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생명 윤리 | 불법의 관점에서 본 자살

불법의 관점에서 본 자살

남시중
미국 변호사

 

붓다 시대에도 우리 시대의 존엄사나 안락사와 비슷한 자살을 시도한 경우가 없지 않았다. 대개 질병으로 인해 견디기 힘든 육체적 고통이 자살 동기였다. 초기 한문 경전인 『잡아함경(雜阿含經)』과 팔리어 경전 『상윳따 니까야(SaṃyuttaNikāya)』에 붓다 성문 제자들의 자살 사례가 공히 언급되어 있다. 성욕과 같은 동물적 욕망을 제어하고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실상을 보여주기 위해 붓다는 설법 초기에 사체가 썩어가는 과정을 관찰하게 하고 신체의 더러움을 연상하는 부정관(不淨觀) 수행을 강조했다. 일체개고(一切皆苦) 같은 염세주의로 오해할 수 있는 붓다의 초기 법문을 듣고 부정관 수행을 집중적으로 한 제자 중에는 죽음을 열반으로 오해한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경전에는 60명에 달하는 제자가 자살한 것으로 나온다. 어느 날 붓다가 “왜 비구의 수가 자꾸 줄어드느냐?”고 물었을 정도이다. 전후 사정을 들은 붓다는 자살을 기도하거나 자살을 돕는 행위를 금하고 부정관 대신 호흡 조절로 심리 안정을 찾는 수식관(數息觀) 수행으로 전환했다. (붓다도 처음부터 완벽한 가르침의 방편을 알았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행간에서 읽을 수 있다.)
일부 제자는 병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을 견디기 어려워 자살하겠다는 의도를 미리 붓다에게 알리기도 했다. 『잡아함경』과 『상윳따 니까야』에 모두 나오는 ‘발가리’란 이름의 제자는 질병의 고통이 너무 심해 죽고 싶어 했다. 붓다는 발가리를 친히 방문한 후 “마음으로 육체의 고통을 더는 제어할 수 없느냐?”고 묻고 그의 해탈 상태를 점검한다. “색(色)은 무상(無常)한 것이냐 영원한 것이냐?”라고 묻는다. 발가리가 “무상한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붓다는 “무상하다면 괴로운 것인가 아닌가?”라고 묻는다. “괴로운 것입니다”라고 답하자, 붓다는 “무상한 것에 욕심내고 탐할 무엇이 있느냐?”고 다시 묻는다. “욕심낼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라고 답하자, 붓다는 “만일 몸에 대해 아무런 욕심과 미련이 남아 있지 않다면 몸의 종말 후에도 좋지 않겠는가”라고 설한다. 『잡아함경』에 비교적 상세하게 나오는 대화는 『상윳따 니까야』에는 ‘색은 무상하다’라는 설법으로 압축되어 있다. 팔리 경에는 붓다가 발가리에게 왜 굳이 나를 친히 보고자 했느냐고 약간 훈계조로 물으면서 대화를 시작한다. “법(法 dharma)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법을 본다”고 설한 붓다의 말에는 발가리가 이미 불법을 체득했다면 굳이 친견을 요청할 필요가 없었음을 암시한다. 발가리의 해탈 상태가 완벽하지 않다는 시사로 읽히기도 하지만 해탈을 확인한 붓다는 발가리의 자살을 사실상 허용했다. 발가리 사후 붓다는 그가 무여열반했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하기도 했다. 불교가 자살을 비교적 긍정적으로 본다는 초기 경전의 한 근거이다. 무아(無我)의 불법을 체득하고 완전히 해탈해 이미 유여열반에 든 사람, 즉 아라한(阿羅漢)의 경우 붓다는 자살도 무방하다고 인정한 것으로 불교 학자들은 해석한다. 특히 서양에서는, 붓다가 자살을 제한적으로나마 용인했다는 사실을 강조해 무신론 종교인 불교는 자살을 부추기거나 너무 관대한 입장을 취한다고 공격하는 신학자도 없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은 해탈자가 아니기에 붓다 역시 통상적 의미의 자살은 엄격히 금했다는 반박도 물론 있다. 대승경전 『법화경(法華經)』에 나오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보살행을 예를 들어, 대승불교에서도 자살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인간의 생명을 신의 하사품으로 믿는 유일신 종교는 자살을 신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해 철저히 저주한다. 유일신 종교와 비교한다면, 자살을 보는 불법의 관점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불교는 자살을 단순히 목숨을 끊는 행위로 무조건 규탄하기보다 일단 그 동기와 상황을 아울러 보고 판단하는 종교라 할 수 있다. 삶의 불가피한 괴로움에서 단순히 도피하고자 하는 자살은 권장하지 않지만, 유일신 종교와 일대일로 비교한다면, 자살에 대해 좀 더 포용적인 세계관이다.
생명은 획기적으로 연장되고 있다. 과다한 의료 개입 없이 자연사하고 싶어도 병원에서 연명 치료를 강제로 받아야 하는 역설의 시대이다. 로마 교황청은 의사 조력 자살 합법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전 세계적으로 커지자 “어떠한 상황이나 경우에도 존엄사나 안락사는 가장 큰 죄악인 자살일 뿐이다”라며 철저한 반대 입장을 올해 재천명하기도 했다. 의료 현실이 변해도 안락사와 관련한 법적 변화를 모색하기란 쉽지 않다. 서구 선진국에서 의사 조력 자살이나 적극적인 안락사를 허용하는 국가는 현재 네덜란드와 벨기에, 캐나다, 스위스 네 나라뿐이다. 스위스는 고령이나 우울증까지 의사 조력 자살을 광범위하게 허용하고 외국인에게까지 문호를 개방한 예외적인 국가이다. 지난 2019년 스위스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한국인 대기자만 100명이 넘었다.

불교는 삶의 불가피한 괴로움에서 단순히 도피고자 하는 자살은권장하지 않지만, 유일신 종교에 비해 자살에 대해 좀 더 포용적인 세계관이다. 생명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 생명 존중이기 때문이다.

경전만을 근거로 본다면 붓다도 일종의 존엄사를 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붓다의 임종 모습을 사실에 가깝게 그려놓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받는 팔리어본『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Mahaparinibbana Sutta)』에 그려진 붓다는 선정에 먼저 든 후 입멸했다. 만약 경전 기록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었다면 경전에 그렇게 묘사한 이유는 붓다가 마지막 순간까지 깨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붓다’란 호칭은 ‘깨어 있는 자’라는 뜻이고 불교의 이상은 늘 깨어 있는 선정 상태에서 삶의 고통과 죽음을 초월하는 것이다. 식중독에 걸려 인사불성 상태로 평판에 어울리지 않는 외진 마을에서 객사했다는 경쟁 사문의 험담을 제어하고자 한의도였을 수도 있다.
천주교는 자살을 신의 권위에 항거하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의 가장 사악한 행위로 철저하게 비난해왔다. 거의 모든 유일신 종교가 자살에 대해서는 신에 대한 모독으로 해석해 조금도 동정을 보이지 않는다. 자살을 예방하는 사회 효과를 고려해서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자유의지’란 기독교 개념은 인간이 철저하게 이성적이고 자율적인 판단을 상황과 여건에 일절 영향받지 않고 할 수 있다는 (사회생물학과 뇌과학이 모두 부정하는) 착각이다. 지구 생명체 중 인간만이 자살하는 것도 아니다. 동물도 자살한다. 약 600만 년 전 인간과 선조가 같은 것으로 확인된 침팬지와 일생을 같이 생활하면서 관찰한 동물학자 제인 구달(Jane Goodall)은 침팬지의 자살 사례를 보고한 바 있다. 고래가 해안가로 밀려와 죽는 스트랜딩(Stranding) 현상을 스트레스로 인한 자살로 설명하기도 한다. 일본원숭이를 관찰하던 다큐멘터리 팀에 의해 자식을 잃어버린 어미가 매일 통곡을 하다 일주일 후 절벽에 새끼를 안고 뛰어내려 죽은 사례가 우연히 포착된 적도 있다.
조류와 파충류 그리고 모든 동물은 호르몬에 의해 행동이 기계적으로 통제된다. 스트레스 호르몬과 쾌락 호르몬이 주기적으로 순환 반복하면서 생존과 번식을 극대화하는 행동을 하도록 진화론적으로 설정되어 있다. 인간도 물론 예외가아니다. 만약 쾌락 호르몬과 스트레스 호르몬이 교차적으로 순환하는 생리 현상에 이상이 발생할 경우, 예를 들어 마약으로 쾌락 호르몬만 장기간 배출되거나 우울증 같은 스트레스 호르몬이 과다 분비되는 양극단의 경우, 보통 죽음으로만 문제가 해결된다. 불법의 관점에서 보면, (즉 실상을 보면), 자살도 자살하는 자유의지의 주체가 없는 무아(無我)의 연기(緣起) 작용이다. 자살할 수밖에 없는 스트레스를 촉발하는 사회 환경 개선이 중요하다. 자살 행위나 자살자를 저주하는 건 자살률을 줄이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국제적 규모의 실증적 조사에 의하면, 한 사회의 지배적인 종교가 자살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하는가와 그 사회의 자살률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자살률이 매년 선진국 모임인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수위를 기록하는 이유는 빈곤한 우리 노인과 입시 지옥에 내몰린 청소년 자살률이 높아서이다. 불법은 인간의 생물학적 숙명인 죽음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죽음이 우리가 두려워하거나 살아서 심리적으로 저항해야 할 아무런 문제가 아니라는 생사불이(生死不二)의 깨달음으로 끝난다. 태어남도 죽음도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사건’이 아니다. 삶과 죽음 모두 인연 작용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찰나의 자연현상일 뿐이다. 다만 우리는 언어 상상을 통한 인간 중심적 미망과 분별에 빠져 우리의 죽음만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죽어서도 계속되는 진정한 나라는 게 있어 마치 초월적 세계에서 영속하거나 환생한다고 착각한다.
부처님 제자 중 고디카는 해탈을 얻은 후에도 해탈 상태를 지키지 못해 늘 괴로워했다. 해탈의 성취와 상실이 반복되었고 일곱 번째 해탈을 얻자 그 해탈 상태를 지키고자 자살해버렸다고 『상윳따 니까야』에 나온다. 해탈에 대한 집착조차 없어야 하는 아라한의 모습으로 읽히지 않는다. 그런데도 붓다는 사후 그가 무여열반을 성취했다고 선언했다. 「고디카 경」은 자살도 열반으로 가는 하나의 방편일 수 있다는 불교의 일부 지류에서 내놓는 주장에 인용된다. 붓다 재세 시 비슷한 지역에서 불교와 경쟁했던 자이나교에서는 자연 수명이 다하기 전에 단식으로 몸을 버리는 자살을 해탈의 완성으로 보았다. 자이나교는 진정한 자아는 영혼이지 몸이 아니라고 보기에 신체를 죽이는 고행을 앞세우고 진정한 해탈은 몸을 버려야만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고디카 경」에는 초기 불교에 남아 있던 자이나교의 영향이 보인다.
억압에 대한 저항의 방편으로 베트남이나 티베트에서 스님들이 분신자살한 사례가 있다. 베트남 출신의 세계적 명성을 가진 틱낫한(Thich Nhat Hanh) 스님은 무의미한 자살 행위라는 서구 언론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살신성인이라며 옹호했다. 자살은 1. 살아서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용기가 없거나 2. 모든 희망을잃어버렸거나 3. 존재하고 싶지 않은 욕망이 있거나 하는 세 가지 경우라고 틱낫한 스님은 전제하고, 자신을 억압한 자를 미워한 동기에서가 아닌 그들의 무지를 오히려 일깨워주기 위해 그리고 그들이 억압하는 행동을 고치도록 유도하고자한 이타적 동기에서 분신자살했다고 보았다. 숭고한 불교 전통의 자비행이지 세속적 의미의 자살이 아니라는 변론이다. 불자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오계 중 첫째가 불살생(不殺生)이다.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은 불교의 으뜸가는 덕목이다. 붓다는 동물을 죽여 제사 지내는 브라만교 관습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사람은 물론 동식물 심지어 미물조차 함부로 해하지 못하게 했다. 불법의 관점에서 보면, 자살은 단순히 내가 내 몸을 해하는 게 아니라 내 몸을 숙주로 사는 수많은 미생물과 70조에 달하는 독립적 생명 단위인 각 세포에 대한 폭력이다. 통상적 의미의 자살에 불교는 당연히 반대한다. 하지만 생명의 소중함을 알기에 오히려 생명의 고통에 무한한 연민을 갖는다. 불법의 관점에서 보면, 육체적 생명을 무조건 연장하려는 노력은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제법무아(諸法無我)의 불법에 비추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존엄사나 안락사는 안 된다는 유일신 종교의 아집은 불법의 관점에서 보면 진정한 생명 존중이 아니다. 생명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 생명존중이기 때문이다.

남시중 실리콘 밸리 현지에서 변호사 및 투자자로 일하고 있다. 성균관 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Northwestern University (Medill School of Journalism)에서 석사 학위를, University of California (Hastings College of the Law)에서 법학 박사(Juris Doctor) 학위를 받았다. 『IT조선』에 ‘남시중 시론’을 연재하고 있으며 저서로 『개를 위한 변명 – 보신탕과 동물 권리론에 관한 철학적 성찰』, 『벤처@실리콘 밸리』, 『Why Meditate?』 등이 있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twenty − nin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