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 정명(正命)의 삶, 불교적 바른 경제생활__윤성식

정명(正命)의 삶,

불교적 바른 경제생활

윤성식

고려대학교 행정학과 명예교수

 

 

“개는 하루 종일 먹는 것만 생각하는 것 같아.” 은퇴하고 전원으로 들어가 개를 키우며 사는 친구가 하는 말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개를 비웃을 일은 아니다. 인 간 또한 생존을 위해 먹는 게 중대사였을 때는 그랬을 것이 틀림없을 터이기 때 문이다.

개나 인간이나 진화의 과정에서 생존을 위한 생물체로 변화해왔다. 인간도 지 금처럼 식량이 풍부해지기 전에는 항상 먹는 게 생존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과거에는 하루에 가장 중요한 일과가 먹는 것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수렵 채취 시 절은 말할 것도 없고 농경사회에서도 하루 종일 농사일만큼 인간의 생활을 많이 차지하는 일은 없었다.

인간의 본능은 욕망과 직결된다. 인간의 욕망은 진화의 과정에서 생존을 위한 수단이었다. 우리는 성욕이라는 욕망이 있기에 후손을 남겼고 인류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는 식욕이 있기에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식욕 중추가 훼손되면 옆에 식량을 두고서도 굶어 죽는다. 먹고 싶은 욕망이란 알고 보면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기능이다.

성욕과 식욕만이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관계를 맺고자 하는 욕망도 생존을 위해 중요하다. 수렵 채취 시대에는 여럿이 협력할 때 식량을 더 많이 얻 을 수 있었다. 외톨이는 사냥할 때도 불리하고 과일을 채취할 때도 불리했다. 사 람은 고립되면 외로움을 느끼고 다른 사람을 그리워하는 게 인류가 오랜 기간 동 안 진화해온 결과이다. 성욕, 식욕, 관계의 욕구 등은 모두 우리에게 만족감을 준 다.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이러한 본능들은 진화의 과정 속에서 우리의 유전자 에 깊이 각인되었다.

우리의 삶은 욕망이라는 충동에 의해 조절되고 흘러간다. 욕망은 우리를 생존 하게 만드는 생화학적 장치이지만 우리에게 동시에 괴로움을 준다. 부처님은 사 성제를 통해서 인간의 괴로움의 실체를 파헤치셨다. 욕망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 들기도 하면서 우리에게 동시에 괴로움을 선물한다는 사실은 삶의 역설이다. 삶 이 모순인 이유는 이러한 역설에 부분적으로 기인한다.

부처님은 사성제를 통해서 고통이 사라질 수 있음을 설하셨다. 8정도는 고통의 해결 방법이다. 8정도를 구성하는 여덟 가지 요소는 칼로 물을 벤 듯이 명확하게 구분될 수 없다. 연기법의 세계에서 다른 존재와 온전하게 구분되는 독립적 존재 란 없다. 어떻게 보면 존재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일체는 공하다.

불자는 누구나 ‘정견’으로 시작되는 여덟 단어에 익숙하다. 『중아함경』에는 정 견, 정사, 정어 등 여덟 가지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설한다. 『중아함경』은 ‘바른 행위, 즉 정업 때문에 바른 생활(정명)이 있다’고 말한다. 정명(正命)은 흔히 바른 생활이라고도 번역하지만 바른 직업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바른 생활, 바른 직업 모두 정명을 부분적으로 설명하는 단어이다. 정명이란 우리가 삶을 어떻게 영위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며 바르게 삶을 산다는 의미이다. 정명이란 삶을 영위할 때 직업을 통해 생존하는 측면을 이야기하며 먹고사는 경제생활에 초점

이 맞추어진 단어이다. 즉 진화의 과정 속에서 매일매일 일상을 살아가는 중생의 삶을 보고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 부처님이 내리신 처방이다. 불교적으로 생존 하면 정명(正命)인 것이다.

『잡아함경』은 “어떤 것이 바른 생활을 경영하는 것인가? 이른바 선남자는 그가 가진 돈과 재물에서 지출과 수입을 맞춰보며 빈틈없이 관리하여 수입이 많고 지 출이 적거나 지출이 많고 수입이 적게 하지 않아야 한다. 마치 저울을 잡은 사람 이 적으면 보태고 많으면 덜어 평형을 이뤄야 그만두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선 남자도 재물을 헤아려 수입과 지출을 알맞게 하여 수입이 많고 지출이 적거나, 지 출이 많고 수입이 적게 하지 않아야 한다”고 설한다.

『잡아함경』의 구절을 보면 바른 생활이란 돈이 들어오고 나가는 경제생활에서 수입과 지출이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막스 베버는 위대한 사회학자이며 가히 사 회과학의 천재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막스 베버는 불교에 대해 잘못된 시각을 가

졌다. 불교를 허무주의적이고 수동적인 종교로 잘못 파악한 나머지 자본주의 경 제생활에 부합하지 않는 철학으로 오해한 것이다. 경전을 보면 부처님의 친시장, 친자본적 말씀은 반복된다. 부처님의 개혁적이고 시장자유주의적 관점이 당시 새롭게 등장했던 신흥 상공업자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신흥 상공업자들은 불 교의 혁신적인 교리에 매료되어 대거 불교에 귀의하며 귀의 후에는 불교를 대폭 지원했기에 불교를 상업 불교(mercantile Buddhism)라고 부르는 학자도 있다.

부처님이 생각하신 정명(正命), 즉 바른 생활, 바른 직업이란 바른 경제생활을 의미한다. 바른 경제생활은 수입과 지출의 균형이 맞는 것이다. 수입과 지출의 균 형이 맞는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경전은 수입과 지출의 균형에 관한 부처님의 뜻 을 잘 설명하고 있다.

『잡아함경』은 “만일 선남자가 재물이 없는데도 마구 뿌려 쓰면서 생활한다면 사람들은 모두 그를 우담발(優曇鉢) 열매라고 부를 것이다. 그는 어리석고 탐욕이 많아 그 뒷날을 돌아보지 않기 때문이다. 또 어떤 선남자가 재물이 풍부한데도 그 것을 쓰지 않는다면 주위 사람들은 ‘이 어리석은 사람은 굶어 죽는 개(餓死狗)와 같 구나’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선남자는 가진 재물을 잘 헤아려 수입과 지출을 알맞게 해야 하나니, 이것이 바른 생활을 경영하는 것이니라”라고 설한다.

수입과 지출의 균형은 지나치게 사치스럽지도 않고 지나치게 인색하지도 않은 중도적 삶이다. 바른 생활은 바른 업과 관련된다. 『중아함경』은 바른 행위, 즉 정 업 때문에 바른 생활(정명)이 있다고 말한다. 행동, 말, 뜻이 바르면 바른 생활을 영 위할 수 있다. 『별역 잡아함경』은 “믿음과 계행과 선정 지혜 닦으며, 바른 생활로 청정하게 지내면, 양반과 부자가 될 뿐 아니라 이와 같은 일 모두 얻으리”라고 설 한다. 만약 경제생활이 청정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바른 생활이 되지 못한다.

요즘에는 누구나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말한다. 부처님 당시에는 직업에 귀 천이 있었다. 부처님도 ‘천한 직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신다. 인도에는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의 4계급이 있었다. 수드라 밑에는 불가촉천민이라는

계급이 있었으니 사실상 인도는 4계급제가 아니라 5계급제로 보아야 한다. 불가 촉천민은 누구나 꺼리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다. 대표적인 직업이 도살이다.

부처님은 어떤 직업을 천한 직업으로 보셨을까? 『중아함경』에는 ‘주술’, 즉 점 을 치고 별자리를 보고 길흉을 말하는 직업이 삿된 직업으로 표현되어 있다. 바른 행동, 말, 뜻이 바른 생활을 영위하게 만든다면 바른 행동, 말, 뜻으로 일하면 어떤 직업이든 바른 생활이 된다. 남을 속이고 남을 괴롭히면서 경제활동을 하면 바른 생활이 아니다. 아무리 먹고살기 힘들다고 하지만 남을 속이고 남을 괴롭히면서 돈을 벌고 살아가는 생활은 불교적으로 그릇된 것이다.

대부분의 불자는 불교를 허무주의적이고 수동적이며 소극적인 종교로 착각한 다. 출가자의 청빈한 생활이 자칫 금욕적으로 오해되어 재물과 멀리하는 생활을 바른 생활로 동일시한다. 지금의 눈으로 출가자의 생활을 보면 금욕적인 불교로 생각된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전혀 다른 사실이 자리 잡고 있다. 불교 출 가자의 생활이 지나치게 사치스럽다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불교는 당시 인도 종 교계의 기준으로 보면 금욕적이지 않은 종교이다. 불교는 사치와 인색을 떠난 중 도를 추구하는 종교다.

부처님의 사촌이며 부처님을 괴롭히고 교단에 심대한 타격을 가했던 제바달다 는 부처님에게 보다 엄격하고 금욕적인 종교 생활을 건의한다. 그중 하나가 분소 의를 입자는 건의다. 즉 시체에서 벗겨낸 옷을 기워서 분소의를 만들어 입자는 요 구였다. 초기 불교 교단에서는 분소의를 입었으나 병들어 죽은 사람의 옷으로 만 든 분소의가 병을 유발한다는 왕의 주치의 지바카의 조언으로 부처님은 분소의 를 금지하셨다. 고기를 먹지 말자는 요구 등 제바달다의 요구를 거절하자 제바달 다는 추종자를 데리고 교단을 떠났다. 경전에 기록된 숫자를 보면 떠난 출가자의 숫자가 남은 출가자의 숫자보다 더 많다. 현장 법사가 천 년이 지난 뒤에 인도에 와보니 그때까지도 제바달다의 추종자들이 왕성하게 교단 활동을 하고 있었다니 그 위세를 알 만하다.

부처님은 경제생활에 있어서도 중도를 추구하셨다. 따라서 우리가 중도적인 경제생활이 아닌 치우친 경제생활로 삶을 영위한다면 바른 생활이 아니다. 전 세 계적으로 명상 열풍이 불면서 선에 대한 비불교인의 관심도 높아졌다. 자칫 이러 한 열풍이 좌선에 대한 지나친 맹신으로 이어지지는 않을까 걱정된다. 선수행은 불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괴로움의 소멸을 위한 하나의 방법에 불과하기 때 문이다. 괴로움을 소멸하기 위해서는 한두 가지로는 부족하다. 부처님이 말씀하 신 여덟 가지 바른 길을 갈 때 괴로움은 소멸될 수 있다.

옥스퍼드대학에서 처음으로 경제학 전공이 개설될 때 반대 의견 중의 하나가 ‘경제적 측면이 모든 것을 압도한다’라는 우려였다. 그러한 우려대로 세상은 경제 적 측면이 압도한다. 요즘 자식이 결혼하지 않아 부모의 애를 태우는 경우가 많 다. 만약 어떤 사람이 좋은 신랑감을 소개한다면서 ‘다 좋은데 경제적 능력이 뒤 떨어져서…’라고 한다면 과연 자기 딸에게 소개나 할까? 아무리 장점이 넘쳐나도

경제적 능력이 없다고 말하면 모두 손사래를 친다. 학벌이 부족하고 인물이 부족 하고 좋은 집안 출신이 아니어도 재력이 있다고 하면 솔깃해한다.

돈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불교적으로 살기 매우 어렵다는 것 을 실감한다. 지난 10년 동안 불교 인구가 대폭 감소해 불교계를 충격에 빠뜨렸 다. 천만이 넘었던 불교 인구는 이제 700만 정도인데 이마저도 허수가 많다. 사찰 재정의 가장 중요한 지표는 사월초파일에 들어오는 재정 수입이다. 최근 1, 2년 사이에 거의 모든 사찰에서 재정 수입이 감소했다. 40% 이상 감소한 곳도 상당수 이다. 바른 경제생활이란 꼭 개인의 경제생활만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사찰의 경 제생활, 사회의 경제생활도 당연히 포함한다. 개개인의 삶이 정명(正命)이어야 하 지만 사찰의 경제생활, 나아가 모두의 삶이 모두 바른 생활이어야 한다.

8정도는 어느 하나 고립되어 실현될 수 없다. 즉 바른 견해가 없는데 바른 말을 할 리가 없다. 반대로 바르지 못한 말을 하는데 바른 견해가 있을 수 없다. 정명이 란 8정도의 나머지 일곱 가지 요소와 함께한다. 우리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힘든 길을 갈 때 8정도의 여덟 가지 요소는 서로 연기하며 우리의 삶을 이끌어간 다. 바른 생활이란 바른 견해, 바른 말, 바른 행동 등으로 표현될 수 있고 바른 견 해는 바른 생활, 바른 말, 바른 행동으로 표현될 수 있다.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 논한다는 것 자체가 연기법에 어긋나며,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나중 인가를 따진다는 것도 불교의 진리와 어긋난다. 정명의 삶을 사는 불교 수행자는 8정도의 어려운 길을 가는 수행자이고, 괴로움이 소멸되어가는 삶 속에서 우리는 정명의 삶을 본다.

 

윤성식 고려대학교 행정학과와 미국 오하이오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일리노이대에서 회계학 석사를 거쳐 UC버클리대 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공인회계사이며, 동국대에서 불교학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텍사스대학(오스 틴) 경영대학원 교수와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는 동 대학 명예교수로 있다. 국회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 『부처님의 부자 수업』, 『불교자본주의』, 『공공재무관리』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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