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부끄러운 불자 이야기__안동일

나의 부끄러운

불자 이야기

안동일

변호사, 동산반야회·동산불교대학 명예이사장

 

 

팔순이 넘은 지금도 그렇지만 나의 생애는 ‘잘못-후회-반성-결심’, 다시 ‘잘 못-후회-반성-결심-또 잘못’의 연속이었다.

잘못의 예를 들자면 이렇다. 나쁜 버릇처럼 어떤 잘못이 이어지다가 그 잘못을 깨닫고 후회와 반성을 하고 다시는 안 그런다고 결심하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어 느새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것이다. 심지어 새벽 기도 시간에 합장하고 부처님께 앞으로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을 했건만 그 다짐이 오래가 지 못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얼마 전 젊어서부터 있어왔던 오래된 나쁜 버릇을 고쳐보려고 몇 번째 또 결심을 했는데 앞으로 얼마나 견딜지 알 수 없다.

나의 나쁜 잘못이나 버릇은 아마도 고황(膏)에 들어 고치기 어려운 병인지, 아 니면 나의 불심이 여리거나 의지가 약해서인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금연도 몇 번 금연-흡연을 반복하다가 기어이 협심증을 앓게 돼서야 끊게 되었다. 어떻든 후회 와 반성으로 이어진 부끄러운 삶임에는 틀림없으리라.

나는 어려서부터 어머니(大悲心)의 손에 잡혀 가끔 절에 다녔다. 최초의 기억은 다섯 살 때 예산 향천사에 가서 보산 큰스님으로부터 대추씨로 만든 단주(短珠)를 선물로 받은 행운도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를 따라다녔지만 불교에 대한 공부나 신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집에서도 새벽마다 수월관음도 앞에서 염불하시는 어머니를 늘 대하면서도 함께하지 않았고, 『천수경』을 암송하시는 곁에서도 딴전 만 피우기 일쑤였다. 오히려 초등학교 때는 친구들을 따라 교회에 가서 찬송가를 배우기도 했다. 대학에서 황산덕 교수와 서돈각 교수 등 훌륭한 선지식을 뵈었지 만 불교가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어느 해인가 방학 때 속리산 중사자암에서 공부를 하다가 새벽과 저녁 예불에 참석하면서 어렴풋이나마 불교적 생활에 익 숙해졌고, 공부가 잘 안 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반야심경』을 외우기도 했다. 그 러나 그때뿐이었다. 4·19혁명 이후 소위 운동권 학생으로 떠돌았고, 법조인이 된 후에는 일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불교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졌다.

그러다가 유신정권의 긴급조치 말기 시대에 변호사로 반정부 인사들의 변론을 많이 맡다 보니 법정 투쟁이 잦아졌고, 변론에 열중한 나머지 울분을 토로하고 격 앙되기도 해 차츰 분노가 쌓여갔다.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는 모든 감정 중에서 가장 끔찍하고 광적인 감정은 ‘분노’

라고 정의한다. 『화』를 쓴 틱낫한 스님은 분노를 마음속에서 날뛰는 호랑이에 비유한다. 달라이 라마 존자도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감정(부정적인 마음)에는 자만심, 거만함, 시기심, 질투, 배타적인 마음 같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 가운데에서도 가장 나쁜 감정은 미움과 분노이다. 왜냐하면 이 감정들은 자비심과 이타심을 갖는데 큰 장애가 되고, 인간의 가치와 마음의 평화를 파괴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가르침이 있어도 나의 경우 탐·진·치, 삼독(三毒) 모두 업장이 두꺼운데 그 가운데 진심(嗔心)은 지금까지도 불치의 병이다. 젊어서 어머니께서 아무 때나 화를 잘 내는 아들의 못된 성질을 아시고 상의 주머니에 단주를 넣어주시면서 법정에서나 일상에서 화가 날 때마다 단주를 손에 쥐고 속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하면서 참아보라고 하셨다. 처음엔 화가 잔뜩 난 후에야 단주 생각이 나기도 하고 잘 안 되더니 오래 연습하니까 효과를 본 것 같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단주를 주머니에 넣거나 손목에 차고 다닌다.

평소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신 무진장 대종사로부터 들은 옛이야기 가운데 금강산 홍도 스님의 ‘수사송(受蛇頌)’에 얽힌 설화가 있다. 홍도 스님이 생전에 절 뒷산에 올라 쉬려고 자리를 깔려는데 바람이 불어와 자리가 걷히기를 두세 번 하니까 짜증이 나서 버럭 화를 낸 일이 있었고, 이 때문에 뱀의 몸을 받은 후 절집 아궁이 앞 재바닥에 꼬리로 써놓은 게송이 수사송이다. 수사송의 끝 구절이다.

“嗔心一起受蛇身 嗔心能斷至菩提 心裏無嗔眞布施

口中無嗔妙吐香 面上無嗔眞供養 無喜無嗔是眞佛

화냄 한 번에 뱀의 몸을 받느니, 화냄을 능히 끊을 수 있으면 보리심에 이르네. 마음속에 화냄이 없으면 참 보시이며, 입 안에 화냄이 없으면 묘한 향기가 나오고, 얼굴에 화냄이 없으면 참 공양이로다. 기쁨도 화냄도 없으면 이것이 참 부처일세.”

화 잘 내는 나의 잘못은 오래된 악습으로 지금도 후회와 반성의 연속선상에 있으

나 후회-반성을 계속하다 보니 나이 때문도 있겠지만 요즘은 조금 나아진 것 같다.

수행은 지식이 아니라 체험이라고 하지 않는가? 지식은 누구나 소유할 수 있지만 체험은 각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내가 불교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된 것은 나이 50이 넘어서였다. 그사이 불교 관련 서적들을 틈틈이 읽어본 일은 있지만, 마음을 잡고 공부한 것은 이때다. 1993년 봄 언론인으로 나에게는 정신적인 지주이셨던 아버님이 타계한 후 도저히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그해 여름 송광사로 단기 출가를 한 것이 불교 공부의 계기가 되었다. 나의 불명 ‘관해(觀海)’는 당시 보성 큰스님이 지어주신 것이다. 서울에 돌아와 바로 조계사 앞의 동산불교대학 3기로 입학해 변호사 업무로 바쁜 일정에도 2년간 열심히 공부했다. 특히 그곳은 재가 불자들의 모임인 데다 당시로는 파격적으로 동국대학교 불교 과목보다 많다는 18개 과목에, 강사진이 훌륭하고 무진장 학장 스님이 열심히 지도해 나도 모르게 점차 환희심과 신심이 두터워졌다. 또한 동산불교회관 3개 법당의 주불이 모두 아미타불이어서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생활화하기 시작했다. 시나브로 염불 행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염불에 관해 특별히 할 이야기가 있다. 시인인 아내(錦坡)도 동산불교대학 통신반을 졸업했는데 졸업 과제로 ‘나무아미타불’ 10만 8,000번 사불(寫佛)을 해 ‘아미타상’을 받았다(1면에 108번 쓴 총 1,000면 분량). 당시 두 딸이 결혼 후 오래도록 아이를 갖지 못해 아내가 열심히 기도했는데, 한글과 한문으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10만 8,000번 사불을 두 번씩이나 한 결과 기적적으로 두 딸 모두 아이를 출산하게 되었다. 아내는 물론 나 역시 염불의 지극한 힘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나는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틈나는 대로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고 있다.

내가 대한불교조계종에 깊은 인연을 두게 된 것은 1994년 조계종단에 개혁정화가 일어나 당시 총무원장으로 취임하신 월주 큰스님의 부탁으로 법률 고문을 맡으면서부터다. 최근까지 여덟 분의 총무원장을 모시면서 27년간 종단의 각종 송사와 법률 자문, 특히 1998년 총무원 청사 폭력 점거를 되찾는 사건까지 처리

했다. 또 1994년 전국신도회가 와해되자 김재일 법사와 함께 ‘한국재가불자연합’을 결성해 ‘중앙신도회’가 정비될 때까지 상임회장을 맡게 된 것이 재가 단체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 후 동산반야회·동산불교대학의 모든 행사에 거의 빠짐없이 활동했다. 1998년 8월 6일 강원도 건봉사에서 출범한 ‘전국염불만일회’에 참여해 회향일인 2025년 12월 21일까지의 만일염불을 다짐했고(‘만일’은 햇수로 27년 5개월이다), 염불 수행 단체인 ‘붓다클럽’(지금은 ‘동산로터스’)의 초대 총재를 지냈으며, 시민사회 단체인 ‘공동체의식개혁국민운동협의회 상임의장’, ‘경제정의실천불교시민연합’ 공동 회장으로도 일했다.

2008년 김재일 법사가 입적한 후 동산반야회·동산불교대학 이사장, 한국불교교육단체연합회 회장, 전국염불만일회 회장을 맡으면서 더욱 열성껏 신행-교육-포교에 정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법회 때마다 인사말도 하게 되었고, 해마다 열리는 염불정진대회에서 법문도 하게 되어 이를 바탕으로 서투른 잡문이지만 불교 관련 책자도 발간한 바 있다.

그 결과인지 재단법인 대한불교진흥원의 ‘대원상-포교대상(단체)’과 조계종의 ‘불

자대상’ 수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상복이 많아 서울지방변호사회의 최고 영예인 ‘명덕상’과 서울대학교법과대학동창회의 ‘자랑스러운 법대인’에 현창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모두 허명(虛名)에 불과하다. 수행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내가 불교인으로 결정적인 감화를 받은 것은 2010년 여름 인도 다람살라에 가서 달라이 라마 존자와 까르마빠 존자를 친견한 일이었다. 달라이 라마 존자는 14대째, 까르마빠 존자는 17대째 환생한 성인이라고 한다. 두 존자의 법문을 들으면서 여러 대에 걸친 법력이 아니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 당시 까르마빠 존자는 25세의 젊은 나이인데도 메모 한 장 없이 막힘이 없었고 ‘가짜 수행자’가 아니라 ‘진짜 수행자’가 되라는 요지의 뼈아픈 법문도 탁월했다.

특히 달라이 라마 존자께서 『반야심경』의 주(呪) ‘가테가테 파라가테 파라상가테 보디스바하’를 설명하는 가운데 자신도 아직 깨치지 못했다면서 단박에 깨치려고 하지 말고, 이생에 못 다 하면 내생에, 내생에도 못하면 내내생에 이룬다는 각오로 항상 보리심을 가지고 부정적인 생각을 멀리하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수행이 습(習)이 되도록 정진하라는 경책(警責)을 주셨다. 우리 주위 불가(佛家)에서 흔히 듣는 ‘몰록’이니 ‘한 소식’이니 하는 말과는 대조적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후회-반성을 계속하는 부끄러운 수행의 삶도 언젠가는 습화(習化)되어 깨우침에 이를 것이라는 존자님의 따뜻한 가르침이었다. ‘구경열반(究竟涅槃)’을 위해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을 이루려면 ‘가테가테 파라가테 파라상가테’로 계속 정진하라는 『반야심경』의 뜻이리라.

14대에 걸쳐 수행해온 85세의 노구에도 새벽 3시에 일어나 오체투지와 명상을 계속하고 계신 존자께서 새벽마다 외우는 아래 게송을 그 후 나도 매일 새벽 기도할 때마다 따라 하고 있다.

우주가 지속하는 한, 모든 생명 가진 존재들이 남아 있는 한, 그때까지 내가 머물러, 세상의 모든 불행을 몰아내리라.

 

안동일(安東壹) 1940년생, 법명 관해(觀海). 경기고·서울대학 교 법대를 졸업했고, 서울대·고대·연대·동국대 최고위과정 등을 수료했다. 대한불교조계종 등 법률 고문, 한국재가불자연 합 상임회장, 경제정의실천불교시민연합 공동 회장 등을 역임했 다. 현재 동산불교대학 명예이사장, 전국염불만일회 회장, 대한 불교조계종 법률고문, 홍익법무법인 대표변호사로 재임하고 있 다. 주요 저서로는 『기적과 환상』, 『쓴 소리 바른 소리』, 『새천년 과 4·19정신』, 『깨달음의 길을 찾아서』, 『행복의 길, 정토의 길』 등이 있다. 서울지방변호사회 ‘명덕상’, 대한불교진흥원 ‘대원상 포교대상’(단체), 대한불교조계종 ‘불자대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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