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 장경호 거사__박원자

대원 장경호 거사

대중 불교 시대를 연

이 땅의 유마

박원자

작가

 

 

장경호 거사의 평전을 쓰게 되었을 때, 그를 알던 분들로부터 들은 이야기 중 가장 감동을 받은 증언은 다음과 같다.

“한평생 새벽에 두 시간, 잠자리에 들기 전 두 시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참선 수 행을 한 분입니다. 예순이 넘어서는 매해 한 차례 3개월 동안 안거에 드셨습니다.”

공부가 깊은 분이었구나 생각했는데, 그분에 대한 자료를 찾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 증언을 들으면서 훨씬 수행이 깊고 훌륭한 수행자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생전에 교분이 두터웠던 성수 스님(조계종 원로의원)은 묵묵히 앉아 수행하는 모습 이 마치 저 옛날의 조사 스님을 보는 것 같았다며, 어느 경계에서도 절대 속지 않 는 경지에 이르렀던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동국제강 그룹 창업주이자 한국 불교 중흥과 불교방송의 모태가 되는 재단법인 대한불교진흥원 설립의 기틀을 마련한 대원(大圓) 장경호(張敬浩, 1899~1975) 거사.

그가 이십대부터 돌아가기 전까지 지녔던 단 하나의 믿음은 ‘심조만유 (心造萬有)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였다.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는, 즉 마음 은 무한한 공덕과 지혜와 힘을 가졌 다는 것을 그는 이십대에 불교와 본 격적으로 만나면서 직감한다. 『선어 록(禪語錄)』을 읽으면서 발심해 참선 을 시작했고, 스물일곱 살에 통도사 보광전으로 안거를 나러 들어갈 만큼 신심이 깊었다. 젊은 날, 하던 일을 접어두고 수행하기 위해 3개월 동안 안거에 들었던 걸 보면 수행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다. 훗날 그때의 일을 두고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스물일곱 살이던 해에 통도사 하안거 결제에 동참해서 구하 스님으로부터 법 문을 듣고 참선을 지도받으면서 한철을 났다. 해제일이 되던 날 대웅전에 꿇어앉 아 스스로 서약을 했다. 이제 나는 상업에 종사해 크게 돈을 벌리라. 하여 그 모든 것을 불교 발전에 바치겠다고 맹서한 후, 평생 점심 한 끼 사 먹는 일 없이, 용돈 한 푼 쓰는 일이 없이 돈을 벌었다. 부처님의 도움이신가, 그것은 큰돈이 되었다. 첫 안거 이후, 부처님의 가피로 살아온 것 같다.”

서원과 가피가 깊었기 때문일까. 그 후 그는 사업의 성장과 함께 국가와 부처님 의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았다. 젊은 날의 뜨거운 서원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 ‘마음의 힘’에 대한 확신과 실천이 어떠한 인생을 살게 하는지 생각해보게 한다.

서른두 살에 가마니 장사를 시작으로 해서 1949년, 한국전쟁이 나기 직전에 못 을 제조하는 회사를 인수했는데, 전쟁 때 폭발적인 못 수요로 인해, 1954년 지금 의 동국제강을 창업했다. 그리고 20년도 안 되어서 재계 서열 순위 5위 안에 드는 기업으로 성장시켰고,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자신의 개인 재산 전부인 30억 6,000

만 원(현 시가 수천억 원에 달함)을 불교 중흥을 위한 자금으로 회향했다.

그는 사업을 하는 와중에도 종종 안거에 들었고, 일제 강점기의 척박하고 고단한 환경 속에서도 금강산 마하연에까지 가서 수행 정진하는 열의를 보였다. 용성・만공・한암・동산・효봉 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들을 찾아다니면서 법을 묻고 수행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대단한 신심의 소유자이자 수행에 대한 실천력이 강한 수행자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전쟁 중에도 마음공부에 몰두한 사람

그는 기업가라기보다는 구도자였던 사람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의 일이다. 1949년, 가마니업과 창고업을 겸하면서 사업을 하고 있던 그에게 못 장사를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그는 그 회사를 인수했고, 예기치 않게 전쟁이 나서 피난처에 판잣집을 짓느라 못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큰돈을 벌어 후일 동국제강을 창업하는 데 종잣돈이 되었다. 부산에 회사를 두어 전쟁 중에도 참화를 입지 않고 회사가 승승장구 성장했던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복인인지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감동적인 것은 그때 그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부에 동요하지 않고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산사를 찾아 정진했다는 것이다. 금정사로 피난을 와서 결제를 하고 있던 효봉 스님을 찾아가 함께 정진했는데, 그의 나이 쉰셋일 때였다. 당시 그는 효봉 스님에게 세상을 위해서 뜻깊은 일을 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그 말을 들은 효봉 스님이 우리나라가 성장하려면 불교가 발전해야 한다면서 많은 사람에게 불법을 알리는 일에 힘써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그는 개인이나 사회 혹은 국가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있는 것임을 일제 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전쟁 등 가파른 역사를 거쳐오면서 깨달았던 것 같다.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의 열쇠는 참나의 발견, 즉 본래의 청정한 마음을 깨닫는 것에 있음을 확신한 그였다. 인간 정신을 올바로

이끄는 것은 양심을 일깨우는 종교 운동이 가장 중요하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자신이 곧 부처임을 믿고 실천하는 일만이 인간의 존엄을 드러내는 일이며, 그러한 자아가 실현되었을 때 불국토를 이룰 것이라는 것이 그의 믿음이요 철학이었다. 해서 평생 그가 지향했던 좌우명은 ‘자아를 발견하여 지상에 낙원(불국토)을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펼쳤던 대중 불교 운동의 목적이기도 했다.

그는 평소 ‘내 재산은 나의 것이 아니다. 잠시 위탁 관리할 뿐이다. 그래서 더욱 한 푼도 헛되이 쓸 수 없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대중 불교 운동의 선구자

장경호 거사는 한국 현대 불교사에서 대중 불교 시대를 연 선구자로 평가된다. 이론을 갖춘 전문적인 운동가는 아니었으나, 대승불교가 지향하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위해서 품을 판 발걸음은 어느 전문가 못지않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한국 불교에 무엇이 가장 긴요한가를 묻고 경전을 쉽게 풀어 일반에게 보급하는 것이 답이라고 진단했다. 산중의 한국 불교가 대중 속으로 나오는 길은 불서를 보급해서 대중을 일깨우는 것에 있다고 판단한 그는 불교를 전문으로 출판, 보급하는 불서 보급사를 설립해서 운영했다. 그리고 수행과 교화를 위한 불교 대중화 운동을 펴야 한다는 생각으로 수많은 노력 끝에 1973년 남산에 대원정사를 건립했다.

대원정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 불교의 산실이라고 일컬어지는 초현대식 5층 건물로 당시에는 꽤 큰 반향을 일으켰다. 대원정사는 산사에만 머물러 있던 고승들을 도시로 나오게 해 대중에게 법문을 하게 하면서 대중 교육의 문을 활짝 여는 데 일조했다. 한국 불교가 늙고 낡은 것에서 벗어나려면 대중 교육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믿었던 그는 대원정사 내에 대원불교교양대학을 열었다. 당시 동국대 불교대학 교수들이 대거 참여했고, 수강생들에게 저녁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차비까지 주면서 공부를 시켰다고 한다. 한국 불교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대원불

교교양대학은 오늘날 여러 사찰이나 단체에서 행하고 있는 불교교양대학의 모델이 되었다.

(禪)이 산중에 사는 고승들의 전유물로부터 벗어나 시중으로 내려와야 한국 불교가 중흥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남산의 초현대식 건물에 선방을 마련한 그는 호남 제일의 선사로 불렸던 해안 스님을 직접 부안 내소사로 찾아가 삼고초려한 끝에 도심으로 나오게 했다. 참선을 수행하게 하고 24시간 선방을 개방한 것이다. 그 후 시민 선방이 각광을 받았던 걸 보면 그는 참으로 시대를 앞서간 사람이었다.

그의 선진적인 모습은 이에만 그치지 않았다.

방송을 통해 불교의 가르침을 전파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사후 그의 아들 장상문 거사에 의해 개국의 꽃을 피웠고, 출판과 잡지를 통한 문서포교 서원도 이루어지게 되었으니 그의 선진적인 생각은 한국 불교 발전의 파종 역할을 했다 할 것이다.

회향

생로병사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은 누구보다 철저히 수행했던 그에게도 찾아왔다. 그는 둘째 아들 장상문이 대사로 있던 스웨덴의 여행길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다. 그리고 여섯 아들 중 가장 불심이 깊었던 둘째 아들에게 불사의 뒷일을 부탁했다. 유엔대사를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장상문은 몇 년 후, 아버지에게서 받은 주식을 팔아서 불사를 하는 데 전부 쏟아부었다. 그렇게 해서 이 땅에 불음(佛音)을 전하는 불교방송국이 탄생했고, 두 부자가 내놓은 많은 정재(淨財)는 이 땅의 불교 발전을 위해 골고루 쓰였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조그마한 암자에서 이렇게 고백했다고 한다.

“몸이 몹시 아픈 걸 보면 공부가 부족했습니다. 사업이네 뭐네 돌아다니면서 제대로 수행을 하지 못한 게 후회됩니다. 만약 내가 다시 건강을 회복한다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수행에만 전념하고 싶지만, 그 일은 기대할 수 없을 것 같군요. 다음 생에 다시 마음공부를 하겠습니다.”

한평생 하루 네 시간 이상 참선을 했으며 시시때때로 안거에 들어 용맹 정진했던 그의 고백은 숙연함마저 들게 한다. 그는 뼛속까지 스며드는 죽음의 고통 앞에서 15일 정도 혼수상태에 들었다고 하는데,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자 펜을 찾았다고 한다. 그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써서 세상에 전한 메시지는 이렇다.

‘심즉시불(心卽是佛), 마음이 곧 부처이니라.’

항상 분란이 끊이지 않던 종단에 그가 얼마나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정재를 출연했는지, 하화중생을 위해 얼마나 깊은 고심을 했는지, 또 얼마나 검소하고 도덕적인 생활을 했는지, 짧은 지면에 다 말할 수 없음이 아쉽다. 그는 세상을 불이(不二)로 보고 살았던 이 땅의 유마 거사이며, 이 나라 대중 불교 운동의 단초를 마련한 선각자요, 불교 중흥을 위해 왔다간 참 보살이었다. 그러나 장경호라는 이름이 내뿜는 미덕은 ‘마음을 꿰뚫어 참 나를 발견하려 노력했던 구도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나는 평전의 마지막을 이렇게 썼다.

“일흔일곱의 한평생을 살다간 그의 이름 앞에는 많은 수식어가 붙는다. 동국제강 창업주 장경호, 수십억 원을 이 땅의 불교 중흥을 위해 쾌척한 불교인, 검소하고 도덕적이었던 재벌 회장, 한평생 정진을 멈추지 않았던 참선 수행자. 그러나 그가 세상에 남긴 가장 큰 미덕은 ‘마음이 일체 모든 것을 만들며 세상의 모든 것은 마음으로 이루어졌으니, 이를 믿고 깨달아야 참사람(眞人)이 된다’는 그의 마지막 메시지이다. 그는 삼십 년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인류가 탐색해야 할 단 하나의 정신 ‘마음공부’를 화두로 남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우리에게 ‘현재’로 있다.”

박원자 숙명여자대학교에서 중국문학을 전공했고, 동국대 역경위원을 지냈다. 지금은 불교 전문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인생을 낭비한 죄』, 『나의 행자시절』, 『이 땅의 유마 대원 장경호 거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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