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권과 생명|생명 존중의 불교적 세계관__남시중

생명 존중의

불교적 세계관

남시중

미국 변호사

 

 

고도 문명의 외계인이 지구를 정복하기로 했다. 인육 맛을 본 외계인은 지구를 인육 농장화하고자 한다. 앞선 군사 무기를 가진 외계인은 순식간에 인류의 항복을 받아낸다.

과학기술 문명이 앞선 외계인의 정치사회 구조는 단순하지 않다. 내부의 정치, 종교, 윤리적 견해가 다양하다. 대다수는 타 행성의 생명체를 도살해서 그 사체를 먹고 즐기는 데 거리낌이 없다. 하지만 외계인 사회 내부에서도 ‘폭력으로 타 행성의 생명체를 유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소수파’가 있다.

소수파는 지구의 인육 농장화에 극렬히 반대한다. 소수파의 도덕적 시위가 거세지자, 다수파는 일단 자기 변론이 가능한 인류의 입장을 들어보자는 소수파의 건의를 받아들인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빗댄 공상적 가정이다. 하지만 인류는 어떤 입장 변론을 할 수 있을까? 독자 여러분이 외계인에게 직접 호소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뭐라

고 말하겠는가? 어느 종교, 어떤 도덕 철학과 세계관이 외계인 다수파에 설득력이 있을까?

나는 생명 존중의 불교적 세계관이 가장 설득력이 크다고 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오만하고 편협한 인간 중심의 세계관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종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유일신을 상정한다.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다. 신의 명령과 그 도덕률을 따라야 천국에 갈 수 있다. 언뜻 보면 인간보다 상위 개념인 ‘신(神)’을 설정해 인간의 위치를 겸허하게 낮춘 듯하다. 실제로는 지극히 인간 중심적이고 편협한 때로는 오만하기까지 한 미망적 세계관이다.

‘인간은 선택받은 피조물이다’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상상’은 ‘인간만이 중요한 생명체’라는 함축이다. 인간만이 ‘영혼이 있는 존재’이고 모든 생명체의 주인이다. 고통을 느끼고 감정을 표현하는 포유류 동물조차도 신이 인간에게 하사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본다. 동물은 영혼이 없으니 기계처럼 막 다뤄도 된다는 데카르트의 주장이 그래서 나온다. 육식을 자제할 아무런 도덕적 이유가 없다.

서양의 유일신 전통에서는, 인간 이외의 생명체에 대한 존중을 도덕적으로 설득하기 어렵다. 인간 중심의 세계관에 머무는 한, 어떠한 도덕 이론도 인간의 이기적 이해관계를 벗어나기 어렵다. 서양에서도 외계인 소수파처럼 동물 학대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소수가 아무리 ‘동물 해방’이나 ‘동물 권리’를 떠들어봐야, 오랜 육식의 습관에 젖은 대중은 설득되지 않는다. 고통은 물론이고 감정, 기억, 심지어 자의식까지 있다는 과학적 근거에도 불구하고 동물에 가해지는 무자비한 폭력과 고통을 중단하지 않는다.

서양의 ‘동물권(Animal rights)’이란 개념도 왠지 인간 중심의 도덕적 전통과 아귀가 맞지 않는다. 오로지 영혼을 가진 인간만이 신이 부여한 ‘권리’를 가질 수 있지 않는가? 미국과 유럽의 동물권 운동이 한계에 부닥친 근본적인 이유이다.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서양의 도덕관은 인간이 아닌 외계 생명체에게는 더더 욱 설득력이 없다. 한편으론 인간만이 신에게 선택받은 영혼의 존재라고 주장하 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 신이 선택하지 않은 외계인에게 자신들의 생명과 인격을 존중해달라고 읍소할 수 있을까?

동물은 물론 유색인종에게도 무참한 폭력을 가해온 서구 제국주의의 이면에 는, ‘백인만이 신에게 선택되었다’는 인종적 오만이 유일신 미신으로 정당화되었 기 때문이다. 백인은 흑인을 반인반수로 보았기에 노예로 참혹하게 다루었다. 나 치는 유대인을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았기에 대량 학살을 감행했다. 동물에게는 자비를 베풀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반면 불교는 인간의 이기심과 아집을 초월하는 탈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이다. 붓다의 깨달음과 가르침은, ‘명상적 체험(無我)’과 있는 그대로 보는 ‘현상학적 관 찰(如實知見)’에서 나온 자연의 순리와 이치, 즉 ‘법(法 dharma)’이다. 인간 중심적인 편견이나, 아집 혹은 이기적 이해관계가 있을 수 없다.

불교는 ‘수행의 종교’다. 무엇보다 인간의 자기기만과 미망을 경계한다. 맹목적 믿음이 아닌 수행을 통해서만 ‘불법(佛法)’을 볼 수 있다. 인간 역시 다른 모든 생 명체와 ‘인연의 고리’에 묶여 있음을 알기에, 인간에 내재한 동물적 욕망을 부인

하거나 외면하지 않는다. 현상과 사물을 드러나고 있는 그대로 보기에 (유일신 종교 와 달리) 과학적 진실과 충돌하지 않는다.

죽음의 공포가 인간을 유일신 미신과 같은 미망에 빠뜨린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명상 수행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아는 게 불교다. ‘삶도 죽음도 다 하나(不生不死)’라는 연기(緣起)를 체험으로 깨닫는 수행 그 자체가 불교다. 수행은 죽음의 공포가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삶의 의지’, 그 이면에 불과함을 깨닫게 해 준다.

명상 수행과 사마타 체험을 통해,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나는 나의 의지와 무 관한 기계적 생각의 흐름에서 발생한 또 다른 ‘생각’에 불과하다”라는 사실을 깨 닫는다. 뇌과학에서도, 세계를 바라보는 중심으로서의 나, 즉 자의식의 ‘자아(self)’ 란 실재하지 않으며, 단지 뇌의 연산 작용에서 파생하는 배경적 느낌에 불과하다 는 주장이 있다. 누구나 명상 수행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나란 없다’는 무아의 경험이 불교의 자비심으로 이어진다고 나는 확신한다. 명 상 수행을 통해, 매 순간의 자의식 체험 그 자체가 바로 나이고 세계 전체라는 현 상학적 진실이 반복적으로 체험되고 확인된다. 이전에 내가 나라고 착각했던 자 의식의 주체로서의 나, 즉 느낌이나 생각으로서의 ‘나’는 뇌가 뇌 자신의 정보처 리 과정을 반복적으로 되돌려 지켜보는 ‘지관(止觀) 작용’을 통해 점차 그 에너지 가 약화한다.

동물적 욕망과 이기심을 일으키는 ‘나’의 호르몬 충동 역시 수행으로 조절이 된 다. 맹목적 믿음이나 논리적 이해가 아닌 수행으로만 ‘중도(신체 호르몬 균형)’를 이 룰 수 있다. 직접적인 자기 체험을 바탕으로, 이기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진화론적 왜곡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다. ‘자의식의 존재’로서의 인간이 스스로 성취하는 생물학적, 도덕적 진화이다.

우리는 삶의 고통을 겪기에 다른 생명체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죽는 존재이기에 죽어가는 다른 모든 생명체에 자비심을 가질 수 있다. 우리와 똑같은

고통을 느끼는 동물에게 어떻게 동정심을 갖지 않을 수 있는가? 인간의 폭력 앞에 서 아이처럼 무기력한 동물에게 어찌 안타까운 자비심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가?

‘진정한 나(양심)’를 속이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서양의 동물권 이론 운동가의 도덕적 감성에 나는 공감한다. 칸트 도덕론으로 윤리적 채식주의를 주장했던 미국 철학자 톰 리건(Tom Regan)이 몇 해 전 사망했 을 때, 일생에 걸친 그의 동물복지 운동에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서양 철학자 피터 싱어나 리건의 동물권 논리는 철저하게 인간 중심 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서양적 사고의 틀과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불교에는 인간 중심의 착각이나 오만이 없다. 탈 인간적이라 외계인의 종교나 사상과도 갈등을 일으킬 수 없다. 우주의 ‘모든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 외계인 자 신의 해탈에도 도움이 된다’는 불교의 이타적 호소는, 과학적 사고를 하는 외계인 에게도 감동적인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모든 생명이 다 소중하다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다. 우주의 ‘원소(본래 자리)’로 귀향하는 죽 음이 없으면 태어남이 없고 태어남이 있어서 죽음이 있을 뿐이다. 이 너무나 평범 한 ‘윤회’의 사실이 그냥 ‘불법(佛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되어 있다. ‘욕망(생물학적 삶의 의지)’의 이면이다. 그 ‘심리적 고통(번 뇌)’ 덕분에 역설적으로 모든 생명체에 대해 우애의 자비심을 가질 수 있다.

첫째도 둘째도, 생명을 해하지 않는 게 불교 정신이다. 채식이 가능하다면, 육 식을 하지 않는다. 동시에 채식 그 자체가 우상인 교조적 채식주의에 빠지지도 않 는다. 탁발로 고기를 받으면 보시의 정성을 고려해 그냥 먹으라고 붓다가 설법한 이유이다. 생물학적 욕망을 경계하지만 그렇다고 신체의 정상적 기능을 거부하 는 고행주의로 기울지 않는다. 우주의 ‘법(法)’인 ‘중도(中道)’를 지향할 뿐이다.

비폭력과 이타심, 자비의 평화가 궁극적 가치인 열반이다. 불교의 자비는 유일

신의 명령도 (그 명령을 철학적으로 각색한) ‘이성적 사고의 논리적 귀결’도 아니다. 우 주 스스로 자기 길을 찾아가는 순리이다.

매년 720억이라는 천문학적인 수의 농장 동물이 공장에서 사육되고 학살된다. 약 10%는 사육 과정에서 오는 고통과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도살되기도 전에 죽음을 맞는다. 피비린내가 하늘을 찌르는데도 우리는 애써 모르는 척한다.

매년 바다에서 잡아 올리는 물고기는 2조 7,000억이라는 상상하기도 힘든 숫 자이다. 오대양에서 식용 어류는 이미 복원력을 상실했다. 현재 속도로 기업형 고 기잡이가 계속된다면 30년 안에 식용 어류는 멸종한다.

과도한 육식과 고기잡이는 소수의 도덕적 문제 제기에 그치지 않는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인간이 소모하는 전체 칼로리의 18%에 불과 한 육식을 위해 농토의 80% 이상을 공장형 축산업에 동원하고 있다. 동물 폐기물 로 인한 수질과 농지 오염은 인류 전체의 건강을 위협하는 수준이다. 성장 촉진제 와 항생제가 남용되면서 전염병이 끊이지 않는다. 온실가스 배출로 인해 지구 온 난화에까지 악영향을 미친다.

지구에 출현했던 생명체의 99.9%가 이미 멸종하고 없다. 지금도 약 2,000종의 생명체가 매년 사라지고 있다. 타 생명체에 폭력을 가하는 인간은 자신의 무덤을 파고 있을 뿐이다. 학대와 고문을 중단하고 삶과 죽음 앞에서 겸손해져야 한다.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인류의 상식으로 자리 잡지 못하면, 생명에 대한 폭력과 환경 파괴는 중단되지 않는다. 서양적 사고와 가치는 유일신 미신을 절대로 벗어나 지 못한다. 윤리적 채식을 실천해온 대승불교의 한국 불자가 생명 존중의 중심에 서 야 한다. 자비의 보살 정신만이 우리 자신과 우주의 모든 생명을 구제할 수 있다.

 

남시중 성균관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Northwestern University Medill School of Journalism에서 석사 학위를, University of California Hastings College of the Law에서 법학 박사(J.D.) 학위를 받았다. 현재 캘리포니아주 실리콘 밸리에서 벤처 전문 변호사 및 투자자로 일하고 있으며, 『IT조선』에 ‘남시중 시론’을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개를 위한 변 명 – 보신탕과 동물 권리론에 관한 철학적 성찰』, 『벤처@실리콘 밸리』, 『Why Meditate?』(e-book)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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