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 장상문 거사__김형균

중원 장상문 거사

대중 불교 개혁의 대문을 열다

김형균

도서출판 동쪽나라 대표

 

아버지와 아들, 한국 불교를 살리다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인 1981년 초, 남산 대원정사에 환갑을 맞이하는 한 분 의 거사가 나타나셨다. 1922년 부산에서 태어나, 23년간 외무부에서 고위직에 공헌 해오다가 은퇴한 중원(中圓) 장상문(張相文) 거사였다. 거사는 1961년도부터 외무부의 정보국 국장과 홍콩총영사를 거쳐, 1968년에는 대통령 국방외교 비서관・외무부 차관보로 임명되어 외무부의 고위직을 수행하다가 1974년부터는 스웨덴 대사・멕 시코 대사・유엔대표부 대사 등 해외 외교 요직을 두루 지내다가 퇴임했다.

은퇴 후, 중원 거사는 1975년 열반하신 아버지 대원(大圓) 장경호 거사의 유지를 받들 것을 결심한다. 그리하여 (주)동국제강 그룹의 경영직도 마다하고, ‘한국 불교 중흥’이라는 큰 산맥을 넘는 보살의 길을 걸어, 그 누구도 비교할 수 없는 크나큰 업적을 이루게 된다.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이 뜻을 이어 30여 년이란 세월 동안 헌 신함으로 해서, 대원 거사와 중원 거사 두 분이 있었음으로 해서, 오늘날 한국 불교

는 커다란 변화와 쇄신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두 분이 향한 길은 바로 ‘한국 불교의 대중화’였 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절에 다니면서 불자 의 길을 배운 중원 거사는, 무엇이 대중화의 길인지 를 터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대원 도량에 입문하 면서, 우선 아버지와 같이 모든 물욕을 버리고, 명예 욕을 버리고, 자만심을 버렸다. 옆에서 거사를 모시 고 불사를 진행한 모든 직원과 신도들이 한결같이 인정하는 것처럼, 중원 거사는 소박과 겸손이 일거수일투족의 전부였다.

중원 거사는 1983년 6월 (재)대한불교진흥원(이하 진흥원)의 이사직을 맡고, 이어 서 대원회 회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부친께서 열반을 앞두고 30억 6,000만 원의 재산을 불가(佛家)에 보시해 진흥원을 설립한 가르침을 본받아, 중원 거사도 소유 하고 있던 동국제강 주식 10억여 원을 보시해 재단법인 대원정사를 설립했다. 그 당시에 비해 백배 이상 돈의 가치가 오른 요즈음의 시세로 환산하면 수천 억 원 에 이르는 보시였으니, 참으로 대단한 ‘아버지 보살·아들 보살’이 아닐 수 없다.

대중 불교의 기둥을 세우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한국의 재가 불교는 그 모양새를 바꾸고, 새로운 방향으로 돌진하는 격변의 시대를 맞이한다.

중원 거사는 기존의 대원정사 옆에 300평 규모의 새로운 법당과 강당·수행 선방이 자리한 대원불교회관을 짓고, 스스로는 책을 몇 권 꽂을 정도의 작은 사무 실을 마련했다. 그리고 스님, 교수, 법사, 기자, 출판인 등 불가의 분야별 인재들을 영입해 현대 불교의 새로운 패턴을 향한 조직을 키워나간다.

우선적으로 1년 과정인 대원불교대학을 설립해 활성화했으며, 이 대학은 2년제 로 바뀌며 그동안 3,000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했다(현재는 ‘대원불교문화대학’으로 학교명을

변경하여 대한불교진흥원에서 운영하고 있다). 1985년에는 지방 불자들에게 불교 교육의 장을 마련해주자는 취지에서 지방 도시의 불교대학 개설을 기획, 광주·전주·제주 등을 기점으로 전국 20여 개의 주요 도시에 불교대학을 개설했다. 아울러 15개 도시에서 지방 기자들을 영입해 “집집마다 부처님을 모시자”는 ‘대중 불교 결사 대회’를 전국 순회로 개최했는데, 기복에 치우쳤던 이 땅의 불자들에게 진리의 눈을 뜨게 하는 대중 불교의 새 시대를 펼쳐가는 주춧돌이 되었다.

또한 중원 거사는 가장 중요한 것이 군 포교임을 강조했다. 1960년대에 처음으로 군법사제도가 시행된 지 10여 년이 지났지만, 기독교·천주교의 군 포교에 비해 열악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진흥원이 매년 몇 차례씩 법당 창건비를 군부대에 지원한 결과 무려 50여 개의 군 법당이 창건되었다. 그리고 16만 부의 『불교성전』을 군 법당에 기증하고, 1988년에는 『통일법요집』을 출판해 10만여 부를 군 법당에 보급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10년 만에 군 법당과 군 법사의 수요가 10배 이상 늘어났고, 군 불자들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조계종 총무원 예산 지원과 부처님 오신 날 봉축행사 지원 등을 집행했고, ‘불교의 현대화·대중화·생활화’에 초점을 맞춰 동국역경원, 한국불교연구원, 한국불교학회,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대한불교조계종 전국신도회 등을 적극적으로 지원함으로써, 각 분야에서 포교와 연구의 활성화를 이루게 한 것도 초기의 중요한 업적이 되었다.

언론 출판의 새로운 장을 열다

아울러 거사는 부친 때부터 추진하던 불교방송국 설립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거사는 젊은 시절인 1956년도에 일본에서 유엔군의 방송국 업무에 임했던 경험을 되살려, 몸소 일본의 종교 방송계를 둘러보고 방송 시설·프로그램 등 각종 자료를 챙겨 와 준비 회의를 거듭했다. 그리하여 1988년 11월, 조계종·태고종·천태종·진각종과 진흥원이 함께 불교방송국설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

고 중원 거사가 추진위원장이 되었다. 이후 1988년도에는 마포에 연면적 6,920평 규모의 다보빌딩을 매입해 당국의 재가를 획득하기 위한 절차를 밟았고 마침내 1990년 5월에 이르러 불교방송 개국을 알리는 목탁 소리가 전파를 타고 퍼져 나가게 되었다. ‘깨침의 소리 나누는 기쁨 – BBS 불교방송’이라는 자랑스러운 이 모양새는 타 종교 방송에 억눌렸던 2,000만 불자들의 가슴을 쿵쿵 울렸다.

출판 분야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으니, 1985년 창간한 월간 『대중불교』는 ‘불교의 대중화, 생활화’를 주창하는 새로운 모양새로 3만 명이 넘는 고정 독자를 확보하는 등 불교계에서는 전무후무한 업적을 이루었다. 이어서 창간된 계간 『다보』는 후일, 『오늘의 불교문화』(구 『오늘의 불교와 문화』)로 이름을 바꾸면서 교계의 역사, 학술, 신행 등 다양한 문화를 분석하는 종합지로 불교계를 대표하는 정기 간행물이 되었다. 1987년도에는 어린이 포교를 위해 꼭 해야 한다는 집념으로, 중원 거사는 어린이 월간 잡지를 간행하자고 기자들을 독려했다. 그리하여 불교계 초유의 어린이 포교 문화를 위한 잡지로 태어난 『굴렁쇠 어린이』가 전국 주요 서점에 진열되는 진풍경이 벌어졌고, 사찰마다 어린이 법회를 활성화하는 매체가 되었다.

단행본 발간 및 지원 사업도 꾸준히 벌여 『한국불교총람』을 발간하고 『청소년불교성전』, 『설법지침서』 등을 출간했으며, 『100문 100답』, 『빛깔 있는 책』 등 300여 종의 문화, 역사, 미술, 교리 서적을 출판했다. 그리하여 1990년 제1회 불교출판문화상 디자인 부문, 제13회 한국출판학회상 기획편집 부문, 1991년 제31회 한국일보 한국출판문학상 출판 부문에서 수상했다.

조직 강화만을 원하시며 해탈하시다

1970년대 후반부터 진흥원과 대원회 그리고 『불교방송』까지 거사가 행한 10여 년간의 모든 불사는 각별한 조직이 뒷받침되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중원 거사의 지근거리에서 각종 불사를 함께 진행한 권오현 전 『불교방송』 전무는 회고한다.

“참으로 지극한 집념과 전문적인 지식의 결과였지만, 거사님은 아무런 명예도 권력도 탐하지 않으셨다.”

중원 거사는 1989년~1990년도에 걸친 방송국 개국 불사를 성공리에 끝낸 이후, 방송 편성의 시대화를 위해 각계의 전문가들과 논의를 계속했다. 점차 방송의 수준이 향상 진전되면서 그 방송의 지역적 한계가 수도권에 그친다는 것은 너무나 아까운 일이었다. 개국 이전부터 꾸준하게 『불교방송』 전파가 전국적으로 울려 퍼지려면 주요 도시에 지방 방송국이 필요하다고 역설해온 중원 거사는, 1991년 스스로 불교방송 지방망 확장 추진위원회의 집행위원장이 되어 위원회의 모든 일을 챙겼다.

그리하여 중원 거사는 직접 지방 도시를 방문하고 담당자를 만나면서 부산·광주·대구·청주의 방송국을 개국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춘천·울산·제주 방송국과 20여 개의 중소 도시에 방송 중개소를 설립하는 등 원활한 지역 방송을 이루게 된 기초는 바로 이러한 중원 거사의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날 20여 개의 지방 방송국과 중개국이 설립되어 불음을 전함으로써 우리 불자들에게 현대 불교는 어떤 길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를 일깨워주는 나침반이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중원 거사와의 이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이런 사실을 주위의 신도들도, 직원들도, 그 누구도 몰랐다. 이미 외무부를 떠나 불교계로 귀의할 때부터 10년이 넘도록 지병에 시달린 거사이셨지만, 조금도 내색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방송, 출판, 수련회관 건립에 몸소 행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거사님이 안 계셔도 오직 그 일이 잘 이루어지도록 조직의 강화만을 독려하셨다.

그리고 1992년 11월 22일 오전 10시, 중원 거사는 적멸에 드시었다.

수많은 불자들이 눈물을 흘렸다. 한국 불교의 발전, 대중 불교의 개혁이라는 대문을 열어주신 그 노고에, 아버지와 아들이 펼친 인연에, 두 손을 모으며 감사드리고 또 감사드렸다.

 

김형균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했다. 『불교신문』 기자를 시작으로 불교 언론과 인연을 맺고, 월간 『법륜』, 월간 『대중불교』 , 월간 『금강』 편집장과 월간 『굴렁쇠 어린이』 대표를 역임했다. 현재는 도서출판 불지사, 동쪽나라 대표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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