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성(性)적 욕망 5 | 해외 저널에 소개된 ‘불교와 성’_로빈 콘맨

해외 저널에 소개된 ‘불교와 성’

로빈 콘맨

티베트 불교 번역자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성을 특별히 중요한 문제로 간주하지 않는다. 사랑을나누는 것은 불교 경전에서 주요 주제가 아닐 뿐 아니라 실제로 거의 아무런 언급이 없다. 서양의 많은 종교가 이 주제를 넓고 깊게 다루는 것과 비교할 때 이는놀라운 일이다.
플라톤과 예수가 가르친 사랑의 개념을 바탕으로 해서 서양의 성 철학은 광대한 사랑의 사상을 발전시켰다.성에 대한 불교의 관점은 한마디로 ‘깨달음의 길에 별로 관련이 없는 활동’이라는것이다. 하지만 어떤 인간 활동도 수행이 될 수 있는데 말이다. 스님들은 성행위를할 수 없기 때문에 ‘성은 나쁜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불교 관점으로 정립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는 수도원 생활을 하는 수사들에게나 해당되는것이지 불교적 시각은 아니다. 승가의 계율은 재가자에게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승려가 성을 멀리하는 것은 그가 일상적 활동을 멀리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승려의 의복은 단 세 가지로 제한되고, 식사 역시 아침, 점심만으로 제한된다. 물론 불교 교리가 의복, 사업, 성이 본질적으로 나쁘거나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하기때문이 아니다. 단지 수행자는 참선에 집중하기 위해 잡다한 삶의 활동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의 수도원 생활의 개념은 불교의 사찰 생활과는 다르다. 천주교 수사가성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것은 악을 멀리하고 선을 택하는 것, 즉 신의계명을 어겨 타락한 세상을 버리고 신의 세계로 향하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모든 기독교 종파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것은 개인적 사랑을 버리고 좀 더 금욕적인 삶을 살라는 도덕적 의무 개념이다.
이런 접근법은 기독교에서도 수용한 사랑에 대한 플라톤의 분류법에 기반하고있으니 바로 성적인 사랑인 에로스와 신의 사랑인 아가페이다. 이 두 개의 사랑이서로 관련되어 있음은 플라톤도 의심하지 않았지만, 아가페는 최상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사랑, 아름다움 그 자체인 사랑이며 육체와는 관련이 없는 것이다. 성 베드로는, 사랑에 관해 쓰인 가장 아름다운 글에 속하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에로스가 아닌 아가페를 옹호하며 플라톤의 입장을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인들은 낮은 사랑을 버리거나 더 높은 사랑으로 탈바꿈하고, 성적 욕망을 ‘진정한 사랑’으로 ‘신의 사랑’으로 성장하고 전환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불교에는 이렇게 하늘의 별을 향해 오르는 사다리가 없다. 불교는 그런 대조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불자들은 그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종교에서 섹스는 빼놓아도 좋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평생 성에 적극 관여하고 또 성 때문에 혼란스럽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어요. 부처가 되기 위해 모든 철학적 난제를 다 제거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서양의 도덕에서 이토록 중심을 이루는 주제에 대해 불교 철학자들은 어떻게아무런 의견이 없이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일까? 그 원인은 불교가 정체성을 정의하는 방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유대교는 성을 가장 다산적인 활동으로 이끌어가는 규제에 관심이 많은데 그 이유는 셈족의 종교에서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잘 파악하고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아는 첫 단계가 바로가족을 아는 것이며, 아버지를 모른다면 자신의 가족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런관점에서 볼 때 결혼의 목적은 성적 활동을 규제하는 것이다. 규제 없이 방임했을때 개인의 정체성을 앗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불교적 맥락에서 정체성은 가족에서 나오지 않고, 전생이나 혹은 수행자 공동체의 일원이 됨으로서 나온다. 최초의 제자들이 승려가 되었을 때 그들은자신이 속한 계급과 가부장적으로 정의된 가족을 떠나 붓다의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이 사실이 불교에서 매우 중요하며 「보성론(Uttaratantra Shastra)」에서는 불성자체를 ‘가족’이라 부르고 있다. 이 가족이 중요한 것이기에 그리고 스승에서 내려오는 법맥이나 전생이 개인의 정체성에 중요한 측면이기 때문에, 가족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성과 결혼은 규제할 필요가 없다.

물론 불교 논서에서도 성적 규칙을 명시한 곳이 있다. 우리가 그 부분을 논하지않는 것은 그 금지 조항을 진지하게 여기기 어렵고, 미온적으로 보이며 독특한 표현법이 난무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빠뚤 린포체(Patrul Rinpoche)는 저서 『나의 완벽한 스승의 말씀(The Words of My Perfect Teacher)』에서 몇 가지 성적 규칙을 설했다.“온당치 못한 섹스를 해선 안 된다: 이것은 낮 동안의 간음과 자위행위를 포함한다.” 빠뚤 린포체는 자위행위의 부정적 업보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말했다. 숙고해보아야 할 부분이다.반면 불교 탄트라는 신체적 성행위를 매우 강조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서양 학자들을 몇 세대 동안 좌절시키고 혼란시켰던 오해에서 비롯했다. 자비 하나만 두고 생각해도 그들의 관점을 수정해야 함을 알 수 있다. 본래도 혼란스럽고복잡한 개인의 성생활을 영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성의 불가피한 복잡성을 불자들의 수행도로 이동해 적용시킨 것이다.
불교 탄트라를 읽는 서양인들의 문제는 우화와 비유를 글자 그대로의 의미와 구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불자들은 그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종교에서 섹스는빼놓아도 좋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평생 성에 적극 관여하고 또성 때문에 혼란스럽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어요.부처가 되기 위해 모든 철학적 난제를 다 제거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19세기에 서양은 힌두교와 불교의 탄트라를 발견했는데, 그것이 서양의 연금술처럼 평범한 것을 영적인 것으로 변환시키는 길이라고 이해했다. 탄트라의 도상은 다수의 머리와 팔다리를 가진 간음하는 신들을 포함했고(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의 성기는 실물에 가까웠다), 아마도 이 때문에 서양 학자들이 탄트라가 섹스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런 오해는 이후 서양에서 유행처럼 부상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1970년대에는 탄트라의 섹스는 단지 우화적 비유법이며, 환상적 형태를 가진 몸으로표출한 상징적 암호라 할 수 있는 절대적 형이상학적 관념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관례적인 일이 되었다. 하지만 1990년대에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성적 자유주의에 대한 옹호를 탄트라에서 찾으면서 탄트라 도상이 성에 관한 것이라는빅토리아 시대적 오해가 다시 유행의 물결을 탔다. 성적인 모습을 묘사한 탕카는, 살아 있는 동물을 희생하거나 인육을 먹는 분노존을 묘사한 탕카처럼 우화적인 것일 뿐이다. 이런 일들이 1퍼센트라도 글자 그대로의 의미라면 불교는 분노하고 성적으로 흥분한 광인들의 종교가 될 것이다. 동시에 서양 종교가 성적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도 동일한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 「아가(雅歌; The Song of Solomon)」는 실로 섹시한 작품이다. 많은 노래에서 여성이 연인을 찾아다니며 그리워하고 마침내 그를 만나 사랑의 합일을 이룬다는 내용을 말한다. 십자가의 요한은 자신이 지은 「영적인 찬송(SpiritualCanticle)」에서, 수사가 기도 안에서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것의 묘사에 「영혼의노래(Song of Songs)」를 모방해 사용한다. 즉 성 요한 자신은 신부가 되고, 신은 신랑이 되어 노래에 등장한다. 여기서 보이는 성적인 요소는 구도자의 갈망의 강도를 나타내고, 신과의 합일이 내포하는 관통적이고 폭발적인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지 성적 경험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화법을 이해한다면 십자가의 요한이 그럴싸한 남자들을 찾아 음탕한 여성복장을 차려입고 스페인의 시골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다고 생각할 수 없다. 암호를 이해하지 못해 우리는 성적 이미지를 사용한 불교 경전을 잘못 해석했다. 티베트 사원에서 보이는 ‘합일’ 상태의 남성존과 여성존들은 깨달음의 상태에 대한우화적 표현이고, 절대적 마음과 현상적 세계의 본질에 대한 암호적 묘사이다.티베트 불자들은 심리적 채널과 성적 경험의 관계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을수도 있다. 신체의 기맥(채널)은 호흡, 배설, 사고를 비롯한 대부분의 생리적 활동을 관장하고, 이 과학이 섹스에 대해 무엇을 발견했는지 탄트라를 충분히 파본다면 흥미로운 것을 발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내밀한 자료이고, 이런 비밀을 번역할 능력이 있는 소수의 학자들은 아직 번역에 착수하지 않고 있다.

발췌·번역|로터스불교영어연구원
● 이 글은 『라이언스 로어(Lion’s Roor)』 1999년 7월 1일자에 실린 내용 중에서 발췌, 번역한 것이다.로빈 콘맨(Robin Kornman) 전 비교문학 교수, 티베트 불교 번역자. 슬라브 문학을 전공하고, 동유럽 정부를 연구했으며, 미 의회도서관에서 국제학 부문의 펠로(박사 후 연구원)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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