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재가열전|내가 만난 붓다

경전 속에서 붓다를 만나다

전재성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대표

아득한 잊힌 세월이 화살처럼 지나갔다. 육 척 단신의 구산 큰스님의 보름달 같은 얼굴이 지금도 조계산을 떠올리면 생 각난다. 대학에 갓 입학한 1972년 송광사 겨울 수련 대회 그때 나는 법정 스님으 로부터 월광이라는 법명을 받았었다. 너무 낭만적이라 그 법명을 결코 사용하지 않고, 어둡고 긴 실존적 고통의 터널을 지나면서 청춘을 다 보내긴 했지만, 그때 에 많은 도반들을 알게 되고 당대에 기라성 같은 큰스님을 모두 친견한 것은 지 금 생각하면 큰 복인 것 같다. 수련 대회 기간에 친견한 통도사 극락암 삼소굴의 경봉 스님의 사자 같은 모습, 해인사 백련암 성철 스님의 부리부리한 눈매를 잊을 수가 없다. 그 스님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생계를 위해 대도를 버리고 살지는 않 았는지 몹시 부끄러워진다. 지금 북한산 기슭의 창릉천에 앉아 차갑게 흐르는 물가에서 깊이 선정에 들어 눈을 감고 시각의 세계를 닫아버리고 촉각의 세계를 연다. 바람이 살갗에 폭풍의 소용돌이처럼 스치며, 몸에서 불기운을 앗아갔다가 다시 돌려준다. 스산해진 바 람이 우주를 열어 겁풍을 몰아치게 해서 만유의 목숨을 재촉하는 것 같다. 우리 세대는 불행하게도 한국전쟁 말기 저마다 다 전쟁의 폐허와 이산가족의 고통 속에서 세상에 태어난 것이니, 저 하늘에도 슬픔이 사무치는 시기에 어린 시 절을 보냈다. 일사후퇴 때 단신으로 월남한 부모님께서는 부산 아미동 피난민촌 에서 살았는데, 나는 그만 작은 방에서 네 살 때, 충격적인 큰 화상을 입어, 생사 를 헤매다 팔과 배에 큰 화상 흉터를 입고 어렸을 때는 놀림감이 되고 그 이후 사 춘기에는 깊은 우울증에 빠져 지내다가 중학교 때 생물을 가르치셨던 유응렬 선 생으로부터 참선을 배우게 되었지만, 그저 앉는 흉내를 낼 뿐 사실상 아무런 깨달 음도 얻지 못한 채, 1972년 대학에 들어가 불교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구산, 경봉, 성철 같은 큰스님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수련 대회에서 받은 깊은 감동은 현실로 돌아오면 죽음에 당면한 개인적 실존과 엄혹한 사회 정치적 환경 속에서 힘없이 부서져버렸다. 얼떨결에 1974년부터 대불련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유신 체제하에서 3개월 옥고를 치르고는 나와서 민중불교론을 쓴 것이 화근이 되 어 질병과 고통 속에서 죽음에 이를 정도의 아픔 속에서 방황했다. 그때 1976년 한 시인이 나의 글을 읽고 자신의 삶을 반성한다고 삼배를 하고, 나에게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책이라고 건네준 책이빠라마항싸 요가난다의 자서 전이었다. 그날 밤 나는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닌 것을 알았다. 그 책을 읽고, 일체의 사회적 관심을 접고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해서 기초적인 명상 수행부터 다시 해서 내면의 진리를 파악해야겠다는 생 각이 들어, 부정관의 수행과 간단한 집중 수행을 하 면서 한 해를 보냈다. 이듬해에 조계사 법당에 들렀 다가 ‘김’이라고 자신을 밝힌 한 노인으로부터 바위 위의 한 검은 점을 찾아 한 시간씩 바라보는 수행을 배우게 되었는데, 3년 만에 1979년 내 안에서 필설로 는 형언할 수 없는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되어 나는 그 것을 규명하기 위해서 대학원에 들어가 인도 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전재성
서울대학교 농화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인도철학과에서 석·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독일 본대 학 인도학세미나에서 인도학 및 티베트학을 연구했다. 독일 본대학과 쾰른 동아시아 박물관 강 사, 동국대 강사, 중앙승가대학 교수, 경전연구소 상임연구원, 한국불교대학(스리랑카 빠알리불 교대학 분교) 교수, 충남대 강사, 가산불교문화원 객원교수 등을 역임했고, 현재 한국빠알리성전 협회 대표로 있으면서 경전 번역 불사에 매진하고 있다.

 

필자(전재성)가 완역한 팔리 율장 번역서[『마하박가-율장대품』(제1권), 『쭐라박가-율장소품』(제2권)]

 

그리고 1982년 서양 철학과 인도학을 동시에 공부하기 위해 독일로 유학한 어 느 날, 어둠 속에서 나는 독일 쾰른 시의 슈타트발트를 걷고 있었다. 한밤중 칠흑처럼 캄캄한 숲속을 가로질러 별을 헤아리며 함께 걷는 두 사람이 있었다. 무슨 사연이 많아 그곳으로 흘러들었는지 모르는 나와 페터 노이야르 선 생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선생처럼 어둠을 주옥같은 부처님의 말씀으로 돌파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광활한 숲, 광활한 평야를 집 삼아 라인강을 따 라 끝없이 걷던 추억은 내 생애 최고의 기쁨이었고, 그가 어두컴컴한 쾰른 도서관 의 한 귀퉁이에서 소개해준 독일어로 번역된 빠알리 성전들은 나의 비전이 되었 다. 선생은 넝마로 기운 두툼한 북구라파의 외투를 입고 한겨울에도 나무 밑에서 잠을 잤다. 넝마를 주어 기운 두툼한 외투는 지금도 떠올리기만 해도 숙연해진다. 역사적 부처님의 희미한 그림자라도 나는 본 것일까? 나는 작은 대학의 교편을 잡다가 IMF 외환 위기로 대학이 문을 닫고 나서 그 강 렬한 추억을 잊지 못해 1997년 이후에 한국빠알리성전협회를 만들어 많은 사람 의 도움을 받아가며 부처님의 말씀을 번역해오고 있다. 번역한 경전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 다시 말해서 역사적인 부처님의 체취를 느낄 수 있었고 깊은 감동을 받은 경은 『쌍윳따니까야』에 나오는 「불행의 경」과 「행복의 경」이었다. 두 경전은 쌍으로 되어 있는데, 동일한 형식을 지닌 법문이다.

 

부처님 말씀을 번역해오면서 번역한 경전 가운데 역사적인 부처님의 체취를 느낄 수 있었고 깊은 감동을 받은 경은 『쌍윳따니까야』에 나오는 「불행의 경」과 「행복의 경」이었다.

 

「불행의 경」은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에 관한 것이고, 「행복의 경」은 ‘행복하고 부유한 사람’에 대한 것이다. 경전은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 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뭇 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 없다. 수행승들이여,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 행복의 경∶행복하고 부유한 사람」) 을 보면 그대들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때 저러한 사람이 었다’라고 관찰해야 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뭇 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 의 시작을 알 수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그대들은 고통을 경험하고 고뇌를 경험하고 재난을 경험하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수행승들 이여, 그러나 이제 그대들은 모든 형성된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사 라지기에 충분하고, 해탈하기에 충분하다.” 생각해보면, 부처님께서도 살아생전에 많은 전쟁을 겪으셨고 석가족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경험하면서 고해를 건널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진리의 힘이었음을 이 경전에서 느낄 수 있다.
그다음에 등장하는 「어머니의 경」과 「아버지의 경」에서는 부처님의 우리의 애 별리고에 대한 동체대비의 감정이 어떠한 것인가가 심오한 내용으로 등장한다.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뭇 삶들은 갈애에 속박 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 이 오랜 세월을 거쳐서 일찍이 한 번도 어머니(「 아버지의 경∶아버지」) 가 아니었던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없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뭇 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 초의 시작을 알 수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그대들 은 고통을 경험하고 고뇌를 경험하고 재난을 경험하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수행 승들이여, 그러나 이제 그대들은 모든 형성된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 고, 사라지기에 충분하고, 해탈하기에 충분하다.” 번역 불사 20~30년 동안 자식이 효도하길 기다리지 않고 떠나가신 황량한 부 모님의 묘소에 소쩍새가 운 지도 벌써 15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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