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이 시대 바람직한 여성 불자의 삶__조은수

이 시대 바람직한

여성불자의 삶

조은수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불교와 관련해 어려서 기억나는 여성은 역시 우리 어머니이다. 공양물을 머리 에 이고 아차산 기슭에 있던 절로 향하시는 어머니를 따라 산을 올라가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런 어머니들과 여성들의 발길로 한국의 불교는 이어져왔다. 어머니 는 환갑도 되기 전 내가 유학 중 돌아가셨는데, 자신의 인생에 그리 만족스러워하 지 않으셨다. 그러다 보니 가족들에게 불평이 많으셨다. 어머니와 나이 차이가 열 아홉 살밖에 나지 않는 큰언니는 그런 어머니에 대해 지금도 불만이 있는데, 어쩐 지 나는 내 어머니를 생각하면 늘 마음이 짠하다. 어머니가 지금 우리가 받는 교 육과 사회적 조건을 향유할 수 있었다면 어떤 인생을 사셨을까. 어머니를 떠올릴 때마다 어머니가 살던 시대에 대해, 여성의 삶에서 자기를 실현한다는 의미에 대 해 더욱 생각해보게 된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내게 한국의 불교계에서 여성의 지위가 어떠냐고 묻는 사 람들이 많았다. 그들이 생각하는 동아시아에서 여성의 지위는 너무 낮은 것이었

다. 한국으로 귀국한 후, 스님들에게 남녀차별이니 여성 불자의 위상이니 하는 이 야기를 꺼낼 기회가 종종 있었다. 그러면 언제나 돌아오는 답변은 비슷했다. “부 처님 법에 무슨 여자, 남자가 있냐”는 것이 가장 대표적이고, 더 강경하게는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네가 차별상을 여의지 못해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하 지만 내 생각으로는 이러한 반응은 현재의 질문(즉 속제적 관점에서의 나의 질문)에 대 한 논점을 피하고 문제의 핵심을 다른 것으로 치환해버리는 것일 뿐 아무것도 대 답되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근대 이후 한국 사회가 급격히 변했고 특히 큰 변화가 일어난 영역이 여성의 지위와 젠더에 대한 관점인 것 같다. 하지만 아직도 불교계에서 만나는 많은 여성 들은 여전히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한다. 전통적으로 동아시 아에서 여성은 순종하고 자신을 낮추라고 가르쳐왔다. 이 전통은 행동과 태도뿐 아니라 마음도 규제했다. 불교계에서는 하심의 윤리를 가르친다. 그런데 이 ‘하심 (下心)’이라는 말이 유독 여성 불자들에게만 강조된다. 이러한 교육은 우리들 내면 의 심층에까지 파고들어 부지불식간에 뿌리 깊은 자기 의문을 문득문득 표출하 게 만든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의 이 행동은 자만과 교만에서 나온 것인가, 자신을 돋보이고 명예를 얻기 위한 동기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등을 묻는 자의식이 발동되도록 만들어버린다. 현대 사회는 경쟁과 자기 선전의 시대로 나 아가고 있는데 말이다. 원효 스님은 『보살계본지범요기』에서, “수미산만 한 아견 (我見)은 낼지라도, 털끝만 한 공견(空見)은 가져서는 안 된다”고 했다. 여기서 공견 이란 허무적 태도를 말한다. 공견보다는 아견이 낫다는 뜻이다.

한편 초기 불전 니까야에 보면 숲속에서 수행하고 있는 소마에게 마라가 다가 가 이렇게 말을 건다. 여자는 손가락 두 마디만큼의 지혜밖에 없는데 수행은 해서 뭐 하느냐고. 이에 대해 소마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여자라서 무슨 차이가 있 는가. 마음이 잘 가라앉아 있고, 지혜는 점점 증장되고 있으며, 법을 잘 이해하는 데. 당신(마라)이 가서 말을 걸어야 할 사람은 바로 여자다 남자다 하고 말하는 그

런 사람이다”라고 대꾸하고 있다. 자기 회의와 두려움과 혼란을 부추기는 마라의 속삭임을 떨쳐내고, 자신의 삶과 현재 가고 있는 수행의 길에 대한 확신을 천명하 는 놀라운 여성 선언의 한 장면이다.

불교는 그 출발에서부터 양성평등적인 종교로 시작되었고 여성 수행의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그러나 교리적인 선진성이 실제 종교 관행에 있어서 그대로 반 영되는 것은 아니다. 자기비하감이 인격 성장에 가져오는 영향에 대한 스탠퍼드 대학의 유명한 심리학 실험 결과가 있다. 멀리 갈 것 없이 한국 불교계에는 아직 도 업이 두터워서 여자로 태어났다면서 여성이란 무언가 결여된 불완전한 존재 라는 관념이 만연해 있다. 자기 자신의 종교적 가능성에 대해 이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해서 어떤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다. 물 론 예전에 많은 비구니들은 이런 숙명론이나, 다음 생에 남자로 태어나 깨달음을 성취하라는 가르침하에서도 수행하고 많은 분들이 깨달음을 얻었다. 하지만 현 대의 우리 자매 딸들에게도 여전히 이렇게 가르칠 것인가? 부처님은 아난다의 질 문에 대해, 여성도 수행하면 아라한과를 성취할 수 있다고 분명히 대답했음이 초 기 불전에 적혀 있다.

신도의 대다수가 여성인 한국 불교에서 여성의 능력을 어떻게 개발하고 이를 수행과 포교의 현장에 어떠한 방식으로 접목하느냐 하는 것은 한국 불교의 미래 와 직결된 문제이다. 궁극적으로는 그 실천 주체의 영적 잠재력을 키우고 자아를 완성하고 자신의 능력을 발현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종교의 기능이라 생각한다. 여성 불자가 불교 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하는데 여성이 보다 성숙한 불교 신행 문화를 가지고 조직적 활동을 펼칠 때 교계뿐 아니라 한국 사회 발전에 기여할 것은 명백한 이치이다. 건전한 불교 여성관 확립과 교육을 통한 여성들의 정예화 가 한국 불교 발전의 관건이라는 생각이다. 그분들을 의식화하고 훈련해서 새로 운 불교가 일어날수 있는 일꾼으로 활용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과 참여 의 기회가 중요하다.

그러나 진정 그러한 생각으로 교육과 기회가 제공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참 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나는 어떤 스님께 한국 불교계는 여성의 우민화(愚民化)를 시도하고 있다고 항의한 적이 있다. 여성에게 자기실현의 용기를 북돋워주고 조 직 참여와 의사 결정에 함께할 기회를 더 많이 주어야 한다. 경전과 불법승을 예 경하는 것을 위에서 아래로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각종 위원회 속에 참여해서 생각과 행동을 조직화하고, 회의하고. 토론하고, 토론한 결과를 문서화하고 그 결 과를 테크놀로지를 이용해서 주위와 네트워킹해 삶과 연동하는, 불자들의 일상 의 삶이 담긴 공간과 조직이 필요하다. 내가 몸담고 있는 한 여성 불교 단체의 회 원 중에는, 오십이 되도록 평생 가족과 집의 테두리 안에서 살다가 이 단체 속에 서 여성들끼리 연대하고 활동하는 그 경험이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었다고 하는 분이 있다. 일정한 교육을 받은 후 번역가도 되고 통역자도 되어 나아가 해 외 불자들과 교류도 하고 대회 조직과 이벤트 기획에 참여하고 국제 불교계에 대

표로 나아가 국내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등, 이전에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 구미의 불교 붐은 한국 사회에 변화의 바람을 몰고 올 가능 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초기 불자들 중에는 기독교의 가부장적 신관을 비 판적으로 느끼고 반면 불교의 평등사상, 남녀평등의 정신이 좋다고 온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그들의 생각은 이렇다. “소위 고등 종교에서는 남성 중심의 교단과 남성적 가치관의 사상이 주류를 이룬다. 그 교단에서는 중요한 종교 의례나 조직 에서 여성은 배제되고 주변화되고 사소화되어진다. 설교와 의례는 남성이 주관 하고 여성은 청취자이며 들러리일 뿐이다. 종교의 주요 인물들은 거의 남성이며, 여성은 고려 대상도 되지 않는다. 설사 소수의 탁월한 여성이 있었다 하더라도 자 신을 드러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역사 속에 파묻혀 존재조차도 알려 지지 않은 여성이 허다했다. 그럼에도 종교 행위에 참여하는 사람의 대다수가 여 성이었다. 또한 여성은 교단과 성직자를 후원하는 주요 경제적 수급자였다. 여성 이 이렇게 경제적 정신적으로 주요한 후원자이면서도 남성 성직자들에게 부정 적인 존재로 취급되어, 불결하고 타락시키는 존재로 취급했던 것이다. 이런 가부 장적 구도와 남성이 설정한 진리 인식 방법과 수행법을 전제로 하는 조직과 문화 속에서는 여성 지도자들이 나올 수 없고 실제로 탁월한 선각자가 있다 해도 남성 이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고 또한 쉽게 인정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의 유명한 불교학자 리타 그로스의 말이다.

현재의 한국 불교가 봉건적이고 권위적인 종교에서 벗어나 초기 불교의 근본 사상으로 돌아가서 평화와 평등의 사상을 추구하는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여성 들의 역할과 자극이 큰 분기점이 되리라 본다. 『승만경』의 저 유명한 십대(十大) 서원(誓願)에 대해 아시는 분이 많으실 것이다. 주인공 승만 부인은 그 세 번째로 ‘섭수정법(攝受正法)’하겠다는 서원을 들고 있다. 그에 따르면, 정법을 받아 지니는 사람들은 “[네 가지]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대지를 건너가는 사람들”이다. 나아가

이들은, “청하지 않아도 도와주는 친구이며, 세상을 위한 진리의 어머니, 법의 어 머니[法母]”이다. 세상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그들의 친구가 되겠다는 것, 얼마 나 거룩한 맹세인가. 그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편견뿐만 아니라 스 스로의 편견도 점검해야 한다. 자신의 역량을 끌어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 능력을 개발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타를 통해 자신을 실현한다는 것 이 바로 대승 사상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불교에서의 사회적 실천은 공과 무아 의 입장에서, 전체와의 관계에 대한 고려 속에서 자신의 행동의 가치를 찾는 것이 다. 나의 현재의 행위는 나 혼자에 대한 배려나 고려에서 일어나서도 안 되며 그 렇게 될 수도 없다. 나의 행동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이들에게 영향을 준다. 나의 생각을 고양시켜 주체적인 눈으로 세상을 읽고 세상을 바꾸겠다는 마음을 내라는 것이 바로 이 승만 부인의 서원이 가르치는 바라 생각한다. 우리 어머니가 요즘 세상에 태어나셨다면 이 같은 서원을 이루기 위해 분주히 애쓰는 대보살이 되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리움이 문득 드는 요즘이다.

 

조은수 서울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 및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미국 버클리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규 장각 국제한국학센터 초대 소장,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지역 세계기록문화유산 출판소위원회 의장, 서울대 철학사상연 구소 소장, 불교학연구회 회장을 역임했고, 현재 서울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공저)로 『불교 과문집』, 『불교 페미니즘과 리더십』 등이 있고, 논문으로 「원효에 있어서 진리의 존재론적 지위」, 「불교의 경전 주해 전통과 그 방법론적 특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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