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이란 무엇인가 2 | 고통은 왜 존재하는가?

고통은 왜 존재하는가?

박승찬 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인간은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찾는 행복에 도달하지 못하고 오히려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고통은 행복이라는 빛을 향 하는 인간에게 마치 그림자처럼 운명적으로 연결된 현상이다.

선과 악의 이원론을 통한 고통 해명
인간이 겪는 고통과 세상의 악에 대한 설명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 는 이원론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해명이다. 이에 따르면 어떤 사악한 존재나 세 력, 즉 악신들이 존재하고,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의 근원은 바로 이 악신의 작용 안에서 발견된다. 역사적으로 이런 입장은 조로아스터교에서 발견되고, 서방 세 계와 특히 그리스도교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친 영지주의(Gnosticismus)와 마니교 (Manicheismus) 에서도 나타났다. 이원론적인 해석이 지니는 장점은 모든 악과 고통에 대해서 우리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근원의 작용을 통해 쉽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많은 사 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행위자의 책임을 제삼자인 악신에게 전가함으로써 개인의 윤리적 책임의식을 약화시킬 수 있다. 또한 이런 해석은 유일신관을 가지고 있는 종 교들이 고백하는 신의 전지전능함과 상충된다. 더 나아가 물질을 악과 동일시하는 모든 주장은 전지전능한 창조주가 세상을 선하게 창조했으며, 그의 아들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육신을 취했다고 믿는 그리스도교 사상과 부합되기 어렵다. 이원론적인 해석과는 대조적으로, 그리스도교를 비롯해 전지전능하고 전선한 유일신을 믿는 종교들은 더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다. ‘신이 창조한 선한 세상 안 에 왜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가?’라는 고전적 물음이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로 부터 현대 무신론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답변이 제시되었다.

죄에 대한 신의 징벌
그리스도교의 뿌리가 되는 유대교에서는 ‘신이 사람들의 죄와 잘못 때문에 벌 하신다’는 ‘응보론( 應報論)’ 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인간은 자신의 악한 행위들을 통해서 신의 처벌과 보복을 불러일으키며, 이를 통해 회개해야만 한다. 개인적인 죄와 벌 사이의 관계는 점차적으로 공동체적으로 이해되었다. 이것 은 더욱 발전해 원조들의 죄로 인해서 세상에 고통과 죽음이 도래했다는 원죄설 (原罪說) 이 형성되었다.
죄에 대한 벌로서 고통이 가해진다는 해명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은 사회의 질서 를 유지시켜주는 역할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정화와 교육을 위한 수단
그리스도교화된 서구 사상 안에서 고통은 더 나아가 신의 구원 계획과 관련되어서 성찰되었다. 『구약성경』에서 신은 고통이라는 쓴 약을 통해서 자신의 충실한 종들을 시험한다. 이 고통을 통해서 장차 다가올 유혹에서 인간을 보호하고 인간의 인 내를 키우며, 그의 신앙을 정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받아들여 발전시 킨 『신약성경』에 따르면 신의 뜻에 맞는 고통이나 슬픔은 회개를 자아내어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인간이 실행해야 할 내적인 쇄신과 필수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고통은 이제 더 이상 신적인 세계 질서에서 벗어난 우연적인 사건이 아니라 신 이 개선을 위한 목적이나 시험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는 수단이 된다. 중세를 지 나며 고통은 그 자체로 절실한 현실적인 문제로 취급되기보다는 자주 신적인 섭 리의 한 부분으로 설명되었다.

선을 부각하기 위한 배려
고통 안에 우리가 알기 힘든 신의 뜻이 담겨 있다는 해석 중의 하나는 신이 고 통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선을 보다 더 명확히 부각하기 위해서 악을 허 락한다는 것이다: “악을 선에 유용토록 하는 것은 오직 신의 능력에 속하는 것이 니 악을 적절히 이용하여서 어떤 선한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보에티우스, 『철학 의 위안』) 우리가 의심을 품게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사물의 연관을 꿰뚫어볼 능 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일 뿐이다. 이런 사상은 라이프니츠의 『변신론( 辯神論)』 에서 강력하게 주장되었다. 라이프 니츠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시했던 ‘도덕적 악’과 ‘자연적 악’의 구분에 ‘형이상 학적인 악’을 첨가한다. 인간 고통의 근원인 악이 사실상 인간의 유한성 자체에 그 원인이 있으므로 그것은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악 없이 선이 존재할 수 없고 악을 거쳐 선이 증가된다며 전체의 조화를 위해 악 자체는 좋은 의미를 지닌다고 주장한다. “부분들의 악은 전체의 선인 경우가 많다.” 더 나 아가 그는 가장 완전한 존재인 신은 원칙적으로 가능한 무한히 많은 세계 가운데 최선의 세계를 선택해 현실화했다는 극단적인 낙관론을 펼친다.

세상의 악이나 인간의 고통은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비라고 보는 편이 옳을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고통의 원인과 의미를 찾는 작업을 포기할 수 없다.

전통적인 해석들에 대한 비판
다양한 변신론적인 설명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죄에 대한 대가로 사람 들에게 고통을 주거나 이를 통해 교육하는 신을 가학적이라고 여기며 철저히 거 부한다. 더욱이 중세 유럽을 휩쓴 페스트, 아우슈비츠 등지에서의 유대인 학살 등 에서 발견되는 거대한 고통을 만나면서 사람들은 선한 신의 존재와 의지에 대해 서 의문을 품게 되었다. 카뮈는 그의 소설 「페스트」에서 “나는 어린이들이 만신창 이가 되어 학살당하고 있는 것을 허락하는 이러한 창조주를 죽는 순간까지 거부 하겠소”라고 강변한다. 또한 절대 낙관론적인 해석은 그것이 이성적인 논리정연 함을 지니고 있더라도 처절하게 다가오는 비인간적인 소외와 이에 따른 현실적 인 고통에 대해서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그것은 매우 쉽게 현실적인 악과 인간의 고통을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전락하고 만다.

변신론적인 해석에 대한 대안들
고통의 원인에 대해서 설명하면서도 잔혹한 신의 표상을 만들지 않을 수 있는 해명 방법은 대부분의 고통이 신이 인간에게 준 자유를 남용함으로써 생긴 결과 로 보는 것이다. 인간은 선을 원하는 신의 의도를 왜곡했고, 자신에게 주어진 자 유를 잘못 사용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통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물론 자유는 성숙되지 못한 인간에게는 너무 위험한 선물이었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선물이 신의 놀라운 사랑에 의해 주어졌다고 믿는다. 따라서 신은 결코 인간의 고 통과 악을 원하지 않지만, 인간에게 자유를 주고, 그 소중한 선물 때문에 고통이 초래될 수 있는 가능성을 허용했다는 것이다.고통을 인간의 역할과 연결하는 또 다른 해석은 인간이 살고 있는 세상을 완성 된 결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완성을 향한 과정 안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신은 계속되는 창조의 과정 안에서 혼란스러운 세상에 신이 원하는 질서를 가져다 주는 ‘창조의 협력자’를 불렀다는 것이다. 신의 창조 사업에 함께하겠다는 선택은 다가올 수 있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물론 이런 해석에는 모든 것을 시간성과 자연법칙을 넘어서 자신의 의지대로 해결할 수 있다고 이해되는 ‘신의 전능함’을 제한하는 측면이 있다. 그렇지만 어 떤 신학자들은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을 거두어들이는 자기비허( 自己卑虛) 의 행위 속에서 신의 전능함이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세상의 악이나 인간의 고통은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 비라고 보는 편이 옳을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고통의 원인과 의미를 찾는 작업을 포기할 수 없다. 이 작업은 비록 서투르게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고통받 는 당사자들을 적어도 일시적으로 안정시켜주거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행동 을 위한 전망을 보여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고통에 대한 논의가 지니는 다양한 차원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중세 스콜라철학의 완성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고통의 체험 자체’와 그것으로부 터 주어지는 ‘유용성’을 구분했다. 즉 ‘고통은 그 자체로 악’이기 때문에, 인간이 겪는 고통 그 자체는 본질적으로 부정적인 것으로 결코 쉽게 미화될 수 없다. 그 러나 토마스에 따르면 악에 대해 슬퍼하는 일은 악이 아니며, ‘의지와 이성의 올 바름에서 오는 고통’은 오히려 혐오스러운 것으로부터 피하게 해주기 때문에 유 익하다. 따라서 우리는 고통의 부정적 측면만을 강조해 이것을 무조건 없애버리 는 데만 몰두하거나, 고통의 유용성만을 강조해 이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라 고 타인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고통받는 이들이 아직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고 받아들이 지 못한 상황에서 과장된 응보론적 해석이나 변신론을 적용하면 고통받는 개인 들에게 2차적인 가해를 저지를 수 있다. 따라서 보다 나은 방법은 그 고통받는 이 가 한탄이나 질문을 통해 표현하려는 불확실성과 불평들을 함께 견뎌냄으로써, 그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는 대답을 찾아내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더 나아가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 고통이 유용하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지양( 止揚) 될 수 없는 고통’과 ‘지양되어야만 하는 고통’을 구분해 야 한다. 인간의 유한성에 뿌리를 둔 지양될 수 없는 고통은 어떤 형태로든 수용 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인간이 성숙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이기심, 무관심, 악 의로 인해 빚어지는 고통은 지양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이런 지상에서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서, 인간의 역사 안에 서로의 생명을 함께 나누 는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박승찬 서울대학교 식품공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중세 철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수환 추기경연구소장과 한국가톨릭철학회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알수록 재미있는 그리스도교 이야기 1,2』, 『아우구 스티누스에게 삶의 길을 묻다』, 『중세의 재발견』, 『서양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 수용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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