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불교 공부만이 내 삶의 목표__정병조

오직 불교 공부만이

내 삶의 목표

정병조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前 금강대학교 총장

불교를 믿게 된 두 번의 인연

 

 

정병조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졸업 및 영남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동국대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인도 네루(Nuhru) 대학 교수 및 동국대 윤리문화학과 교수, (사)한국불교연구원 이사장 겸 원장, 동국대 부총장, 불교학 연구회 회장, 금강대학교 총장 등을 역임했으며, 『불교방송(BBS)』 라디오 프로그램 <무명을 밝히고>를 오랫동안 진행했다. 현재는 동국대 명예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인도철학사상사』, 『불교문화사론』, 『한국불교철학의 어제와 오늘』 ,『불교강좌』, 『반야심경의 세계』, 『현대인의 불교』 등이 있다

 

나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서 성경 말씀으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불교를 접할 기회조차 차단되었고 고2 때 불국사로 수학여행을 간 것이 불교와 만난 첫 번째 ‘사건’이었다. 1965년에 고려대 생물학과에 입학했다. 학교생활은 참담했다. 말미잘을 해부하고 메뚜기 뒷다리의 신경절을 세는 일은 고역이었다. 2학년이 끝나갈 무렵, ROTC에 응시했다가 낙방했다. 암담한 마음뿐인 와중에 서울대 철학과에 다니는 친구가 철학 강의를 들으러 가자고 해서 별 관심 없이 따라갔다. 12월 20일경이었는데 다른 강의는 벌써 종강했고 한 분의 강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박종홍 교수로 기억하는데 그 분의 마지막 말씀이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자신은 서양 철학을 전공한 사람이지만 기회가 된다면 불교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먹어서 도무지 진도가 안 나가니 젊은이들은 용기를 한번 내보라고 했다.

그 길로 터벅터벅 걸어서 남산의 동국대를 찾았다. 창구에 있던 직원이 내 경력을 묻더니 2학년 편입밖에 안 되겠다고 했다. 그래서 편입학 대신 새로 입시를 치르기로 결심했다. 다만 문제는 수학과 제2외국어였다. 무작정 걷다 보니 을지로4가까지 내려왔는데 입시학원 간판이 눈에 띄었다. 입시까지는 꼭 두 달, 무슨 수를 쓰든지 수학과 독일어 두 과목만 완성시켜달라고 떼를 썼다. 집안의 반대는 예상보다 심했다. 등록금도 줄 수 없고 고약한 이단적 생각을 거두지 못하면 집에서 나가라는 엄중한 경고였다. 어머니는 울고만 있었다. 그래도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결국 아버지께서는 내게 한 가지 다짐을 해달라고 하셨다. 불교는 공부는 하되 절대 믿어서는 안 된다는 통보였다.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당시에 나도 불교를 믿을 마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를 스스로의 의지로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나는 약속을 어기고 불자로 살기를 서원했다.

인도철학과 3학년 때 익산의 미륵사지, 정림사터, 왕궁리 석불 등을 다녀오는 수학여행을 갔다. 그때 지도교수는 작고한 황수영, 서경수 은사님이셨다. 나는 왕궁리의 석불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불상의 목을 쳐서 떨어져 나간 불두와 그것도 모자라 몸통 부분을 쇠꼬챙이로 북북 그어놓은 것을 보고 가슴이 저미듯 아파왔다. 그곳에서 ‘이건 몹시 잘못된 일이다. 나의 믿음 때문에 다른 종교를 업신여기고 불상을 훼손하는 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 나는 하찮은 생명이지만, 온 힘을 다해서 불교를 지켜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불자로서 살아가기

나는 불교에 입문한 시기만을 따지면 늦깎이였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공부하 는 길밖에는 없었다. 더구나 동기들보다 2년이나 늦었기 때문에 마음은 조급했 다. 특히 4학년 때 공부에 불이 붙어 도서관에서 밤을 샌 적도 많았다. 그때는 오 직 불교 공부만이 내 삶의 목표였다.

내가 교수가 된 것은 부처님의 가피였다. 당시 정재각 총장 시절이었는데 교수 지망생들에게 두 과목을 부과했다. 첫 번째는 영어 시험이었는데, 미국 장학 재단 에 연구 과제를 신청하라는 문제였다. 두 번째 시험은 각자가 전공하는 분야에 어 떠한 문제가 있으며 그 해결책은 무엇인지를 논술하라는 내용이었다. 철학 전공 에 응모한 교수 후보자는 나까지 일곱 명이었는데, 잘 아는 스님 한 분과 현역 대 학교수 두 분도 포함되어 있었다. 답안을 열심히 쓰기는 했지만 도무지 자신이 없 었다. 합격 통지서를 받고 어찌된 영문이냐고 물었더니, 현역 교수 두 분이 한 과 목만 치고 두 번째는 결시를 해서 영점 처리가 되었다고 했다. 무슨 조화인지는 몰라도 덕분에 교수로서의 첫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나는 1980년부터 2011년까 지 32년을 동국대 교수로 지냈다.

불교 학자로서 살아온 한평생

나는 다른 불교 학자들에 비해 매우 많은 책을 집필했다. 저술이 14권, 공저가 6권, 번역서가 8권, 영문 저술이 2권으로 도합 30권이다. 논문은 80여 편이다. 지 금 와서 돌이켜보면 특별히 학술적 가치가 있는 책도 별로 없고 베스트셀러 반열 에 든 책도 없다. 내 나이 벌써 70대 중반, 학문적 회향을 도모해야 할 시점이다. 앞으로 어느 정도 삶이 주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꼭 2권을 더 쓰고 싶다. 첫째 는 불교사의 쟁점을 인도에서부터 한국까지 정리해보고 싶다. 부처님 당시에 있 었던 데바닷다(Devadatta)의 반역 사건 속에 감추어진 진실, 대승과 기성 교단의 불 협화음, 중국의 경우는 육조 혜능과 신수(神秀)의 북종이 대립했던 이념적 갈등,

돈오(頓悟)와 점수(漸修) 형이상학적 논쟁, 그리고 한국의 경우에는 원광의 세속오 계에서 보이는 살생유택(殺生有擇)에 대한 문제 제기, 승군의 활동에 제동을 걸었 던 부휴(浮休) 선사의 이상 등을 정리하고 싶다. 인도, 한국, 중국을 합해서 약 50여 가지의 토픽을 추렸고 기초적인 자료 조사도 거의 완성 단계이다.

다음으로는 내 필생의 스승 의상(義湘) 스님에 대한 평전을 남겨야 한다. 이 또 한 기초 조사는 마쳤다. 중국 종남산 일대 지상사(至相寺), 정업사(淨業寺) 답사를 마 쳤고, 일본 교토의 고산사(高山寺) 답사도 마쳤다. 한국에서도 화엄 십찰을 비롯해 서 그분의 발길이 멈추었던 모든 사찰을 철저히 조사했다. 문제는 그 첫 단추를 끼는 일이 쉽지 않다. 방대한 자료에 파묻혀, 선후를 정리하는 일이 까다롭다. 머 리도 많이 나빠졌고 우선 기억력이 옛날만 못하다. 총장을 한답시고 4년 동안 도 장 찍고 회의 다닌 일이 아깝기만 하다.

『불교방송』이 개국하던 30년 전에 처음 <무명을 밝히고>라는 프로그램을 진행 했던 일은 나름대로 포교의 방편이었다. 나는 지금도 수준 높은 교양 강좌, 불경에 대한 새로운 해석들이 이 시대에 꼭 필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우리도 모르는 사 이에 지금 대한민국은 기독교화되고 있다. 단순히 십자가가 많다는 것보다 사회 오피니언 리더들의 자세, 기독교적 가치관이 이 시대에 범람하는 것이 안타깝다.

불교가 튼튼해야 나라가 건강해진다. 불교의 가치관이 사회의 지배적 경향이 되어야 비로소 대한민국은 ‘관용과 융합’의 나라로서 이상적 선진 사회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부족한 삶이었지만 앞으로도 부처님 시봉하는 일을 쉬지 않으려 고 한다. 어차피 불교를 말하고, 그것을 소재로 글을 쓰는 것이 나의 숙명이고 업 (業)이기 때문이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one × on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