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이란 무엇인가 6 | 고통은 진정한 길을 열어준다

고통은 진정한 길을 열어준다

노먼 피셔 미국의 선(禪) 수행자

 

고통은 삶을 전환시킬 동기를 부여하고 통찰과 힘을 준다
40년 지기 친구이며 영혼을 함께 나누었던 랍비 앨런이 갑자기 저세상으로 갔 을 때 그 슬픔과 고통은 영원히 가슴에 남을 것 같았다. 내가 앨런 대신 할 수 있 는 일은 무엇일까? 나는 그를 잃은 고통을 더 느끼고 싶었다. 세상 곳곳에서 아파 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더 느끼고 싶고, 그들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싶다.

우리는 고통스러워야 할까?
우리는 어려운 때를 피할 수도 고통을 피할 수도 없다. 고통은 신체적 정신적 아픔을 말한다. 고통은 행복의 반대로 보인다. 행복이 있을 때 고통은 없다. 고통 이 있을 때 행복은 없다. 너무도 나쁘고 불쾌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좋은 사람이고 똑똑하다면 고통은 아예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많은 사람이 믿고 있다. 불교도 좀 하고, 명상도 하면서 제대로만 하면 별 고통 없이 긍정적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통은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 일상의 경험이다
주변을 보면 불안이 있다.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는 것은 고통이다. 무시하려 해도 고통을 피할 수는 없다. 고통은 마음속에 콱 박혀 삶을 조건 짓는 요인이 된 다. 그러므로 고통은 일종의 실수이고 소소한 문제라서 약간의 명상과 긍정적 자 세로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큰 자기기만이다.

두카(Dukkha)
문제는 ‘고통’이 매우 극단적이고 희귀한 것처럼 느껴지는 단어라는 데 있다. 팔리어로 고통을 말하는 두카는 흔히 고통으로 번역되지만 때로는 ‘불만족’, ‘스 트레스’로 번역되기도 한다. 두카는 모든 것이 무상하고 잡을 수 없고 실제로 알 수 없다는 심오한 사실을 느끼는 의식적인 또는 무의식적인 심리적 경험을 말한 다. 우리는 삶을, 사랑을, 자신의 정체성을, 소유물을 알 수 있고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럴 수 없다. 실제와 삶에 대한 기본적 인간의 접근법이 바로 두카로 서 불안과 좌절의 체험이다. 그렇게 볼 때 두카는 인간 의식 자체를 지칭하는 다 른 이름일 수도 있다. 두카는 실수가 아니다. 고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두카는 우리 삶의 매 순간이며 매 경험이다. 명상 수행의 위대하고 아름다운 비밀은 바로 우리가 두카를 평정심으로 경험 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평정심이 행복의 비결 아닌가? 두카를 없애려 한다 면 삶을 없애려 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두카를 평정심으로 받아들이면 두카는 더 이상 두카가 아니다. 무상은 삶의 좌절스러운 사실이나 평정심과 함께할 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기도 하다. 고요함과 평화로움에 아름다움이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그래서 마음이 세상과 함께하는 것에 아름다움이 있다. 삶에서 분주히 뛰고 일하며 춤추고 가족이나 사업을 일구어야 할 때가 있다. 동시에 조용한 시간, 사랑하는 사람들과 천천 히 대화하는 시간, 지나간 삶에서 본것들을 반추해야 하는 시간이 있다. 그런 시간 이 올 때 끔찍한 것이 아니라 아름답고 달콤하게 받아들인다. 삶을 놓아버려야 할 때도 “그래, 숨을 들이쉰 후에 내쉬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야!”라고 느끼면서.

고통은 실수가 아니다
불교 우주에는 육도가 있다. 이 중 천신, 수라, 인간, 축생, 아귀계는 끝없는 욕 망으로 정의되고, 지옥계는 끝없는 아픔과 고통으로 정의된다. 천신계에선 모든 것이 완벽하다. 통증도 육신의 해체도 없다. 모든 것이 천상의 경험이다. 멋질 것 같다. 하지만 이곳에선 즐거움에 중독이 되므로 딱히 태어나기에 좋은 곳은 아니 다. 인간계가 가장 좋은 이유는 고통이 알맞게 존재해, 해탈을 추구할 동기를 줄 정도로 적절하고, 구도의 길에 집중하지 못할 정도로 심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통을 제대로 대할 때 수행길에 플러스가 된다. 따라서 고통을 완화 하거나 제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여 삶에 활용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고통은 실수도 아니고 문제도 아니다. 당신 잘못도 아니고 내 잘못도 아니다. 고통은 인간 삶의 중추다. 고통이 있어 우리는 영적으로 우리 삶을 제어할 동기와 비전과 힘을 얻는다. 시기가 어려울수록 우리는 고통을 직면해서 내 것으로 들이고 의미를 찾아 새 로운 삶으로 가는 길을 고통이 열 수 있게 해야 한다. 고통스러울 때 고통에 저항 하며 발버둥치지 않고 호흡과 내 몸과 함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차리 는 것보다 더 유익한 일은 없다. 그것이 새로운 길의 시작이다.

고통과 가능성
랍비 앨런은 삶의 재정비에 고통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재정비 후 우리는 강해진다. 그렇다면 에덴동산에서 추락한 이후 우리가 살아온 역사는 불가피했던 동 시에 우리가 겪어야만 했던 것일까? 우리는 모두 고통을 없애버릴 생각만 한다. 고통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은 희망을 버린다거나 어떤 것들이 달라지 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받아들임과 희망 사이에 모순은 없다. 실은 그 둘은 연 결되어 있다. 받아들임은 체념이 아니다. 받아들임은 있는 그대로의 조건에 활발 히 참여하는 것이다.물론 절망에 가까운 희망도 있다. 무언가 나쁜 일이 일어나면 영원히 망할 것 같고 그래서 좋은 결과를 간절히 바란다. 이런 희망은 효과가 별로 없는 것이 받 아들일 수 있는 결과가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조건을 쾌활한 기상으로 받아들임에 기반한 희망이 있다. 받아 들임은 이런 희망을 강화해준다. 물론 치료를 위해 객관적인 것들을 다하고, 다른 치료법도 시도하고 환자를 편안하게 해준다. 좋은 결과를 희망하며 기도한다. 고 통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며 그리할 때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사랑으로 직 면할 능력을 키울 수 있다.

불필요한 고통
필요한 고통이 있다. 동시에 절대적으로 불필요한 고통도 아주 많다. 매일 느끼 는 많은 고통이 실은 불필요하다. 우리 삶에는 어쩔 수 없는 고통이 많이 내재하 고, 그저 기다리기만 해도 그런 고통은 온다. 여기에 무심코 한 선택으로 고통을 더할 필요는 없다. 마음이 과거나 미래의 문제, 잠재적 위험에 매달려서 고통을 더할 필요는 없다. 내가 오늘 15가지를 처리하려 했는데 13가지밖에 못했다면 나는 불만족스럽고 고통을 느낀다. 이 고통은 내가 만든 것이다. 나의 하루가 나의 삶이 어떠해야 한 다는 관념이 있는데, 나의 하루와 삶이 그리되지 않을 때 나는 불행해할 이유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이유는 내가 만들었다. 내가 더 만들지 않아도 불행할 이유는 이미 많다. 실제의 고통, 기본적 고통은 대하기 어렵지만 유용하다. 하지만 내가 만든 여분의 고통은 사소해, 내 삶을 밝히기는커녕 더 짜증나게 한다. 바꿀 수 없는 어떤 것을 기꺼이 견딜수록 상황이 용이해진다. 명상이 도움이 된 다. 수행을 더 할수록 알아차림이 늘어난다. 알아차림이 늘어날수록 스스로 불필 요한 고통을 만들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고 다른 것을 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좌복에 앉아서 이 모든 것을 분명히 볼 수 있다. 허리가 아프다고 가정해 보자. 몸을 비틀며 불평을 시작한다. 지금 이 몸에 갇혀 있는 것이 어떤 사람 때문 인 것처럼 불평을 하거나 자신에 대해 불평할 수 있다. 마음이 질주하고 그때 통 증은 더 심해진다. 하지만 그저 조용히 앉아 고통을 기꺼이 경험하면 실은 그리 나쁜 것도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견딜 수 있고 때로 고통이 사라지기도 한다. 견 뎌야 할 통증을 견뎌내는 데 존엄성이 있다. 저항하며 개선할 수 없는 것을 개선 하려 할수록 사태가 악화됨을 알 수 있다.
불필요한 고통 만들기를 멈출 때 주변에 있는 진짜 고통을 볼 수 있다. 모든 가 짜의 불필요한 고통이 우리 주의를 앗아가 진짜 고통을 보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진짜 고통은 훨씬 더 다루기 어렵다. 끔찍하게 아프다. 하지만 우리를 세상 모두 와 연결해주기에 그런 면에서 진짜 고통도 괜찮다. 고통을 피하고 싶기 때문에 우 리는 무감각해지고 고립된다. 하지만 그런 무감각과 고립 때문에 최악의 감정을 느낀다. 불필요한 고통을 뚫고 나아가 사람들과 연결될 때 어렵고 고통스럽지만 상황은 나아진다. 남들을 염려하고 아끼는 진정한 고통에 마음을 열 때 우리 기분 은 나아진다.

발췌・번역|로터스불교영어연구원
● 이 글은 『라이언스 로어(Lion’s Roor)』 2017년 1월 20일자에 실린 내용 중에서 발췌, 번역한 것이다.

노먼 피셔(Norman Fischer) 1946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 조동종 스즈키 순류 선사의 가르침을 받고 선맥을 이어받았다. 샌프란시스코 젠 센터에서 1995년부터 2000년까지 주지를 지냈고, 2000년에 선불교 의 가르침을 서양 문화 토양에 맞게 변화시키고 적용하는 에브리데이 젠 공동체를 설립해 수행을 지도하고 있으며, 구글 의 명상 프로그램 ‘서치 인사이드 유어셀프’를 자문했다. 2017년 방한해 법회를 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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