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재가열전|내가 만난 붓다 | 기도와 수행 속에서 붓다를 만났다__송석구

기도와 수행 속에서
붓다를 만났다

송석구
전 동국대학교 총장, 삼성경제연구소 고문

나는 아직 붓다(깨달은 사람)를 만나지 못했다. 아니 모든 사람이 깨달은 존재라는 붓다의 청정자심(淸淨自心)을 깨치지 못했다. 나는 붓다를 믿는 학자이지 붓다는 아니라는 무명에 쌓여서 구름에 덮여 있을 뿐, 구름 위의 밝은 하늘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붓다를 만나서 스스로 붓다가 되진 못했지만 가끔 때때로 붓다를 만나 희열과 환희심으로 지금까지 살고 있다. 붓다를 향해 수없이 헤매고 있지만.
각설하고, 나는 고등학생 때(1955~1958년) 실존주의에 빠졌었다. 전쟁 후의 황폐화한 사람들의 삶과 영원히 끝나지 않을 형벌에 처해진 ‘시시포스’의 신화처럼 부조리하고 본능적인 인간상, 허무, 공허, 불안, 죽음, 무상 등의 단어가 나의 삶의 한구석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래서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왜 불교학과를 지원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불교학과는 스님들만 입학한다고 알았고, 그 당시는 스님이 되고싶지는 않고, 나의 문제를 불교 철학적으로 해결하고 싶었다. 그러나 대학의 커리큘럼은 서양 철학, 불교, 동양 철학 순으로 짜여 있었다. 불교는 “마음을 깨달으라” 하고 동양 철학은 “성인이 되라” 하고 서양 철학은 “너 자신을 알라”고 했다. 젊을 때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을 추구한다. 나도 그런 부류였다. 깨달으라는 내용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대학 2학년 초 우연히 박성배 교수(그때는 석사를 마치고 박사 과정)와 함께 걷는데 박 선생이 불교 경전인 『금강경』 이야기를 하면서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를 『금강경』 사구게 중 하나라고 하면서 무상을 깨달으면 무상이 아니요, 영원한 부처의 세상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무상과 허무, 죽음의 문제에 골몰하고 있을 때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가슴을 쳤다. 나는 그 순간 처음으로 부처를 만나고 발심했다.
불교는 결국 철저한 무상의 깨달음에서 시작한다. 무상을 가르쳐준 박 교수님은 나의 줄탁동시(啐啄同時)의 탁(啄)이었다. 나는 비로소 불자(佛者)가 되었다.
1964년 봄, 당시 대학선원(大學禪院) 원장으로 계셨던 석호(石虎)[후에 서옹(西翁)] 스님께서 내게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란 화두를 주시었고 「보현행원품」을 받아 열심히 읽었다. 당시 나는 해병 중위로 김포 해안 관측소에 근무할 때였다. 새벽에 창문을 가리고 「보현행원품」을 신주같이 읽고 있었다. 그러나 항상 티끌같이 많은 중생이라는 대목에서 막히고 말았다. 언제나 그것이 화두가 되어 가슴을 꽉 메우고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세월은 흘러 1966년 8월, 월남전에 파병되었다. 전쟁터에서 무상을 처절히 느꼈다. 윤회, 업 등이 죽음의 불안을 합리화했고 그
것으로 삶의 의미가 재생되었다. 여름에 대학생불교연합회 학생들을 따라 해인사에 가서 일주일간 수련하면서 성철 방장 스님의 법문도 듣고 삼천 배를 했던 경험이 생각난다. 무엇이든 안 되면 부처님한테 맡기라는 말이 머릿속을 쨍하게 때렸다. 마침 박성배 선생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성철 스님께 인사드리러 간다 해서 나도 취직 좀 시켜달라고 부처님께 매달리자고 마음먹고 동행했다. 성철 스님께 인사하고 부처님께 기도 하고자 한다고 여쭙자 바로 삼천 배부터 하라고 하셨다. 아침 예불 때 천 배, 사시마지 끝나고 천 배, 저녁 예불 때 천 배를 나누어 하라는 방법까지 일러주셨다. 말뚝 신심이 일어났다. 일주일만 잘되면 한 달이라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대적광전 옆 독성각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웬걸 잡념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그것을 죽이느라고 천 배 하는 동안 잡념과 망상과 싸우다가 끝나곤 했다. 그러나 마음을 다져먹고 일심으로 목탁을 치면서 기도를 했다. 일주일 하고 팔일째, 도저히 더할 신심이 나오지 않아 성철 큰스님께 떠나겠다고 인사하니 아무 말없이 쳐다보시더니 가라고했다. 옆에 지켜보던 보성(후에 송광사 방장) 스님께서 웃으며 나를 일으켜 나왔다.
역설적으로 나는 오히려 자유를 얻은 듯했다. 버스를 타고 대구역에 도착하자 우연히 후의 나의 아내를 만났다. 서울로 돌아오니 집에 전보가 한 통 도착해 있었다. 그것은 국민대학교에서 보낸 것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국민대학교와 인연을 맺어 교양학부 철학 교수가 되었다. 이러한 일이 나의 힘으로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번뇌망상과 싸우면서 일심으로 일주일간 삼천 배 기도로 부처님의 가피를 받았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나는 기도 속에서 붓다를 만난 것이다.
나는 국민대학교에 있으면서 대학생불교연합회학생회를 지도했다. 여름, 겨울사찰을 다니면서 일주일씩 기도를 했다. 나는 불교학 교수는 아니지만 『금강경』 등을 읽고 법문도 하고 수행도 했다. 마침 수유리에 살 때라 매일 아침 화계사에 올라가 목탁을 치면서 염불을 하고 백팔 참회를 했다. 당시 숭산 스님께서는 미
국에서 귀국하면 화계사에 주석하셨다. 매일 새벽마다 염불과 백팔 참회, 『금강경』 독송을 하는 나에게 격려의 말씀으로 그 신심으로 동국대학교를 크게 중흥하라고 하셨다. 그때만 해도 법당에서 속인이 목탁을 치면 스님들이 하지 못하게 할때였으나, 숭산 스님께서 특별히 사중에 말씀하셔서 나는 자유롭게 기도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수행하던 중 1974년에 이기영 박사님이 한국불교연구원을 창립했고 구도회를 세웠다. 서경수 교수님과 구도회의 일원으로 여름, 겨울 수련회를 갔다. 그해 여름에 통도사로 수련회를 갔다. 우리 회원들은 극락암 경봉 큰스님에게 법문을 듣고 내려왔다. 스님의 법문은 이 세상 꿈속에서 한바탕 연극을 하라고하신다. 삶이 꿈속의 연극, 연극이 연극인 줄 알고 꿈인 줄 알면 곧 참나 진실한 세계를 알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하루 종일 생각하고 밤새도록 흥분하면서 큰 환희심이 났다. 그 이튿날 삼소굴의 큰스님을 뵙고 “스님 저에게 법명을 주십시오”하니, 잘 왔다 하시면서 마루에 있던 나를 방으로 들어오라면서 시자에게 먹을 준비하라고 하시고, 글을 쓰셨다. 취산(翠山) 이라는 법명과 게송을 주셨다.
「설후시지송백조 사난방견장부심(雪後始知松栢操 事難方見丈夫心)」 “눈이 온 뒤에 송백의 지조를 알 수 있고 어려운 일을 당해야 장부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말씀이었다. 나는 이 글을 액자로 만들어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다음 해에 다시 뵙고 서재명을 말씀드리니 「향림정사(香林精舍)」를 하사하셨
다. 지금 이 두 액자는 우리 집 가보로 모시고 있다. 이렇게 나는 취산 거사(翠山居士)로서 공식적인 불자, 부처님 가족이 되었다. 1976년 초에 광덕 스님의 부름을 받아 불광법회 창립에 참여했다. 광덕 스님의 불광법회는 순수 불교의 지향으로 새로운 도심 포교의 효시였다. 조직은 법주이신 광덕 스님과 회장(김경만 원각회 회장, 후에 출가하여 한탑 스님이 됨), 부회장 겸 전법위원장(송석구), 그리고 조직의 근간인 법등과 명등으로 구성되었다.
도반들은 수행 결사였다. 매주 목요일 오후 6시 종로 3가 대각사에서 법회, 매월 첫째 일요일 사찰 순례 수행, 매월 셋째 일요일 갈매리 보현사에서 철야 정진. 이들은 모두 광덕 스님 주제하에 이루어졌다. 수행의 교리적 체계는 좌선, 『금강경』, 『육조단경』의 「반야품」, 『화엄경』의 「보현행원행품」 등을 읽고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波羅蜜)’을 염(念)하고 백팔 참회 예배하는 내용이다. 『금강경』의 무상(無相), 무주(無主)를 통해 철저한 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가 무상(無常)함을 깨닫고 마음의 근원이 대지혜 완성이니 죄도 없고 업도 없다. 형상이 없음이 지혜라 집착이 없어야 지혜가 나온다. 번뇌망상은 집착의 소산이니 집착을 버리기 위해 일심으로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는 것이다. 그렇게 정진하면서 「보현행원품」의 예경, 찬탄, 참회, 공양 등 십대행원을 실천하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을 예불하라고 하는데 그 티끌같이 많은 부처님은 과연 누구인가? 무엇인가? 의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나는 십 수년을 「보현행원품」을 읽고 있으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언제나 티끌같이 많은 부처님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의심이 끊이지 않고 가슴이 답답하기도 했다.
마침 광덕 스님의 「보현행원품」 강의가 시작되었다. 첫째 예경분의 ‘소유 진법계 허공계 시방삼세일체불찰극미진수 제불세존(所有 盡法界 虛空界 十方三世一切佛刹極微塵數 諸佛世尊).’ 온 법계, 허공계, 시방 삼세 모든 부처님 세계의 아주 작은 티끌만치 많은 수의 모든 부처님께 예배 공경한다는 말씀에서 “아주 작은 티끌만치 많은 수의 부처님”을 어떻게 말씀하는가에 나는 온 정신이 집중되었다. 스님께서 “티끌만치 많은 수의 부처님은 곧 일체 중생으로 내 옆에 있는 사람, 부모, 형제,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곧 부처님이시다”라고 말씀하실 때 나는 십 수년간의 의심이 확 풀리면서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한 시원함과 기쁨이 용솟음쳤다. 십 수년 풀지 못하던 수학 문제가 풀렸던 것이다. 그다음부터 일체중생이 본래 부처이며 겉으로 나타난 모습은 다양하지만 그 마음은 한 번도 늘고 줄지도 않은 청정자성이라는 확신과 예경과 찬탄 등 십대행원은 나의 일념에서 건립되는 것이니 일심으로 눈앞에 현존하는 것처럼 본래 있는 보현행원의 힘으로 예배하고 공경하라는 말씀임을 확실히 깨달았다.
나는 그 이후 「보현행원품」의 근본 뜻을 알게 되었다. 대한불교진흥원 이사로 있으면서 2006년부터 청정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그 청정운동은 「보현행원품」의 십대행원이 중심이 되었다. “내가 변해야 세상이 바뀐다”라는 구호가 곧 보현행원 청정운동이다. 그러나 그 운동은 얼마 안 가 중단되고 말았다.
불교의 수행은 내가 나를 찾는 것이다. 그 방법은 간경, 독송, 염불, 주력, 참선 등일 것이다. 간경을 통한 지식 위주의 현학적인 불교를 실천 중심의 간화선의 주장은 서구의 종교개혁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불교혁명이었다. 그러나 깨달음의 표준이 없고 그것이 사자 전승으로 스승과 제자의 이심전심이 간별의 기준이었다. 따라서 극히 주관적이었기 때문에 부작용이 많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성철 스님의 선문정로(禪門正路) 강설이라고 보여진다.
성철 스님께서는 깨달음의 단계의 증거로 ‘화두의 의단이 행주좌와 어묵동정(語默動靜)에도 성성적적(惺惺寂寂)한가? 꿈속에서도 화두를 들고 있는가(夢中一如)? 숙면 가운데에서도 화두가 뚜렷한가(熟眠一如)? 오매(寤寐)간에도 화두를 들고 있는가?’로 그 사람의 경지를 간별해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결국 불교의 깨침은 이론적인 교리를 아는 지식에 있지 않고 내가 가지고 있는 부처의 본성인 이 마음을 깨치라는 실천 수행이었다. 나는 선사님을 잘 만나 부처님 제자로 시시각각 화두와 염불을 마음에 자각하면서 살고 있다. 화두가 잘 들려 의단이 풀리면 부처님을 친견하고, 염불의 일심삼매가 이루어지지 않아 중생에 머무르기도 한다. 이렇듯 순간순간 찰나찰나 부처와 중생을 넘나든다. 그러나 부처님을 잊지 않고 모든 중생을 예배 공경하고 찬탄하려고 수행 중이다. 수행만이 부처님을 만나 환희할 수 있다. 나는 오늘 부처님을 만났다.

송석구
동국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철학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대만대학교 철학연구소에서 수학했다. 동국대의료원 원장, 동국대(13대·14대)·동덕여대·가천의과대 총장, 한국철학회 회장, 사회통합위원회 위원장, 제4대 삼성꿈장학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삼성경제연구소 고문으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노철학자의 인생수업』, 『다산의 공부』, 『70일간의 마음공부』, 『율곡철학 강의』, 『불교와 유교 강의』, 『대통합』, 『자강(스스로 길이 되어 가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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