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음이란 무엇인가 5 | 선시와 불교 시에 나타난 늙음__전재강

선시와 불교 시에 나타난
늙음

전재강
안동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부처님께서 출가하시고 고행하신 이유는 인간의 근원적 고통을 넘어서기 위한 것이었다. 생로병사에서 차지하는 늙음[老]은 무상의 표상이라 무상살귀(殺鬼)라고까지 한다. 생로병사라 했으니 어쩌면 태어나는 순간부터 늙음은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이와 같이 늙음을 근원적 고통의 하나로 보았고 오늘
날 흔히 말하는 아름답게 늙어가겠다는 말 속에도 고통의 그림자는 드리워져 있다. 초기 불교와 불교 이론, 세속의 살림에서도 고통으로 받아들여지는 늙음을 선시 또는 불교 시에서는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본격적 선시에는 늙음이 없다. 오로지 본래 성불 안에서 겁
외(劫外)의 세계만이 드러날 뿐이다. 그래서 겉으로 늙음이 있는 것 같으나 안으로는 늙음이 없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불문(佛門)에 들기 전에는 온갖 고통이 다 있다. 사고(四苦), 팔고(八苦), 삼고(三苦)는 물론 삼만 팔천 번뇌가 벌어진다. 그래서 불교 시에서도 공부에 온전히 들기 전에는 늙음을 전제한다. “청춘에 백발을 더했으니 저 해가 홍안을 속였구나! 묻건대 뜬 인생사에 편안한 때는 얼마나 얻었는가?[靑春添白髮 白日欺紅顔 且問浮生事 能得幾時安(「寄朱勒圭長老」 太古普愚)]” 태고 스님께서는 늙기 쉽고 편안한 날이 적은 인생을 이렇게 지적하면서 다시 밖에서 떠돌지 말고불법에 들 것을 다음의 게송으로 읊고 있다. “깨달음은 부처이고 남쪽은 밝음일세! 가을날은 길지 않고 인생은 유한하네! 한가로이 놀며 허송세월하지 말고 바쁘고 바쁘게 참선하여 조사의 행실을 잇게나![覺爲佛南是明 秋日非多日 人生有限生 閑遊且莫虛消日 急急參禪繼祖行(「送覺南參學遊方」 太古普愚)]” 이 같은 지적은 깨닫기 전에는 늙음이 있고 죽음이 있다는 것을 갈파한 것이다. 그 때문에 부지런히 수행해 깨달음으로 나갈 것을 간절히 타이르고 있다.
그런데 늙음이 있는 세계에서 늙음이 없는 세계로의 도약을 나옹 화상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시에서 빈번하게 읊는다. “살아생전에 그릇되고 죽은 후에도 그릇되었네! 세세생생 또 거듭 그릇되었네! 만약 일념 간에 무생을 통달하면 그릇되고 그릇됨 원래부터 끝내 그릇됨 아닐세![生前錯死後錯 世世生生又重錯 若能一念了無生錯錯元來終不錯(「枯髏歌」 懶翁惠勤)]” 생사가 있는 그릇된 삶은 세세생생 거듭 그릇된 것이지만 본래 남이 없는 이치를 깨닫고 나면 그릇돼 보이는 것이 원래는 그릇된 것이 아님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그릇됨은 생사가 있는 세계이고 그릇됨이 아님은 생사가 본래 없는 세계(本無生死)이다. 이 두 세계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통달해 일 마친 장부(了事丈夫)의 눈에는 생사 이대로가 생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늙음은 시간의 문제이고 시간이 있으면 당연히 공간이 따라온다. 미망의 눈으 로 보면 시공간의 제한 속에서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지만 깨달은 눈으로 보면 거기에는 시공이 사라지고 생사도 사라진다. 시공이 사라지고 노병사가 사라진 세계를 보인 선시 작품을 보면 이를 명백히 알 수 있다. 나옹 화상은 그런 세계를“봄 가고 가을 와서 몇 년이나 되었는가? 맑고 깊은 건 밑바닥 없고 공겁 이전일
세. 매번 도태되어도 항상 이와 같으니 맑고 도도한 흐름 온전한 일체일세![春去秋來知幾年 澄深無底劫空先 每經淘汰常如此 湛湛溶溶一體全(「古潭」 懶翁惠勤)]”라고 읊고 있다.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 본 사람에게 열리는 세계에서는
나지도 멸하지도 않기(不生不滅) 때문에 늙음이 본래 없으니
늙음이 다하는 것이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된다.

가고 가을 오는 시간의 흐름이 분명히 있지만 그 자체가 근거가 없고 시간을 초월해 있다는 말을 1구와 2구에서 하고 있다. 도태되어 바뀌는 것 역시 이와 같아서 지극히 맑은 것과 도도한 흐름이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고 읊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시간의 흐름 그 자체가 그대로 시간 이전이며 일체 바뀌는 것도 이와 같
아서 맑음과 도도한 작용이 하나같이 전체를 이룬다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과 바뀌는 것밖에 못 볼 때는 늙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바뀌는 자체가 시간과바뀌기 이전임을 알면 거기에는 늙음은 물론 생사도 없음을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통찰은 「직지」의 편집자로 알려진 백운경한 선사의 선시에도 분명히 나타난다. 그는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자네. 무심하니 일체 경계 쉬어지네. 다만 본분사에 의거하니 곳곳마다 본래 이루어져 있네![飢食困來眠 無心萬境閑但依本分事 隨處守現成(「又作十二頌呈似」 白雲景閑)]”라고 해 깨달은 뒤의 삶을 이렇게 읊고 있다. 주객이 다 사라지고 본래성불의 본분사만 있어서 일체가 그대로 이루어져있다고 했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시적 자아는 밥 먹고 잠자는 일상이 바로 자유자
재한 삶이어서 거기에는 생사가 붙을 자리가 없다. 같은 작품 후반부에서 그는 “하염없는 한가한 도인은 있는 곳에 자취가 없네! 성색 속에 다녀도 성색 밖의 위의일세![無爲閑道人 在處無蹤跡 經行聲色裏 聲色外威儀]”라고 해 자취 속에 처해도 자취가 없고 성색 속에 다녀도 성색을 벗어나 있다고 했다. 종적(蹤跡)과 성색(聲色)의 세계는 생사가 있지만 도인은 그 안에서 그것을 온전히 벗어나 있음을 이렇게 노래한것이다. 이런 표현으로도 다 말할 수 없는 무생(無生)의 경지를 그는 다시 “두 개의진흙소가 싸우며 으르렁거리다가 바다로 달려들어가네! 과거 현재 미래에 헤아려도 소식이 없네![兩箇泥牛鬪 哮吼走入海 過去現未來 料掉無消息]”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불교 의식 때마다 외는 『반야심경』의 “늙고 죽음도 없으며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다(無老死 亦無老死盡)”는 뜻을 선사들은 생소한 선구로 충격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 본 사람에게 열리는 세계이며 그 세계에서는 나지도 멸하지도 않기(不生不滅) 때문에 늙음이 본래 없으니 늙음이 다하는 것이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된다.
불교 시나 선시가 보여주는 이러한 늙음의 역설적 미학은 부처님께서 수행해 깨달으시고 바라본 세계와 일치한다. 진리를 깨치기 전에는 무명으로 인해 생로사(生老死)가 있는 것처럼 보이다가 깨치고 나면 무명에서 연유한 행(行), 식(識), 명색(名色) … 생로사가 본래 없음을 본다는 논리가 선적(禪的)으로는 위와 같이 표
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홍안이 바로 백발이 되어 나를 속이니 허송세월하지 말고 부지런히 참선하라고 한 것은 깨닫기 전에는 분명히 늙음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무생을 통달하는 큰 변화를 거치게 되면 생사가 그대로 그릇된 것이 아니며 시공이 사라져 영원히 안락한 담담용용(湛湛溶溶)한 실상이 온전히 드러난다고 했다. 늙음에서 본래 늙음 없음을 보라는 선적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태고 보우 선사는 「참선명(參禪銘)」에서 “세월은 번갯불 같으니 촌음을 진실로 아껴야 하네! 살고 죽는 것 호흡에 달렸으니 아침저녁을 보장하기 어렵네![日月似

電光 光陰良可惜 生死在呼吸 難以保朝夕]”라고 수행을 간절히 요구했다.
그러나 깨달아서 얻은 영원한 대자유의 경지를 이렇게 읊었다.
이렇게 가도 본래 구할 것이 없고(恁麽行也本無求)
이렇게 가지 않아도 또한 자유롭네! (不恁麽行亦自由)
동서남북 원융한 통로에(東西南北圓通路)
나날이 자유로워 가고 머무름에 맡기네! (日日騰騰任去留)
– 「無着」
언제는 늙음이 있다고 했다가 한순간 늙음이 없다고 하니 이 역설은 불가사의
(不可思議)인가? 돌(咄)!

 

전재강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양대 교수를 거쳐
현재 안동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로 있다. 저서로 『상촌신흠문학연구』, 『한문의 이해』, 『시조문학의 이념과 풍류』,
『선비문학과 소수서원』, 『불교가사의 유형적 존재 양상』 등이 있고, 역서로 『서장』, 『선요』 등과 「불교 관련 시조의 사적
전개와 유형적 연구」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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