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재가열전|내가 만난 붓다_구상진

취현 황산덕 거사 (1)

이 시대의 대보살행자

구상진 대한불교진흥원 이사·헌법을생각하는변호사모임 회장

 

필자는 1965년 룸비니회 학생으로 총장 설법에서 황산덕 박사[이하 취현(翠玄)이라 칭한다]를 처음 뵈었다. 또한 법학 개론의 수강 학생으로, 법조 후배로, 형사법 및 법철학의 후배 교수로, 대한불교진흥원의 후배 임원 등으로 오랜 기간 취현과 가볍지 않은 인연을 맺었지만, 갈수록 더욱 커지는 그의 진면목은 혜량이 되지않기에 이 글을 쓰면서 걱정이 앞서지만, 자필 회고록, 일기장, 유고집 등 각종 자료에 의지해 나름의 스케치를 해본다.

취현에 관한 일반 자료
취현은 1917년 6월 평양 부근에서 출생했다. ‘산덕(山德)’이란 비범한 휘자는 선친 경환(慶煥)께서 출생지 ‘양덕(陽德)’1)과 그 옆에 있는 ‘맹산(孟山)’에서 딴 것이고,호 ‘석우(石隅)’는 김범부 선생이 한반도라는 큰 돌의
한구석을 맡으라는 의미로 지어준 것이며, 불명(佛名)‘취현(翠玄)’은 1976년 경봉 스님이 내린 것이다.취현의 행적은 매우 비범하지만 많은 부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취현의 선친은 배정일 목사의 교회에다니다가 그의 딸과 결혼했고, 3.1운동으로 1년 6월의형을 받았으며, 고무신 공장으로 성공해 백인기의 별장(지금의 길상사 자리)과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을 구입했다.
1) 평안남도 양덕군, 북쪽에 맹산군이 있다.

청년 불교 운동에 뜻을 같이 했던 청담 스님과 함께한 황산덕 거사

취현은 독학으로 고등수학을 요해하고, 1934년 여순공과대학 입학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었으나 불합격해 1935년 경성제대 법문학부로 진학했다. 공산주의에 심취했다가 1937년경 앙드레 지드의 『러시아에서 돌아오다』라는 책을 읽고멀리하게 되었으며, 1938년 본과 1학년 때 명동의 다방에서 황이선(黃利善) 여사를만나면서 동성이본(異本)으로 호적 정리까지 해서 결혼했다.
고시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문학, 경제학 등을 두루 공부하던 중 남태평양으로징용 영장이 나와 이를 면제받기 위해 1942년 동경으로 가서 2개월 동안 공부해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와 사법과 필기시험에는 모두 합격했으나 면접시험에서 낙방, 1943년 최종 합격했으며, 헌병 장교로 입대하라는 강요를 거절하고 판사를 지원했으나 사상범의 아들이라 서류 접수도 되지 않았고, 1943년 10월 경북영천군청, 이후 청송군청, 경북도청에서 근무했다.1945년 9월경 미군정의 성동구청장이 되었다가 성동구청을 습격하여 성동경찰서에 구금된 일제의 징용에서 돌아온 주민들을 석방시킨 일로 파면되었고,1945년 12월 미군정청 보건후생부 법제국장으로 의사법, 약사법, 간호학교법 등을 기초했으며, 1946년 1월 미군정청 조선인 직원 일동 명의의 신탁통치 반대 성명서를 기초했다.

1946년 여름 김일성대학의 교수 초빙을 받았으며 이후 국사, 동양 철학, 불교서적을 탐독했고, 1948년 고려대학교 법정대 교수로 국제사법과 법철학을 담당했다. 1952년 서울법대 조교수가 되었으며 1956년부터 형법 강의를 맡았다.1954년 서울대 대학신문에 ‘『자유부인(自由夫人)』 작가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해정비석과 논쟁2)을 벌였고, 1957년 법학 박사 학위 논문이 통과되었으나 1960년에야 서울대 제1호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8년에는 유기천의 박사 학위논문을 비판해 논쟁이 있었다.3)
1962년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서 ‘제3공화국 헌법은 신중한 검토를 거쳐 합헌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취지의 사설을 썼다가 반혁명으로 4개월간 구금되었고, 1965년 교수직 파면 처분을 받았다가 1966년 취소된 뒤 8월 의원 해임되었으며, 9월 변호사로 개업했다. 같은 해인 1966년 12월 성균관대 법정대 교수 겸 학장으로, 1974년 8월에 총장으로 취임했다. 1974년 제24대 법무장관, 1976년 제22대 문교장관으로 취임했다가 1977년 퇴임했고, 1985년 학술원 회원, 형사법학회회장이 되었다.

2) 『자유부인』은 1954년 1월부터 8월까지 215회에 걸쳐 『서울신문』에 연재된 정비석의 장편 소설로서, 대학교수 부인이자 선량한 주부가 남편의 제자와 춤바람이 나는 내용을 포함했는데, 이에 대해, 취현은 1954년 3월 1일 서울대 대학신문에 정비석을 비난하는 글을 썼고, 정비석이 이를 반박하는 글을 3월 11일 『서울신문』에 게재하자, 취현이 『서울신문』에 작가는 “문화적 문학 파괴자, 중공군 50만 명에 해당한 적”이라고 공격해 논쟁이 사회적으로 확산되었다.
3) 유기천의 박사 학위 논문에서 한국 문화를 샤머니즘 복합체(shamanistic complex)로 설명하면서, 유불선 중 선(仙), 특히 신선(神仙)이 샤머니즘을 의미한다고 하고, “불교의 영향은 유교에 비하면 극히 미미하다. 왕건이 독실한 불교도였던사실이 고려 왕조 몇 세기 동안의 불교의 번영에 기여하였다”라고 한 점에 대해 취현은 “자기 자신과 자기 나라의 역사에 관하여 이처럼 무지해 가지고는 … 결코 지성인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지식은 있으나 그는 어디까지나 무지한 사람인 것이다”라는 비판을 했고(‘지성의 방향’, 『신태양』 1958년 10월호), 유기천이 이에 대해 “자신의 무지를 폭로하는 것도모르고 타인을 훼방하려는 돈키호테적 만용 자체가 심리학적 연구의 대상”이라고 반격하는 등 논쟁이 확산되었다.

불자가 된 인연과 신행 생활
취현은 1946년 공직 사퇴 후 당시의 성북동 집(지금의 길상사)에 남아 있던 윤덕영(순종 임금의 장인) 씨의 서고(그중에는 황제의 하사본도 포함)에서 방대한 양의 불교 서적을 접하고 학문적 호기심으로 접근했으나 후에 6·25전쟁과 함께 아들을 2명이나 연달아 잃으면서 윤회, 인연과 업 등 불교 서적에서 읽었던 내용들을 새삼생생하게 느끼게 되었고, 이후 부부 모두 불교에 기울게 되었으며, 점차 일념으로
일관하게 되었다고 한다.
귀의 후에는 평생, 외국 여행을 가서도 아침 예불을 거르지 않았고, 『천수경』과『반야심경』을 외우고 『금강경』을 1회 이상 독송했으며, 언행일치를 중시했는데,그 결과 원래의 강하고 날카로운 성정이 부드럽고 자애롭게 변했다고 한다.본격적 신행 생활은 1962년 투옥 때부터인데, 기상 시간보다 이른 새벽 4시에일어나 냉수마찰, 체조를 한 다음 정좌하고 『천수경』과 『반야심경』을 암송하고,불려나갈 때나 식사 때 빼고는 하루 종일 『금강경』 독송이나 참선으로 보냈다. 『금강경』 독송은 청담 스님과 백성욱 박사가 권했다고 한다.

취현은 출가승으로부터도 존중받았지만, 4부대중이 불교를 호지해야 한다고믿었고, 이에 어긋나는 일부 인습에 젖은 승려들의 행태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으며, 불교의 장래가 재가 불자, 특히 청년 불자에게 달렸다고 보았다.부인 대법선도 동국대 석사 논문으로 「재가 수행의 원리」라는 글을 썼고, 『복귀』의 서문에서도 젊은이들이 책을 읽어주기를 바란다고 했다.천수다라니의 원문을 밝혀서 ‘나모라다나다라야야’가 ‘나모 라트나 트라야야’,즉 ‘귀의삼보’라는 것 등을 알리고, 한글 『반야심경』에 대해서도 한문을 번역할 것이 아니라, 산스크리트어를 번역해야 한다고 했다가,4) 그것으로 깨우친 분이 얼마나 많은데 ‘지해종도(智解宗徒)’에 불과하다고 비난받은 웃지 못할 사례도 있었다.
취현이 무엇보다도 중요시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바깥세상이 아닌 내면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4) 필자의 의견으로는 예컨대 색즉시공(色不異空)은 ‘물질이 공과 다르지 않다’가 아니라 ‘육신은 덧없다’로 번역하는 것이 원래의 의미에 가깝다고 본다(김윤수 역주, 『잡아함경Ⅰ』, 운주사, 2019, 85~86p 참조)

불교계 인연
취현의 불교계 인연은 1955년 이승만 대통령의 ‘친일 승려 물러가라’는 유시에서 시작된 비구 대처 분쟁부터였다.취현은 당시 사간동 법륜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법륜사가 대처승의 본거지가되어버렸기 때문에 조계사로 절을 옮기게 되었고, 이후 비구 스님들과 종단 일을돕게 되었다.
당시 비구승 대표는 효봉, 동산, 청담, 금오, 서운 다섯 분이다. 효봉 스님은 취현과 양덕 동향 출신이었고, 황이선 여사를 속가에 두고 온 자신의 딸인 줄로 착각해 몸을 숨기려 한 일까지 있었는데, 그런 인연으로 취현 부부는 모두 효봉 스님의 유발상좌가 되었고, 황이선 여사는 1955년 효봉 스님으로부터 대법선(大法船)이라는 법명을 받고 그해 8월 비구 종단의 종권 인수 등 불교 정화 운동에 크게 기여했으며, 취현도 청년 불교 운동 등에 진력하게 되었다.
효봉 스님은 1964년 동화사에서 마지막으로 뵈었으며, 맏상좌 구산 스님, 손상좌 보성 스님과도 각별했다. 1974년 보성 스님이 주지이던 송광사에서 국보인「목조삼존불감」을 도난당했을 때 법무부장관으로서 범인 검거에 기여했고, 송광사를 원찰로 정하고 대웅전 지하에 불사리를 모시는 데에도 정성을 다했다.청년 불교 운동 등에 청담 스님과 뜻을 같이했으며, 불명 취현(翠玄)은 1976년 통도사에서 경봉 스님으로부터 받았다. 대법선을 통해 백성욱 박사와도 가까웠다.
1961년 11월부터 1967년 3월까지 주간지 『대한불교(大韓佛敎)』의 주필을 맡았으며, 장관 재직 시절에는 순시를 갈 때마다 지역 사찰을 참배하곤 했었다.다음 호에서는 취현의 본격적인 불교 관계 활동에 대해 살펴보겠다.
__다음 호에 계속

구상진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검사 생활을했고, 서울시립대학교 법학과 교수 및 동 로스쿨 원장, ‘법조불교인연합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헌법을생각하는변호사모임’ 회장, 대한불교진흥원 이사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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