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재가열전|내가 만난 붓다_이취현 황산덕 거사 (2)

취현 황산덕 거사 (2)
이 시대의 대보살행자

구상진 대한불교진흥원 이사・헌법을생각하는변호사모임 회장

 

불교 관계 활동
지난 호 취현 거사의 불교와의 인연과 불교계 인연 이야기에 이어 이번 호에서 는 취현의 불교 관계 활동과 불교 저술 등에 대해 짚어본다.

(1) 청년 불교 운동
1955년경 비구 대처 분쟁을 겪으면서 불교계의 체질 개선을 위해서는 젊은 불 자들을 키워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고 종묘 옆 대각사를 본거지로 해 ‘대각회’라는 명칭으로 청년 불교 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청년들은 실존주의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먼저 박종홍, 고형곤 등 철학 교수들을 초빙해 실존주의의 내용과 실존주의 사상이 얼마나 불교에 접근하고 있는가에 대해 강의하고, 마지막으로 청담 스님 법문을 통해 본격적으로 불교란 어떤 가르침인가를 설명하는 형식으로 강연회를 진행해 청년들을 모았다. 이 운동에는 대법선 보살과 일본에서 공부한 이종익 거사도 활발하 게 활동했는데, 그 결과 대각사의 일반 신도가 줄고 청년들만 모이게 되자 대각사에서 달갑지 않게 여겨 쫓겨나게 되었고, 선학원 경국사 등을 떠돌다 해산되고 말았지만 그 불씨는 계속 이어져 룸비니 활동 등으로 발전했다.

중고교 학생을 중심으로 발족된 룸비니는 원광 법사와 같은 서원으로 화랑정신을 다시 일으켜 나라의 인재를 키우겠다는 이홍철 법사( 포공 스님) 의 원력으로 1960년 9월에 창립되었다. 취현은 총장, 청담 스 님이 초대 종정 겸 지도법사(2 대 서옹, 3대 성철) 를 맡았고 차츰 대학생부, 일반부까지 확대되었으며, 1971년에는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아 운현궁 남쪽에 회관을 건립했 다. 지금은 사단법인으로 운영되고 있다.

(2) 부처님 오신 날 공휴일 제정
부처님 오신 날 공휴일 제정이 용태영 변호사의 법정 투쟁 등 많은 불교 신자들 의 염원이 되고 있던 1975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 비상대책회의 후에, 음 력 4월 8일을 공휴일로 정하는 안을 국무회의에서 의결해 올리면 무조건 결재하겠 다고 자신의 의중을 밝혔다. 국무위원 중 인도 사람이 교주라는 이유의 반대가 있었는데, 취현은 유대인이 교 주인 종교는 공휴일이 되어도 되느냐고 반박했다. 그러자 크리스마스는 일제 때부터 공휴일이었다는 주장이 나왔고, 취현은 당시 12월 25일은 대전천황의 생일이었기 때문이었고 대전천황 제사가 없어진 이후로는 공휴일에서 제외되었다고 알려주었 다. 그러자 이번에는 경제 건설을 이유로 반대했고, 취현이 경제가 그렇게 걱정된다 면 크리스마스도 없애자고 하자 당시의 김종필 총리가 “5월 5일을 공휴일로 하자는 의견이 많으니 어린이날과 석탄일을 함께 공휴일로 하면 타종교의 반발도 줄어들지 않을까”라고 중재 발언을 해 부처님 오신 날을 공휴일로 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3) 대한불교진흥원 이사와・이사장
취현은 ( 재) 대한불교진흥원이 발족한 직후인 1975년 8월 22일에 이원경 초대 이사의 후임 이사가 되었고, 1980년 11월 구태회 초대 이사장의 후임으로 제2대 이사장이 되어 1989년 10월 19일 별세할 때까지 이사장으로 인연을 맺었다( 이후 중원 장상문 거사가 3대 이사장이 되었다).취현은 이항녕, 이기영, 장상문 등 이사들과 단합해 10・26 이후 까다로운 상황 에서도 대한불교진흥원을 안정시키고 발전적으로 운영했다.또한 『통일법요집』과 『통일불교성전』, 『설법자료집』 등을 간행하고 『불교성전』 5만 부를 새로 편찬 간행해 전국에 무상 배포했으며, 불교회관( 현재 서울 마포의 다보 빌딩) 매입과 불교방송국 건립 계획을 수립해 후임 이사장이 이를 완수할 수 있게 준비했다. 공군본부와 육군 제6사단 법당을 건립하고 법요집 10만 부를 지원했으 며, 비원 앞 가든타워와 구로공단에 시민선방을 개설해 참선 지도와 함께 신행 상 담과 교리 강좌를 개최했다. 조계종의 전국신도회, 청소년교화연합회, 불교아동 문학회, 대한불교청년회, 대학생불교연합회, 예일극단, 한일불교교류협회, 동대부 중, 만해백일장, 역경원, 한국불교학회, 한국불교연구원, 불교문화원 등을 지원하 는 등 많은 불사를 추진했다.

불교 관계 저술
취현은 불교에 관해 많은 글과 저술을 남겼는데, 대표적인 것을 살펴보면 61p 아 래 정리한 것과 같다. 이 중 『나가르쥬나 중론송( 中論頌)』 에서는 서양 법철학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했 는데, 법의 본질을 원론적인 것에서 끊임없이 맴돌며 폐쇄적인 사고의 틀에 갇혀 있는 서양 법철학에 대해 “철학의 완성은 무엇(what)이 아닌 어떻게(how)에서 찾 아야 하고, 이것이야말로 미혹에서의 해방이라고 주장하면서 만물이 서로 원인 이 되어 생겨나지만 주체가 되는 성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유(有) 가 되기도 하고 무( 無) 가 되기도 함으로 불생불멸이라는 중론의 공사상이야말 로 서양의 날카로운 분석철학에 맞설 수 있는 논리의 마도( 魔刀) 이다”라고 했다.『삼현학( 三玄學)』 은 1958년부터 건국대의 동방연구소에서 범부 김정설 선생을 모시고 20~30명의 석학들이 모여 공부한 결과를 집대성한 것으로서 주역, 노자, 장자 삼현학을 현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옮긴 것이다.『창조주( 創造主) 의 복귀( 復歸)』 는 취현의 독창적 저술로 자기비판의 책 『자화상』 에서 시작되었고, 1971년 불교를 기본으로 한 최초의 사상집 『무엇이 돌아오나』, 1975년의 삼성문고 『복귀』를 거쳐 1984년 『창조주의 복귀』로 완성되었다.복귀사상의 원래 목적은, 사람의 마음이 밖으로 나타날 때 ‘어떻게’ 그것이 발휘되 어 사회에 도움이나 혹은 해악을 끼칠 수 있는지 주역의 12괘를 풀어가면서 해명하 는 것이었다. 그 길잡이는 원효 스님의 사상, 즉 부처님의 가르침인 주인공 마음이다.

◦ 취현의 글과 저술
‘나는 왜 불교를 믿게 되었나(1953년 5월 『고대신문』)’, ‘나의 재가 수행(1963년 11월 『불교신문』)’, ‘불탄의 현대적 의의 (1967년 5월 『경향신문』)’, ‘원효 사상 서평(1967년 12월 『신동아』)’, ‘사리(1972년 1월 『창조』)’, ‘불심으로 바꾸자(1972 년 7월 『한국일보』)’, ‘조계종 중앙종회에 부쳐서(1972년 12월 『주간종교』)’, ‘사찰 재산의 공동 운영(1973년 1월 『주간종 교』)’, ‘승(僧)은 심산(深山)에서 더욱 빛나더라(1973년 2월 『주간종교』)’, ‘사찰 재산의 운영(1973년 4월 『주간종교』)’, ‘含 章可貞(1973년 7월 『주간종교』)’, ‘마음과 그 대상(1973년 7월 『주간종교』)’, ‘바라만 보고 있으면 된다(1973년 8월 『주 간종교』)’, ‘如指甲上士(1973년 9월 『주간종교』)’, ‘남무묘법연화경(1973년 9월 『주간종교』)’, ‘조계 종단은 주목받고 있다 (1974년 7월 『주간종교』)’, ‘불교인의 평화론(1974년 12월 『아카데미논총』)’, ‘현대인과 불심(1979년 5월 『서울신문』)’, 불교와 정치 법률사상(1982년 7월 『현대사상』)’, ‘구원의 불교적 의미와 본질(1984년 1월 『불교사상』)’, ‘원효를 읽으며 법 철학 다시 음미(1984년 2월 『한국경제신문』)’, ‘다음에는 무슨 옷으로 갈아입나(1984년 4월 『주간종교』)’, ‘창조적 삶을 위 하여(1984년 4월 『불교사상』)’, ‘현실의 바탕 위에서(1984년 12월 『불교사상』)’, ‘불법에서 얻은 마음의 경지(1984년 12 월 『불교사상』)’, ‘무엇이 참으로 우상숭배인가(1985년 1월 『불교사상』)’, ‘불교와 법철학(1986년 6월 『법륜』 ; 1987년 4 월 『아카데미논총』)’, ‘진여와 창조(1987년 7월 『불교사상』)’, ‘윤회에 이끌린 불교에의 관심이(1987년 9월 『불교사상』)’, ‘나와 불명(1988년 2월 『불교사상』)’, ‘믿음이 이제는 후퇴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져서(1988년 4월 『불교사상』)’ 등 주옥같 은 글과 『불교교과서(佛敎敎科書)』(동국대학교, 1967), 『나가르쥬나 중론송(中論頌) 번역』(서문문고, 1976), 『삼현학(三玄 學)』(서문문고, 1978), 『여래장(如來藏)』(동대역경원, 1980), 『원효열반종요』(동대역경원, 1982), 『창조주(創造主)의 복 귀(復歸)』(양영각, 1984) 등의 저서를 들 수 있다.

『여래장( 如來藏)』 은 원효 스님의 「대승기신론」, 「금강삼매론」 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법학을 연구했지만 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은 결국 사람의 마음이라는 결론에 도달했고 그러한 깨달음을 얻게 한 원효 스님에게서 무엇을 배웠는가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이 방면의 석학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기 위한 글이라고 이야기한다. ‘범부 와 성인의 차별은 오직 용심( 用心) 에 있다. 그러기에 중생과 부처는 같은 것도 아니 지만 다른 것도 아니다’라는 원효 스님의 글을 인용하며 시작된 『여래장』은 그 누 구보다 젊은 학생들이 읽어주길 바란다는 간절함도 내비친다. 이미 출간된 『복귀』 가 2부라면 『여래장』은 『복귀』를 이해하기 위한 1부에 해당된다고도 했는데, 여래 장은 실제로 젊은 불자들이 많이 읽어 1990년대까지 여러 번 재판( 再版) 되었다.이항녕은 취현 황산덕 박사 유고집 『법과 사회와 국가』의 머리말에서 “그는 지 금 갈 길을 몰라 방황하는 인류에게 인간의 본성에의 복귀를 외쳤으며, 그의 복귀 사상은 동양의 유교사상과 불교사상을 결합시켰을 뿐만 아니라 서양의 기독교사 상과의 결합도 시도하고 있어 그가 좀 더 장수하였으면 전 인류를 구원할 수 있 는 위대한 사상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뜻밖의 별세로 그 일이 이루어 지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그러나 인류 구원에 대한 그의 거시적인 경륜은 거의 수립되어 있으므로 앞으로 후학들이 살을 붙이면 그의 이상이 완성될 것으로 여 겨진다”고 했는데, 필자는 이 말이 치레로 한 헛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행적으로 미루어볼 때 그는 진실한 수행자요, 큰 깨달음을 가지고 시대를 제도하기 위해 부지런히 맹렬히 불행( 佛行) 을 하는 철저한 삶을 사셨던 분으로서, 생활 불자의 모범이다.

● 본지 지난 호[2020년 8월호, 취현 황산덕 거사(1)] 52p에 실린 사진 설명의 ‘청담 스님’을 ‘구산 스님’으로 바로잡습니다.

구상진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검사 생활을 했고, 서울시립대학교 법학과 교수 및 동 로스쿨 원장, ‘법조불교인연합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변호사로 활동하면서 ‘헌법을생각하는변호사모임’ 회장, 대한불교진흥원 이사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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