 사업을 시작한 지 4년이 지난 1968년 7월 가제본 두 권을 내놓음으로써 드디어 1차 작업이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실상 완성된 책은 아니었다. 4년의 작업 끝에 1차로 선보인 철필로 쓴 등사본으로 정식 출판물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그때까지 수집된 자료들을 모아 분야별로 정리해서 가제본을 먼저 낸 것이다. 이후 감수위원회의 감수를 통한 수정과 보완 과정을 거쳐 제대로 된 정식 출판을 예정했던 듯싶다. 그 후 1972년 거사가 전혀 예기치 않게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면서 이 사업은 중단되었다. 그간 모은 자료가 영인본으로 국내에 남아 있다고 한다. 오늘날 거사의 유지를 살려 『한국 불교 백년사』, 나아가 『한국 불교 백오십년사』가 발간되기를 희원하는 마음은 모든 불자들의 기원일 것이다.
거사는 1971년 불교 발전 재정 지원의 토대가 되었던 국내 건설 사업을 모두 접고 신병을 정리해 미국으로 이민, 캘리포니아에 정착했다. 이후 1973년 캘리포니아 카멜 시에 삼보사(三寶寺)를 창건했다. 3만3,057㎡(1만여 평)의 대지에 대웅전 330㎡(100평), 선방 660㎡(200평), 관리 사무실 등 네 채의 건물을 갖춘 삼보사는 300여 명을 수용하는 큰 사찰로 한국 불교를 미국에 널리 홍보하는 역할을 했다. 이 또한 거사만이 할 수 있는 불교적 보국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덕산 거사의 불교적 삶
덕산 거사의 삶은 그가 남긴 공이 워낙 크기 때문에 그의 행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제한된 지면으로 위에 예시한 대표적인 공적을 집중적으로 조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 외에도 거사는 WFB상임부회장을 맡는 등 한국 불교의 국위선양에도 힘을 쏟았고 군 법사 제도를 도입하는 데 열의를 다해 성사시켰다. 또한 장충단 공원의 사명대사 동상을 자신의 5・16민족상금을 기탁하고 기탁금 외 사재를 동원해 단독으로 건립하기도 했다. 세종로 정부종합청사의 준공을 경축하는 법회를 청사 내부에서 봉행해 공무원 불자회를 발족하게 한 일은 그야말로 획기적인 불사의 기록이 되었다. 이처럼 거사는 1960년대와 1970년대 10여 년에 걸쳐 우리나라 불교계를 위해 수승한 공덕을 쌓은 대표적인 재야 거사다. 거사의 불교적 삶은 무주상보시라는 불교적 보살 정신을 실천함으로써 온전한 불자의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거사는 “불교가 보다 밝고 참되고 친근한 대중의 등불이 되는 것”, 즉 ‘불교의 현대화’를 늘 주창하고 실행에 옮기려 했다. 동시대 거사와 함께하며 활동했던 사람들은 거사에 대해, 불교계를 위한 거사의 재정적 지원이 결코 재산이 많아서가 아님을 강조한다. 그들은 1960년대 한국의 불교 발전에 뜻을 둔 거사의 여법한 회향의 열정에 대해 존경을 표하며 거사가 여러 면에서 진정한 한국의 유마 거사였음을 긍정한다.
거사는 불교학의 진흥과 불교 인재 양성을 위해 강한 집념을 가지고 인생 후반기를 불교계를 위해 전력투구하듯 헌신했다. 특히 대학생불교연합회를 창립하고 지원한 것은 불교 확산의 교육적 투자로 앞을 내다보는 혜안이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드러내지 않지만 어쩌면 그의 내면에는 남다른 불심과 비범한 실행력을 보여줄 수 있는 동사섭의 충만한 깨달음이 선행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거사가 남긴 불교계의 공적은 자신의 호가 주는 의미 그대로 덕(德)을 산(山)같이 베풀며 자신의 한생을 가치 있게 살았다고 할 수 있다. 특별한 감동과 영감을 주는 덕산 거사를 기리며 새삼 그 무량한 공덕에 고개를 숙인다.

이덕주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로 시집 『내가 있는 곳』 이후 시인으로 본격 활동을 시작했다. 2012년 『시와 세계』로 평론에등단했으며, 시 비평집 『톱날과 아가미』를 썼다. 현재 『시와 세계』 편집위원이다.

● 본지 지난 호[2020년 10월호, 다시 쓰는 재가열전|내가 만난 붓다 : 용태용 변호사 편]의 ‘용태용’을 ‘용태영’으로 바로
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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