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철학과 불교 이야기|고대 자연철학자들의 사상 ③

아낙시만드로스
만물의 근원은 아페이론이다

박찬국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해시계를 들고 있는 아낙시만드로스

 

우리는 앞에서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 연철학자들이 무수한 사물들로 이루어 져 있고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도 통일적인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세계 에 대한 경이에서 출발한다고 말했다. 탈 레스와 마찬가지로 아낙시만드로스 역 시 이러한 통일적인 질서가 비롯되는 만 물의 근원에 대해서 묻는다. 다만 탈레스 가 만물의 근원을 물에서 찾고 있는 반면에, 아낙시만드로스는 그것을 무한자에서 찾고 있다. 탈레스처럼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본다면, 물과 정반대되는 성 질을 갖는 불이 물에서 어떻게 나올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우리가 자연에서 보는 많은 사물들은 이렇게 서로 융화하기 어려운 대립적인 성질이 있다. 자연에서 보는 사물들은 각자의 한계를 갖는 유한한 것들이다. 한정 된 공간과 시간 속에서 살고 한정된 성질을 가지면서 사물들은 상생하기도 하지 만 서로 갈등하고 대립하기도 한다. 이러한 모든 사물이 비롯되는 근원은 이 같은 한계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무한하 고 특정한 성질이 없으면서도 모든 것이 그것에서 비롯되는 것이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아낙시만드로스는 만물의 근원을 아페이론(apeiron), 즉 특정한 한계를 갖지 않는 무한자라고 불렀다. 아낙시만드로스는 무한자와 유한자의 이러한 구별을 통해서 서양 철학의 역사 를 크게 규정하게 되는 중요한 사유 틀을 제시한 셈이다. 이 무한한 것을 플라톤은 최고의 이데아인 선의 이데아라고 부르며, 아리스토텔레스는 부동의 원동자로서의 신, 중세 기독교에서는 만물을 창조하는 인격신, 스피노자는 능산( 能産) 적인 자연, 헤 겔은 절대정신, 하이데거는 존재라고 부른다. 탈레스에게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물 이 ‘신적인 것’이었던 것처럼, 아낙시만드로스에게도 아페이론은 ‘신적인 것’이었다.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을 이해하는 데는 스피노자의 능산적 자연을 살펴보 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능산적인 자연은 만물을 낳은 근원적인 생산력이다. 이러 한 근원적인 생산력으로부터 모든 것이 생겨나지만 죽음과 함께 그것들은 다시 이것 으로 돌아간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근원적인 생산력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격신 처럼 만물과 분리되어 있는 사물 내지 실체와 같은 것이 아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그것은 또 하나의 유한한 사물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만물을 떠나서 존 재하지 않으면서도 그것들과 동일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것들을 포괄하는 것이다. ‘만물 속에 깃들어 있으면서도 만물을 포괄하는 것’이라는 언뜻 보기에 모순적 인 성격이 스피노자가 말하는 능산적인 자연이고 또한 아낙시만드로스가 말하는 아페이론이다. 15세기 독일의 철학자인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는 신을 이러한 ‘반 대의 일치’라고 보았다. 무한자로서의 신에서는 모든 모순이 통일된다. 신은 미세 한 모래알과 같은 것에도 깃들어 있으면서도 모든 것을 감싸 안으면서 모든 것에 질서와 통일을 부여하는 최대의 포괄자다. 아낙시만드로스는 만물의 근원뿐 아니라 사물들이 변화되는 방식에 대해서도 관 심을 가졌다. 그는 차가운 것과 뜨거운 것, 마른 것과 축축한 것 중에서 어느 한쪽이 잠시는 우세할지라도 종국에는 끊임없이 균형이 회복된다는 데 초점을 맞춘다. 아 낙시만드로스가 보는 소멸은 자신의 죄에 대한 값을 치르는 것이다. 세계 속의 모든 사물은 더 오랫동안 존속하려고 하면서 다른 사물에게 배정된 시간을 침해하려고 한다. 바로 이 점에서 모든 사물은 죄를 짓는 것이며 그에 대한 벌로 죽음을 맞는다. 진화론이나 쇼펜하우어와 같은 철학자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모든 사물을 규정하는 근본적인 욕망은 생존에의 욕망이며 어떻게든 자신을 존속시키고 싶어 하는 욕망이다. 이러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사물에게 자연을 지배하는 필연성 이 소멸을 선고하면서 새로운 사물이 생겨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한다. 이러한 사 실을 고려해보면 아페이론은 단순히 무한한 것일 뿐 아니라 만물을 자신 내의 필 연성의 법칙에 따라서 지배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어떤 사물이 자신에게 마 련된 시간보다 더 오래 존속하려는 것은 다른 사물에게 죄를 짓는 것일 뿐 아니 라 사실은 아페이론이라는 신적인 근원에 대해서 죄를 짓는 것이다. 아페이론은 필연적인 법칙에 따라서 움직이는 무한한 창조적인 생명력이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이러한 사상은 종교적인 구원의 사상으로 용이하게 전환될 수 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사물은 불교가 말하는 것처럼 유한하고 덧없다. 이러한 유한성과 덧없음에서 우리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아낙시만드로스는 그리스 신화나 기독교와 같은 종교들이 말하는 내세에서 거주할 영원불멸의 영혼 같은 것 은 없다고 본다. 개체는 그것에게 주어진 시간이 다하면 소멸해, 다시 그것의 근원 인 아페이론으로 돌아갈 뿐이다. 그것은 아페이론 안에서 개체로서 영속하는 것이 아니라 소멸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유한함을 한탄할 것이 아니라 아 페이론에 의해서 주어진 필연적인 운명으로서 흔쾌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렇게 해석하면 아낙시만드로스의 사상은 무상함을 깨닫고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불교의 가르침과 상통한다. 불교 역시 만물의 무상함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출구를 불멸의 영혼 같은 것에서 찾지 않고 있다. 아낙 시만드로스의 사상은 기술을 고도로 발달시킴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무한히 연장 하려 하고 자연을 지배하려는 현대인들과 현대 기술 문명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 을 수 있다. 20세기의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대지의 법칙은 각각의 사물들에게 부여된 가능성의 권역에 서 사물들이 출현하고 소멸하도록 하면서 대지를 보존하고 있다. (…) 새는 자신 에게 가능한 삶의 방식을 넘어서지 않는다. 꿀벌은 자신에게 가능한 삶의 방식 속 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기술을 통해서 도처에서 활개를 치고 있는 인간의 의지[탐욕]를 통해서 대지는 피폐하게 되고 남용되고 변형되고 있다. 그러한 의 지는 대지로 하여금 가능한 것의 권역을 넘어서도록 강요하며 불가능한 것으로 까지 나아가게 한다. 기술의 발달과 함께 많은 발명과 급속한 혁신이 상당히 성공 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기술의 성취를 통해서 불가능한 것조차도 가 능하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언뜻 보기에 고색창연하고 막연하기만 해 보이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사상은 2,500여 년 후에 하이데거의 사상에서도 이렇게 여운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하이 데거도 아낙시만드로스와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연속성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 는 『근본개념들(Grundbegriffe)』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아낙시만드로스의 잠언’을 상세히 분석하고 있다.

박찬국 서울대학교 철학과 졸업 및 동 대학원 철학 석사, 독일 뷔르츠부르크대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호 서대 철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 철학과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 『니체와 불교』, 『원효와 하이데거의 비교 연구』, 『인간과 행복에 대한 철학적 성찰 : 실존철학의 재조명을 통하여』, 『쇼펜하우어와 원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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