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재가열전|내가 만난 붓다_미래의 새싹들이 우리가 만날 붓다

미래의 새싹들이 우리가 만날 붓다

김규칠
대한불교진흥원 이사

지구 구석구석까지 집 안이 되고 오지와 벽지까지 문명이 침투한 현대에 재가와 출가가 어떻게 구별되는지 과제 중의 하나다. 원래 붓다의 가르침을 뜻으로 새겨보면 구별은 없었다. 유마 거사는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고 했다. 이런 유마 거사의 마음은 이미 그런 구분을 넘어서고 있다. 중생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알고 평생을 선공후사로 일관한 분을 필자가 아니라 누군가라도 만났다면 이미 재가열전을 썼을 것이다.
불교와의 인연을 쓰자니 스님들과의 인연이 더 많이 떠오른다. 젊은 날 다행히도 고승대덕들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행운이 있었다. 소천, 전강, 경봉, 청담,성철, 춘성, 탄허, 운허, 구산, 석주, 법정, 휴암 등 우리 시대의 불보살 선지식이라고 할 수 있는 분들을 찾아서 직접 뵙고 높은 훈도와 깊은 감명을 받은 바 있으나 스님들 이야기는 이미 작가들이 근대 고승 열전에서 했을 것이다. 재가의 인물에 관한 글을 읽고 뭔가 유익함을 얻게 하는 거라면 차라리 현대적 맥락에서 세상이 원하는 재가의 보살도적 인간상은 어떤 인물일까를 함께 생각해보는 것이 나을 듯싶다. ‘종교가 세상을 염려하기보다 세상이 종교를 염려하는 시대’라는데 좁은 테두리 안에서만 생각하는 것도 발전적 사고방식은 아닌 것 같다. 먼저 세상을 위해서 하고 결과적으로 종교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 되는 게 그것이 참된 종교일것이다. 『금강경』의 정신과 사상을 따르면 원래 불교는 그런 종교가 아니던가? 그런 의미에서는 불교보다 세상을 먼저 염려하셨던 만해 스님과 그분을 도우셨던 춘성 스님, 그리고 용성 스님을 도와 독립운동을 하셨던 소천 스님 등 스님들이먼저 떠오른다.
소천 스님은 금강경구국독송운동을 전개하면서 나라와 세계의 앞날을 위해 『진리도』, 『전쟁 없는 세계의 건설 방략』, 『활공원론(活功原論)』 등 선각자적 저술을 내신 분인데 직접 그 책들을 건네시면서 친절한 설명과 더불어 당부의 말씀을 주셨다. 필자는 그때의 그 저서들을 아직도 책장에 보관하며 수시로 꺼내 참고하고 있다. 휴암 스님은 출가 이전 청소년과 처사 시절(속명 성경섭)부터 구도의 길에서 함께 고민하고 애쓰던 추억과 출가 이후 돌아가실 때까지 때로는 편지로 때로는 직접 만나 세상과 불교의 일을 의논하며 많은 세월을 함께 나눈 분이라 잊을 수없다.


김규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과 동 대학교 신문대학원을 졸업하고, 비엔나대학과 와세다대학에서 연수를 마쳤다. 외무고시에 합격해 18년간 외교관으로 근무했으며 시민정책연대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에서 활동했다. KBS <심야토론>, EBS <하나뿐인 지구> 등을 진행했고, KBS 해설위원 및 이사, BBS불교방송 사장 등을 역임했고, 한국산업기술정보원장, 국민대 객원교수, 동국대 불교대학원 및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 대한불교진흥원 이사장을 지냈다. 현재 대한불교진흥원 이사로 있으면서 불교인문사회과학원 원장으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탈정치시대의 새로운 항로』, 『불교가 필요하다』 등이 있다.

휴암은 이승을 하직하는 과정이 마치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에서의 명인의 마지막 이야기처럼 젊은 제자의 부름에 응하다가 ‘명과 비명의 구분을 뛰어넘는 행각’을 보였다. 오랫동안 유체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애쓰다가 휴암의 실형(實兄, 성태섭)과 함께 근 일 년 만에 수습해 화장한 후 유분을 자연 산천의 품으로 되돌려 보낸 기억들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다. 지금 언급한 분들은 평소 불교의 내외(內外)나 승속(僧俗)의 구분을 뛰어넘어 사유하는 법을 강조하던 분들이라 특히 인상에 남고, 그 생각에 필자도 영향을 받고 지금도 공감하는 바가 많아 이런 글을 쓰고 있다. 불립문자의 상승 방편을 높이 존중하지만 세상사를 고려할 때 불교 사회인으로서 먼저 쌓아야 할 훈련은 투철한 문제의식과 논리 추구의 극한을 체험하는 일이다. 나는 이 훈련이 불교 사회인의 우선적인 수행법이라고 본다. 시대의 말이 어지럽고 황폐할수록 대중은 간단명료하게 정리된 답이나 쉽게 위안을 주는 쪽으로 쏠리는 경향이 있지만, 그럴수록 주체적 역량은 더 쇠퇴하기 마련이므로 그건 진정 사회인을 위한 일은 아니다. 함석헌 선생의 『씨알의 소리』처럼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각성이 있을 때 국민이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다. 휴암의 직설에 의하면, “큰 사건을 일으키고 뉴스를 계속 생산하며 사업을 많이 한다고 진정 큰일을 하는 건 아니다. 문제는 진실의 깊이와 무게이다. 진실이 불교의 힘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혼란과 파행, 인재 빈곤은 필자를 포함해 기성세대가 투철한 문제의식을 갖지 못한 탓이다. 여론조사나 눈앞의 인기에 집착해 대중에 영합하거나, 그게 아니면 윤리 도덕이나 사회정의만 주장하는 식의 교과서 같은 소리만 한 결과다. 비위를 맞추어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거나 비난의 대상을 만들어 공격하는 식의 편 가르기에도 해결책은 없다. 말로는 포용과 화합, 원만과 복덕을 강조하고, 실제로는 인정과 평가에는 인색하며 완전무결의 극단만을 추구하는 풍토에서는 호응과 성원을 받아 크게 될 수가 없다. 공감과 격려보다 폄훼와 비난에 능한 불균형 불공정의 세태에 선진국처럼 차선의 인물이라도 나오기 힘든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교언영색이나 홍보 선전보다 진실을 알아보려 하고, 전통의 계승 발전 못지않게 창의적 노력과 새로운 시도의 어려움을 무릅쓰면서 소신과 실천의 길을 걷는 사람을 우리는 얼마나 알아보았는가? 남을 도우는 보조역도 기꺼이 맡고, 다른 견해도 일리가 있음을 이해하며, 동료나 이웃의 일을 칭찬하고 따라 기뻐해주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얼마나 보람 있겠는가? 그것이 수순중생(隨順衆生)과 수희공덕(隨喜功德)을 배운 불교인의 진실된 일이 아닐까? 그리하여 선진국처럼 차선의 인물이라도 장점을 부각해 인물을 만드는데 참여하고 격려할 때 선순환적 상승 효과를 내어 서로 나눌 몫도 커져서 복지 한류 국가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대중사회의 분위기와 인물과 비전(vision) 등 세 가지 점이 서로 잘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 시대가 변했으니 그런 요소들도 달라져야 하는데, 현대의 지도자상이 권세와 무력을 탐하는 정복자는 아닐 것이다. 기자들 중에 가끔 ‘정치 9단’이니 ‘권력에의 의지’니 하며 마치 긍정적 면인 듯 쓰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표현은 대중을 오도할 수 있으므로 정식 기사화할 것은 아니다. 니체가 ‘권력에의 의지’라고 했다고 하지만 그가 말한 것은 실은 ‘생성의 본질로서의 힘에의 의지’로서 자기를 극복하고 모든 생명의 활생(活生)을 지향하는 초인에 이르러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흔히 말하는 권력에의 의지는 초인의 지향과는 거꾸로 자기를 살찌우는 반동적인 인간의 부정적인 권력에의 의지를 말한다. 그런 것은 명리의 향유와 무의식적 욕망의 충족을 위해 권력을 쟁취하고 강화하려는 수치스러운 권력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칼라일도 『영웅숭배론』에서 속된 영웅론을 비판하며 ‘진실에의 용기와 자기 극복의 가능성을 실현한 인간상’을 영웅이라고 보았다. 불교인도 신앙 생활에서 불보살 같은 자기 극복과 중생 제도의 초인적 인간상을 본으로 삼아 정진한다.
그러나 현실의 세상사를 이끌거나 헤쳐 나가는 일은 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고대 ‘축의 시대’에 성인들이 출현해 설파한 이래 수많은 현자들도 영향을 끼쳐 외형상은 이 정도 문명사의 수준이라도 가능했다고 평가할 수 있지만 반면 다른 관점도 있다. 사회와의 관계에서 그 가르침들의 의의는 지배 체계 수립의 명분으로 쓰이거나 상의하달적 훈계에 그쳤던 경우가 많았다. 실제 현실에서 시대를 압도한 것은 그 시대 대중의 관심사와 공포와 불안을 교묘히 결집하고 이용하는 이념 집단의 이해와 헤게모니 장악 전략이었다.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고 지금도 그런 일들이 전개되고 있다. 말하자면 대중의 역사는 정신적인 요기(Yogi)형 지도자보다 코미사르(Commissar, 통제 위주의 권력자)형 정치적 인간이 지배했다.

부족하지만 진정성과 순수함, 그리고 시대정신에 대한 예민하고 풍부한 감수성과 과학적 지식 정보의 친연성에서 앞선 젊은이들이 지금 세계의 곳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현대적 붓다의 뿌리이며 새싹들이다

신의 대리자라는 중세의 상당수 교황과 종교개혁자 칼뱅 같은 이들마저 실은 이면에서는 요기의 탈을 쓴 코미사르형 전제군주였다. 심층을 들여다보면 정신적 지도자의 경우도 표층의식은 윤리 지향적이지만 무의식은 부정적 권력에의 의지가 지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현대는 이념의 좌우나 분야의 여하를 불문하고 정보화 기술과 광고 기법을 교묘히 동원해 겉으로는 요기성 당의정(糖衣錠)의 외피를 적당히 입히고 실제로는 후흑학(厚黑學, 낯 두껍고 속 검은 계산법)의 권모술수로 코미사르식조종을 획책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런 문제점을 알고 생각해보자. 20세기의 정치사에서 요기형이 실력을 발휘한 사례가 두 번 있었다. 간디와 호찌민이었다. 전자는 요기형이었고, 후자는 요기적 면과 코미사르적인 면 둘 다 있었다. 필자는 청년 시절에 간디를 현대의 붓다처럼 여겼고, 호찌민은 잘 몰랐다. 이제는 이런 인물도 과거형이 되어버렸다. 새 시대가 요구하는 리더십으로 눈을 돌려보자. 우리 한반도 사람들은 민주적 근대화 과정을 경험(북은 전혀 없다)한 지 오래지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 양립하기 어려운 이질적 요소의 묘한 결합이 눈앞에 압도할 광경으로 펼쳐질 때는 이에 감성적으로 흔들리면서 흥분하는 면을 보이고 있다. 만일 남북한 어느 쪽이든 요기형 요소에 현대 지성의 면모를 갖추고 코미사르적 요소도 적당히 갖춘 지도자 상의 이미지 구축에 성공한다면 어떻게 될까? 대대적인
애민 포용적 이벤트와 대외적 평화 공세 등 스펙터클 정치를 연출해낸다면 북한인민은 물론이고 일부 남쪽의 국민 대중의 심리까지 흔들지 모른다.
평창올림픽, 남북 및 북미정상회담과 코로나19 와중의 사태 발전 등을 경험하면서 상당수 대중이 쉽게 흥분하고 기울어지는 걸 직접 목격하지 않았던가? 자유못지않게 평등을 중시하는 대중성은 온정 어린 제스처에도 흔들릴 수 있다. 앞으로 점점 더 후안무치한 꾼들이 진영 논리와 억지 주장으로 판을 치면 대중은 더 혼돈의 와중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다. 반면에 통합적 리더십과 현대적 비전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고 경박한 포퓰리스트들은 설쳐댈 것이다. 그러면 중도 성향의 정치 혐오증은 더 심해지고 진영 양극화는 가속하는 상황 속에서 대중의 불안과 공포가 고조되어 도피처라도 찾고 싶어질 때쯤 주변 관계국 간의 상호 전략적이해가 합치한다면 동북아시아와 한반도의 난기류에 극적 변화가 일어날지 모른다. 이럴 때에 대비해 불교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리더십 형성 과정에 기여할 길은 없을까? 또는 불교적 정신문화에서 현대를 이끄는 비전이라도 도출할 수는 없을까? 고민을 해보지만 아마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를 세월에만 맡기고 방관할 수도 없다. 전에 어떤 스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금강산에 도인이 없으니 장안에 인물이 안 나온다”고. 불교는 법고(法古)와 창신(創新)을 아울러 자유자재로 조화롭게 이끌어야 하는데 너무 옛날식 수행과 전법불사에만 기울어졌다. 이제는 인간 개인도 집단도 자연과 타자(他者)을 홀대하고 혼자만 살 수 없는 시대다. 그렇다고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무시하고 공동체만 강조해서 일이 풀리는 시대도 아니다. 불교계 지도층은 이러한 현대 사회의 추세를 판별하고 선도할 태세가 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에 불자 대중이 사회적 안목과 역량을 구비할 훈련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불교인 모두 잠재력을 극대화할 기회를 갖지 못해 시대의 절실한 과제를 푸는 데 기여할 수 없었고 선도적 좌표를 확보하지도 못했다. 법회도 복덕과 시혜의 강조, 힐링과 명상 그리고 상담과 예화 법문 쪽으로 치우쳐 전체적으로 현 사회를 이끌 지혜와 전략적 사고의 필요성 면에서 보면 균형과 조화를 잃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중은 시대가 요구하는 인물을 살펴볼 안목을 갖출 수 없다. 이미 좌우의 주력 기성세대는 진정성과 능력 면에서 신망을 잃었다. 이해관계와 편드는 일에만 신경을 쓰고 뒤떨어진 이념의 틀과 졸속 구상과 서툰 입안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자포자기하고 갈 곳을 몰라 방황하고 있다. 시대의 불보살이 있어야 할 일, 나타나야 할 곳에는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한동안은 거의 모두 혼잡과 지지부진 속에서 일상적 울분과 짜증을 억지로 인내하며 고생을 더 겪을 것이다. 그러나 겨울이 깊으면 봄이 머지않듯이 언젠가는 전환의 계절이 올 것이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키워갈 수밖에 없다. 부족하지만 진정성과 순수함, 그리고 시대정신에 대한 예민하고 풍부한 감수성과 과학적 지식 정보의 친연성에서 그 어느 계층보다도 앞선 젊은이들이 지금 세계의 곳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현대적 붓다의 씨알들이고 뿌리이며 새싹들이다. 그들은 집단의 조직화와 결속을 강조하지 않고도 차이와 경계를 넘어 함께 지성적 행동을 발휘하고 있다. 창의성과 유연함, 분야를 가로지르는 다양체적 디자인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머지않아 새로운 나라와 세계화를 위한 방향타와 준비 태세를 갖추어 본격적 전진을 개시할 것이다. 미래의 불보살들, 각계의 새싹들이 앞으로 우리가 만날 붓다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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