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생명 윤리 | ‘일체개고(一切皆苦)’의 생명 현상__남시중

‘일체개고(一切皆苦)’의
생명 현상

남시중
미국 변호사

코로나 사태가 미국을 강타하기 직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세수(歲壽) 89년의 장정이었다.
화장터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한 달 가까이 기다리게 만든다. 화장 직전에 시신 확인을 하라고 부른다. 시신은 핏기가 없고, 변색해 있다. 어머니의 얼굴이 아니다. 손을 잡아보니 얼음처럼 차갑다. 손목에 염주를 채워드리고 다시 손을 모아드렸다. 팔이 털썩 들것 옆으로 떨어져 내린다. 어머니는 열반하셨다. ‘상(相)’으로만 남아 있다.
눈물은 흐르는데 아프게 느껴지지 않는다. 밀어내고 싶은 고통이 아니다. 인간적 슬픔은 고통이 아니다. 슬퍼해야 할 때 슬퍼하는 건 힘들지 않다. 청정한 슬픔은 오히려 선정의 편안함으로 이어진다.
팔리어 경전 『쌍윳따 니까야』에서, 붓다는 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를 ‘고(苦)’라고 정의했다. 슬픔, 탄식, 신체적 고통, 억울함과 절망감도 모두 다 ‘고’라고 했다.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짐도 ‘고’이고 싫어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일도 ‘고’이다. 좋고 싫음에 집착하는 인간의 ‘생명 현상(오온 五蘊) 그 자체가 고’라고 말했다. 인간의 조건(human condition) 그 자체를 고통이라고 본다는 이 점을 근거로 서구에서 불교를 염세주의라고 비난한다.
불교가 만약 염세주의라면 ‘모든 것이 괴롭다’는 뜻의 ‘일체개고(一切皆苦)’는 그 상징 구호일 것이다. ‘일체(一切)’는 ‘무상(無常)’이고 ‘무아(無我)’라서 ‘고(苦)’라는 논리로 붓다는 설했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무상과 ‘불변의 고정된 실체란 없다’는 무아는 같은 말이다. ‘모든 현상은 조건과 인연에 따라 그냥 변해나가는 것일 뿐이다’라는 붓다의 연기설도 무상, 무아와는 사실 동어반복이다. 우주 현상을 물질 원소 간의 인과론적 이합집산으로 설명하는 현대 물리학의 입장과 조화를 이룬다. 다만 현대 물리학이나 생물학은 그래서 ‘괴롭다’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괴롭다’는 인간의 주관적 심리 상태이기 때문이다.
『법구경』을 포함한 초기 경전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삼특상(三特相),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 중 불교에서 가장 설명하기 곤혹스러운 붓다의 가르침이 일체개고다. 전쟁, 역병, 가난, 계급적 수탈에 시달린 고대 민중의 삶은 무척 괴로웠을지 모른다. 물질적 풍요에 젖은 현대인에게는 ‘괴롭기만 하다’는 어감으로는 설득하기 어렵다. ‘삶에는 기쁨도 적지 않다’는 게 일체개고에 대한 상식적인 반론이다.
불교에서는 보통 ‘중생의 시각에서 보면 고이지만 깨달은 자의 시각에서 보면 고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설명한다. 해석은 다양하다. 다들 염세주의라는 비난을 피하려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나 보고 풀어보라면, 일체개고란 ‘태어나서 죽는 걸 두려워한다’는 의미 하나로 집약한다. 불법은 ‘태어나서 죽는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생사가 둘이 아니다’라는 불이법(不二法)으로 끝난다.

살려고 하는 생물학적 의지를 뒤집으면
죽음의 공포이고 영생에 대한 갈애이다.
죽음의 공포를 다시 뒤집으면 살려는 생명체의 생명 의지이다.

‘고’는 팔리어 ‘드카(dukkha)’의 한자어 번역인데, ‘드카’는 수레바퀴와 축이 정확히 조화를 이루지 못해 타는 사람이 ‘불편하게 시달린다’는 뜻이다. 반면 한자어‘苦’는 우리에게 신체적 고통(pain)과 같은 견디기 힘든 아픔의 어감이다. 『법구경』과 팔리어 삼장을 영어로 번역한 미국의 타니사로 스님(Ṭhānissaro Bhikkhu)은 ‘드카’를 흔한 번역어인 ‘suffering’ 대신 ‘스트레스’라고 옮겼다. 영생을 바라는 갈애와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생명 현상(생로병사)’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이 고이다. ‘태어난 모든 것은 반드시 죽는다’고 설했지만 ‘태어남도 죽음도 없다’는 구절이 『아함경』 초기 불전에 함께 나온다. 앞에서는 중생의 현실을 말했고 뒤에서는 열반에 든 ‘아라한(阿羅漢)’의 세계를 말했다고 해석하는 게 정론이다. 태어남과 죽음은 현상 관찰이고 ‘무생무사(無生無死)’는 아라한의 ‘심리 상태’를 말한다고 풀어버리면 현대의 물질적 심리주의로 떨어진다. 하지만 현대인의 관점(편견)에서 고집해보면, 붓다는 일종의 ‘심리적 전환’을 말하고 있다. 컴퓨터 용어를 빌리면, ‘글리치(glitch)’가 발생한 ‘소프트웨어(뇌)’의 알고리즘을 ‘해킹(수행)’하라는 권유다.
‘죽지 않고 계속 살고 싶다’는 욕망에서 드카가 나온다. 괴롭지 않으려면 그 집착을 내려놓으면 된다는 게 붓다의 논리다. 그러나 식욕, 성욕과 같은 동물적 욕망은 유전 인자로 몸에 각인되어 있다. 어쩌지 못하는 생물학적 기능이다. 자의식의 ‘나’가 내려놓고자 ‘의지한다(이성적 판단)’고 해서 몸과 마음이 따라주지 않는다.
그래서 ‘부팅(해탈)’이 아니라면 최소한 ‘해킹(수행)’이 필요하다. 해탈 수행을 부팅, 해킹과 같은 컴퓨터 메타포(비유)로 설명하면 왜곡이라 비난할 사람도 있다. 인간의 언어는 경전에 나오는 표현이든 지금 우리에게 더 친숙한 컴퓨터 용어이든 그냥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즐거움도 무상이라서 고’라고 붓다는 말했다. 둘 다 물질적 속성은 전기화학신호이자 호르몬 반응이다. 불법에서 고통과 즐거움을 구분하지 않듯,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조건이 반드시 고통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화장터에서 귀가하면서 내가 흘린 눈물은 고통이 아니라 소중한 체험이다. 더는 보고 만질 수 없는
인연과의 대화이다. 우리의 뇌는 고통 신호를 스트레스 호르몬 대신 쾌락 호르몬과 연결하기도 한다. 심리적 모욕과 신체적 고통을 즐기는 ‘피학성애(masochism)’가 그 예이다. 우울증이 오래가면 환자는 우울 증세를 오히려 즐기기 시작한다. 쾌락과 고통은 하나라는 게 인간의 성행위(sex)에서 확인된다고 소설 『행복어 사전』에 이병주는 적어놓았다.
붓다가 말한 고를 나는 ‘법(法, 드러난 현실)’과 어긋나는 ‘심리적 저항’이라 말하고싶다. ‘좋다 싫다’는 ‘선호 판단(분별)’에 따라붙는 스트레스(혹은 쾌감) 호르몬 반응이다. 인간만이 뇌의 신피질 전두엽 기능인 언어 상상을 할 수 있다. 뇌는 두개골 안 칠흑 속에 갇혀 있는 3파운드 무게의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광활한 우주를 펼쳐 보이는 우주에서 가장 복잡한 일종의 전기 기계이다. 호모 사피엔스만이 최신 버전의 이 양자 컴퓨터를 가지고 있다. 불행히도, 인간의 고 역시 신 버전에서 흔히 발생하는 ‘글리치(부작용)’의 일종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조정 능력이 동시에 탑재되어 있다. 모든 중생에게 ‘불(佛성性)’이 있다.인간의 두뇌에는 정보처리를 하면서 동시에 그 정보처리 과정 자체를 조망할수 있는 능력이 있다. 마음 작용이 일어나는 동시에 마음이 이를 바라보고 정보내용에 연계된 호르몬 에너지를 중화하는 명상 능력이다. ‘자성(自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게 컴퓨터 운영 프로그램 내에 탑재된 글리치 제거 기능이다. 명상 용어로는 ‘마음챙김’이다. 팔리어 경전에는 ‘사티(sati)’라고 나온다. 사티 기능은 호모 사피엔스의 신피질에 탑재된 최신 기능이다. 불과 20만 년이 넘지 않는다. 장구한 40억 년의 진화 역사에서 보면 자성은 찰나에 불과하다. ‘트라이얼 버전(trial version)’이라 매끄럽게 돌아가지 않는 취약한 기능이다.
자성은 인간만의 능력이고 우리가 말하는 양심도 자성과 이름만 다르다. 인간은 동물성과 ‘신성(神聖)’을 동시에 갖고 있다. 파충류 포유류 시대의 ‘원시 뇌’와 언어를 사용하는 영장류로 진화해 생긴 신피질이 하나의 뇌를 구성하고 있다. 상호 갈등을 일으킨다. 동물적 욕망과 도덕적 이상 사이에서 방황한다.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양심적인 행동을 지향하려는 인간의 ‘신기능(자성)’이 생겨난 진화론적 이유는 아마도 호모 사피엔스의 사회관계가 너무나 복잡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즉각적이고 충동적인 단순 포유류 시스템으로 더는 생존과 번식에 가장 적합한 행동을 연산하고 집행할 수 없다. 개체 자신만의 ‘단선적 이익(이기적 행동)’ 추구는 오히려 개체를 위험하게 만든다. 소속 집단과 주변 환경을 조화롭게 고려해야 개체 자신의 생존과 번식 확률도 높아진다. 예수가 강조한 ‘사랑(자기희생)’과 붓다의 ‘자비(이타적 행동)’는 생물학적으로 보면 공감 능력이다. 명상 수행으로 강해지는 두뇌 기능은 다양하다. 가장 대표적인 건 파충류 시절
에 만들어진 시상하부가 관장하는 호르몬 작용(동물적 욕망)에 충동적으로 반응하지 않는 능력이다. 화가 치밀어 오를 수밖에 없는 연기 조건에서 화가 조건반사적으로 발생하는 건 원시 뇌가 기계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바로 행동으로 발현하면 중생이다. 수행자는 올라오는 분노의 에너지를 미리 바라보고 해소시켜버린다. 바라보는 마이너스 전기 에너지에 의해 올라오는 플러스 전기 에너지가 중화되는 전기 역학의 원리가 그대로 적용된다. 폭풍 같은 호르몬 에너지가 사라지고 나면 화를 나게 만든 조건의 객관적 정보 분석이 가능해진다. 냉정하게 사태를 판단하고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다. “업(業)을 명상 수행으로없앤다”는 말은 유전 인자를 통해 40억 년간 윤회하고 있는 동물적 성향을 업으로 보면 과학이 된다.
명상 수행을 제대로 했을 경우 갈애(고)는 사라지고 자비심이 저절로 드러난다. 자비심은 사실 내면의 행복감이다. 내 마음이 편안하면 남에게도 관대해진다. 흔히 말하는 ‘세속적’ 행복이란 세로토닌이나 도파민 같은 호르몬 자극에 의한 일시적 흥분 상태이다. 왼손은 좌선의 손 자세를 취하고 오른손으로는 땅을 가리키고
있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라는 붓다의 수인(手印)이 있다. 명상과 현실의 두 바퀴를 동시에 굴려야 한다는 붓다의 가르침을 상징한다. 불법에서 말하는 자비행(이타적 행위)은 가장 가깝고 소중한 인연인 배우자를 나를 구제하러 온 보살로 보는 데서 출발한다. 일상적으로 만나는 인연들과 좀 더
관대하게 공감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수신제가(修身齊家)’를 이룬 군자에게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는 그냥 인연일 뿐이다. 공자(孔子)는 그걸 모르고 평생 자신을 알아주는 군왕을 찾아 헤맸다. 모든 걸 내려놓은 나이 70에 들어서야 비로소 “하고 싶은 데로 다 해도 법도에 어긋나는 바가 없었다”라고 『논어(論語)』 「위정(爲政)」편에서 회고했다.
살려고 하는 생물학적 의지를 뒤집으면 죽음의 공포이고 영생에 대한 갈애이다. 죽음의 공포를 다시 뒤집으면 살려는 생명체의 생명 의지이다. 우리는 법과 어긋나는 ‘심리적 저항(집착)’만 내려놓으면 된다. 조금만 내려놓아도 ‘세상은 이미있는 그대로 완벽하다’는 선(禪)의 맛을 엿볼 수 있다.

남시중 성균관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Northwestern University Medill School of Journalism에서 석사 학위를,
University of California Hastings College of the Law에서 법학 박사(J.D.) 학위를 받았다. 현재 캘리포니아주 실리콘
밸리에서 벤처 전문 변호사 및 투자자로 일하고 있으며, 『IT조선』에 ‘남시중 시론’을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개를 위한 변
명 – 보신탕과 동물 권리론에 관한 철학적 성찰』, 『벤처@실리콘 밸리』, 『Why Meditate?』(e-book) 등이 있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6 + 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