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생명 윤리 | 죽음의 공포_남시중

죽음의 공포

남시중 미국 변호사

 

‘태어남이 있으니 죽음이 있다’는 붓다의 설법은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다’는연기론(緣起論)의 행간에서 읽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불법이다. 죽음은 자연의 이치이니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붓다는 말하고 있다. 하지만 동물은 죽음을 두려워하도록 생물학적으로 설정되어 있다. 사유하는 동물인 인간에겐 실존적 불안감으로 증폭한다. 언어 능력과 결합한 2차 심리 고통 ‘번뇌(煩惱)’이다.‘언어 상상(분별)’을 중단하면 번뇌는 사라진다. 생각이 끊어진 선정(禪定)에 번뇌는 끼어들지 못한다. 언어 상상으로 촉발된 스트레스 호르몬 반응이기 때문이다.붓다의 설법을 보면 2,500년 전 인물이라고 도저히 믿을 수 없다. 탈인간 중심적인 현상학적 관찰과 현대 과학보다 더 실증적인 태도를 보인다. 언어 상상(형이상학)을 하지 않는다. 재가자 설법에 나타난 현실 운용은 조화와 균형을 추구한 중도 실용주의이다. 추상적 개념을 피하고 요지 전달 이상의 말을 하지 않는다.‘태어난 모든 생명은 다 죽는다’라는 자명한 생물학적 현상을 붓다는 반복해서 말해야 했다. ‘신(神)도 태어난 존재라면 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갈애에 사로잡힌 중생은 욕망을 부정하는 ‘언어 표현(사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언어 사고로‘진리’를 볼 수 없는 이유는 욕망 호르몬(갈애)이 개념 사고를 통제하기 때문이다.본능과 욕망이 앞서고 생각은 뒤쫓는다. 죽음 이후를 극도로 두려워하는 힌두교문화권에서 붓다는 자명한 자연현상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실상을 보게 도와주려했다. 연기(緣起)와 삼법인(三法印)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은 ‘영원한 것, 즉 영생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말이다.

붓다 시대의 브라만 제자들과 비교하면, 현대인은 영생에 집착하지 않는 편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어서가 아니다. ‘죽으면 그걸로 끝이다’라는 물질주의사고에 젖어 있다. 삶은 죽어가는 생물학적 과정인데, 그 진정한 모습이 무엇인지들여다볼 여유가 없다. 나이가 들고 급히 가던 길을 잠시 멈출 때, 죽음의 공포는 바로 엄습해온다.

죽음은 필연이지만, 살면서 죽음을 두려워하면 삶을 진정으로 즐길 수 없다. 정작 문제가 되는 건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자연현상이 아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 삶에 대한 ‘집착’, 생존을 위한 다양한 ‘근심’, 그로 인한 ‘번뇌’이다. 정말 문제가 되는 이 모든 괴로움은, 그 실상을 알고 보면, ‘다 마음 상태에 불과하다’라는 통찰이 붓다의 혜안이다. 『화엄경(華嚴經)』 핵심인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란 말이 붓다가 간파한 인간 문제의 ‘심리성’을 표현하고 있다. 심리적이라고 해서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해석하면 안 된다. 내 마음이라 해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마음대로 마음먹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번뇌에 시달릴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마음은 내 것이 아니다. 불경에 나오는 ‘마음’은 객관적 자연현상을 설명하는또 다른 이름이다. ‘나’의 의지와 아무 관련이 없다. ‘의지’라고 이름 부르는 것도사실은 마음 작용이다.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현대인의 개념인 ‘심리 현상’도 아니다. 신체 호르몬 작용이다. 인간이 파충류 시대에 사용했던 원시 뇌 기능은 지금도 고스란히 우리 뇌에 남아 당시 원리 그대로 호르몬 작용을 지휘한다. ‘의지’란 언어 기능을 담당하는 신피질에서 만들어낸 착각일 뿐, 생각으로 호르몬 작용이 통제되지 않는다.

태어나고 죽는 건 자연현상이다.죽음의 공포도 자연현상이다.‘나’와 무관한 자연현상임만을 알아도 안개처럼 사라진다.

마음을 내가 통제할 수 없다면 마음 작용은 자의식의 ‘나’와 아무 상관없는 자연현상이다. 통제할 수 있는 그 어떤 자의식 기능도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가 통제하고 의지한다는 ‘환상(생각과 느낌)’이 있을 뿐이다. 현대 뇌과학이 밝혀낸이 무아(無我)의 진실을 붓다는 명상 수행으로 2,500년 전에 정확히 꿰뚫어보았다.자의식의 ‘나’는 죽음이 두려워 영생을 갈구(언어 상상)하지만 ‘나’는 애당초 실체가 아니다. ‘나’ 역시 신피질에서 하는 언어 상상이다. 생각과 감정이 마치 ‘나’가 생각하고 느낀다는 또 다른 생각과 느낌으로 흐를 뿐이다. 극장에서 스크린에비친 빛의 마술인 영화를 본다. 나는 내가 극장에 앉아 영화를 본다고 ‘생각’한다.실상은 ‘나’와 그 ‘생각’이 모두 스크린에 비친 영화의 일부이다.“그럼 누가 객석에서 영화를 보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영화라는 꿈에서 여전히 헤매고 있다. 언어 철학자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은 그런 질문을 ‘헛소리(nonsense)’라 불렀다. 질문의 전제가 착각이다. 영화의 일부인 ‘나’가그 질문을 하고 있다. ‘나’는 실체가 없는 빛의 환각이다. ‘영화 밖’을 (언어) 상상할수조차 없다. ‘색즉시공(色卽是空)’, 즉 색(色, 영화)은 공(空, 빛)하다.
만약 ‘누가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감독 촬영했느냐?’고 또 묻는다면, 붓다처럼 침묵할 수밖에 없다. 불법은 이 시점에서 언어 상상을 완전히 차단한다. 어떤말이든 또 말(언어 상상)을 하면 무조건 사도로 빠진다. 선불교 불립문자(不立文字)의핵심을 논리 철학으로 폴어낸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Whereof one cannot speak, thereof one must be silent.)”라고 말했다.‘출생 이전에 나는 어디 있었는가?’ 언어 상상으로만 ‘생각’할 수 있는 ‘헛소리’이다. 우리 뇌는 오감 경험을 언어 개념으로 재편해서 ‘현실’이라는 이 세상을 ‘재구성(simulation)’해 드러낸다. 현실 인식은 언어 상상에 지배당한다. 언어 상상을현실로 믿도록 우리 뇌는 진화해왔다.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언어 상상은 일종의 꿈이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이기도 하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 나오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란 ‘현실이 몽상이고 몽상이 현실’인 인간 현실의 개념 모순을 가리킨다. 『반야심경』에는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 구경열반(究竟涅槃)’이라는 말도 나온다. 앞뒤가 뒤바뀐 꿈이라는 뜻의‘전도몽상’에서 벗어나야 붓다의 세계인 ‘구경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이다. 위의 영화 비유로 풀면, ‘나’란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이 아니라 영화 속에서 영화를 보는 배우임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인간이 파충류를 거치며 포유류로 진화하던 시대에 신체 호르몬 체계는 완성되었다. 언어를 사용하는 영장류로 진화해온 지금도 언어 상상과 신체 경험(오감 정보)을 구분하지 못한다. 언어 작용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두뇌 신피질(neocortex)의 최신 기능이기 때문이다. 진화 역사가 20만 년도 채 되지 않는 신피질 언어 기능에서 부정적인 언어 상상이나 심리 저항을 일으키면, 원시 뇌의 시상하부(視床下部, hypothalamus)는 자동으로 스트레스 호르몬을 배출한다. 생각도 기계적이고 호르몬 반응도 기계적이다. 기계적이기에 오히려 명상 수행으로 조정할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의지’나 ‘이해’라는 언어 상상은 또 다른 원인을 제공할 뿐이다. ‘신’이나 ‘참나’를 믿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그 모든 생각(언어 상상)과 신체호르몬 작용의 연결 고리를 끊어야 한다. 명상 수행으로만 가능하다.
죽음의 공포가 없어야 죽어가는 과정인 삶의 실상을 볼 수 있다. ‘실상을 본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거나 물리적인 세상이 달리 보인다는 게 아니다. 번뇌 발생의 원리를 깨우쳤다는 말이다. 원리를 알지 못하면 진정으로 마음이 편한 삶을즐길 수 없다. 하지만, ‘윤회’니 ‘업’이니 하는 베다(Vedas) 신화를 반복하고 고루한 한자어 설법을 계속하면, 왜 수행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왜 수행이 수행이아니고 진정으로 즐기는 삶 그 자체인지 알지 못한다. 붓다가 지금 우리 시대 인물이라면 ‘업’이니 ‘윤회’니 하는 수천 년 해묵은 고대인도 베다 용어를 굳이 빌려와서 설하겠는가? 영혼, 윤회, 업 등의 개념은 고대 인도인의 언어 인식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말을 하는 한 누구도 그런 개념이 전제된 말을 벗어나 말을 할 수가 없다. 자연과학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지금우리가 자연현상에 대해 대화를 하는 건 상상할 수 없다. 현대인의 언어엔 현대인의 물질주의 사고방식과 심리주의 편견이 고스란히 전제로 깔려 있다. 붓다는 언어의 구속을 벗어나 말을 했지만 듣는 중생은 그렇지 못하다.붓다 생존 당시 유일하게 교육받은 계층은 카스트 최상위 계급 브라만이었다.
붓다를 친견한 성문(聲聞) 제자 대부분이 브라만 출신이다. 브라만교에 물든 브라만 제자의 관심은 진정한 영생(윤회 이탈)이었다. 브라만 제자들은 자명한 자연의이치를 드러낸 ‘현상학적 발언’과 자연의 순리를 거부하는 심리적 저항, 즉 언어상상에서 빚어진 번뇌에서 벗어나는 ‘방법론으로서의 설법(언어 방편)’을 구분하지못했다.팔리어 니카야(Nikaya) 초기 불경에 수록된 개별 경전, 즉 ‘수타(sutta)’ 수는 총
716,072개이다. 이 중 재가 불자에게 직접 붓다가 한 설법이 실려 있는 경전은 337개에 불과하다. 평신도 설법은 브라만 제자들이 암송하려 하지도 않았다. 초기 경전은 철저하게 브라만 제자의 관점에서 묻고 듣고 이해하고 기억해서 사후 다시 번역 재편집한 기록이다. 글자 하나하나가 모두 시공을 초월하는 붓다의 직설이라고오해하고 말 그대로 직역하면, 정작 붓다가 전하고자 한 불법은 놓치게 된다.우리 불교에 깨달음은 ‘이루는 것인가 아니면 이해하는 것인가?’ 하는 논쟁이있다. 나는 둘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명상 체험만 있고 이해가 올바르지 못하면 힌두교나 자이나교로 빠진다. 이해(언어 상상)만 있으면 논리에 집착하는 한갓 철학으로 불법을 오해하게 된다. 모든 고통이 일시에 사라지고 신비의 통찰이 열린다는 식의 ‘깨달음’은 힌두교 망상이지 불교가 아니다.균형과 조화, 중도(中道)가 우주의 이치이고 불법이다. 자연의 균형에는 생물학
적 기능인 슬픔과 기쁨 신체적 고통이 모두 포함된다. 적절한 죽음의 공포는 생명유지에 필요한 생명 의지이다. 번뇌는 버릴 수 있지만, 인간성은 버릴 수 없다. 성불(成佛)은 인격의 초월적 완성이지 괴물이 되는 게 아니다. 임종 직전 평생 탁발을 했던 마을을 붓다가 되돌아보며 “아 오늘이 마지막이구나” 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 그려져 있다. 신체적 고통에 괴로워하는붓다의 인간적인 한계까지 그대로 적어놓은 게 불교의 진정한 위대함이다.
태어나고 죽는 건 자연현상이다. 죽음의 공포도 자연현상이다. ‘나’와 무관한 자연현상임만을 알아도 안개처럼 사라진다.

남시중 성균관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Northwestern University Medill School of Journalism에서 석사 학위를,University of California Hastings College of the Law에서 법학 박사(J.D.) 학위를 받았다. 현재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에서 벤처 전문 변호사 및 투자자로 일하고 있으며, 『IT조선』에 ‘남시중 시론’을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개를 위한 변명 – 보신탕과 동물 권리론에 관한 철학적 성찰』, 『벤처@실리콘 밸리』, 『Why Meditate?』(e-book)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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