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 세상 읽기|『달라이 라마의 지혜 명상』 외__정여울

책 읽기 세상 읽기

1. 자비라는 이름의 살아 있는 지식

『달라이 라마의 지혜 명상』

자비라는 낱말은 마치 마법의 버튼 같아서, 그 말을 발 음할 때마다 내 마음의 토양에 단비가 내리는 느낌이다. ‘자비’를 발음할 때마다, 원망의 마음이 잦아들고, 슬픔의 기운이 가라앉는다. 자비라는 단어에 오색빛깔 솔이 달 려서, 울퉁불퉁 모가 나버린 내 마음을 사락사락 쓸어주 는 것만 같다.

나에게 ‘자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달라이 라마다. 달라이 라마가 평생 하루도 빠짐없이 실천했던 명 상 속에는 항상 이 문장이 깃들어 있다. “허공이 존재하고 중생이 존재하는 한, 저 역시 세상에 남아 고통을 없애게 하소서!” 살아 있는 한 우 리가 포기해서는 안 될 감정, 그것이 타인의 고통을 위로해주는 일임을 달라이 라마 는 매일 다짐하는 것이다. 자비는 살아 있는 한 우리가 매일매일 느끼는 축복이다.

『달라이 라마의 지혜 명상』을 읽으며 내가 가장 집중한 것도 바로 ‘자비’와 관 련한 메시지였다. 달라이 라마가 자비 명상을 무려 칠십여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 이 해냈다는 것이 놀랍다. 살아 있는 한 이 세상에 고통받는 존재들의 슬픔과 아 픔을 보살펴주겠다는 서원. 고통을 사라지게 하는 것. 고통을 위무한 것.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는 모든 마음이 자비였구나. 그러니까 나의 고통이 줄어들

때마다, 내가 누군가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때마다, 자비라는 기적은 매일 매일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달라이 라마를 통해 간신히 깨달았다. 자비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자비는 지식이고 배움이며 깨달음이라는 것을. 그것도 엄청난 노력과 통찰 력을 통해 매일 길러야만 간신히 커질 수 있는, 훈련과 반복의 결과라는 것을.

자비를 실천한다는 것은 나의 고통과 타인의 고통이 정확히 같다는 것을 깨닫 는 인식의 변화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자비를 베풀다’라는 시혜적인 표현보다는 ‘자비를 실천하다’는 표현이 훨씬 좋다.

『달라이 라마의 지혜 명상』에서 내게 가장 호소력 있게 다가온 부분도 바로 ‘자 비’에 관한 달라이 라마의 혜안이었다. 달라이 라마는 불쌍한 사람에게 느끼는 동 정심은 결코 ‘자비심’이 아님을 명확히 한다. “사람들은 흔히 자비심을 일종의 동 정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동정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열등하게 여기고 좀 더 나은 자신이 자비를 베푼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동정은 바른 자비심이 아닙니다. 진정한 자비심은 내 자신이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피하고 싶 어 하듯 남들도 그와 같이 행복을 원하며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깨 달을 때 생겨납니다.” 그가 나보다 힘든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이나 연민 자체는 결코 자비심이 될 수 없다.

달라이 라마는 자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가르쳐준 사람이다. 자비는 일시적 감정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태도에 가까운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한 사람을 향 한 특정한 감정이 아니라 타인의 아픔을 바라보는 관점, 내 삶을 아름답고 풍요롭 게 가꾸는 데도 분명히 도움이 되는 ‘인식의 전환’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마치 감 미로운 음악처럼 아름다운 수행자의 ‘게송’을 듣다 보면, 깨달음을 향한 길 위에 서 우리가 느끼는 가장 큰 축복은 자비뿐 아니라 생의 아름다움이라는 생각이 든 다. 나는 이 책을 통해 깨닫는다. 수행은 자비의 실천이며 아름다움의 창조이기도 하다는 것을.

 

 

 

2. 작가들의 작가, 존 버거의 열정

존 버거의 3부작, 『끈질긴 땅』, 『한때 유로파에서』, 『라일락과 깃발』

 

작가들에게 ‘숨겨두고 읽는 책’이 뭐냐고 물어보면, 곧 잘 미소 지으며 들려주는 은밀한 독서 목록 리스트에는 꼭 존 버거의 책이 들어 있다. 미술 평론가로서의 존 버 거, 사회운동가로서의 존 버거도 물론 멋지지만, 내가 가 장 좋아하는 존 버거는 ‘소설가로서의 존 버거’다. 자전 적인 요소가 강한 존 버거의 소설에는 매일 흙을 만지며 농부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자연에 대한 깊은 친밀감이 살아 숨 쉰다. 그런데 존 버거의 언어는 향토성이 아니라 도시성을 더 강하게 띤다. 이 점이 흥미 로운데, 존 버거는 도시 문명의 풍요로움과 산업화된 농업의 한계를 모두 체험한 뒤, 그럼에도 농민의 삶을 선택했다. 이번에 출간된 세 권의 소설은 바로 존 버거가 농민의 삶을 선택한 뒤, 농촌에 서 깨달은 삶의 진실이 오롯이 담겨 있다. 존 버거가 부커상을 받으면서 한창 작 가로서의 명성을 쌓아갈 때는 1970년대 중반이었다. 이때는 이미 금융 자본주의 가 세계 역사의 흐름을 장악하기 시작했고, 농촌의 붕괴가 급격히 진행되는 상황 이었다. 존 버거는 농촌의 삶을 이해하고, 농부의 삶의 지혜를 존중하는 것이야말 로, 다가오는 미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임을 깨닫는다. 존 버거는 프랑스 농민 공동체를 ‘두 번째 교육’이자 ‘나의 대학’이라 부른다. 사라져가는 농민 공동 체의 꿈을 결코 역사의 유물로만 내버려둘 수 없었던 존 버거는 자신이 직접 농

민이 되어 농촌의 가치와 농부의 삶의 중요성을 글로 남겨두게 된다.

이번에 새로 번역 출간된 3부작 소설 『그들의 노동에(Into Their Labours)』는 그 결과물로, 1974년부터 집필을 시작해 1990년에 완성했다. 『끈질긴 땅(Pig Earth)(1979)은 농촌 사람들의 전통적인 삶을 묘사하고, 『한때 유로파에서(Once in Europa)(1987)는 농촌의 옛스러움이 사라지고 농촌마저 현대화하는 과정에서 펼 쳐지는 사랑과 실향의 이야기가 드러난다. 『라일락과 깃발(Lilac and Flag)(1990)은 고향 마을을 떠나 대도시에 정착한 농민들의 사랑 이야기다.

아름답게 펼쳐진 초원 위에 양떼가 뛰놀고 소떼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는 그런 목가적인 농촌의 풍경은 점점 사라져간다. ‘끈질긴 땅’에서 여전히 희망을 포기하 지 않고 살아가는 농민들의 삶을 생각하면서, 나는 새삼 오늘 내가 먹은 모든 음 식이 농민들의 피땀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되새겨보았다. 지구상에서 결코 없어 져서는 안 될 첫 번째 직업이 ‘농민’이다. 농민의 삶, 농민의 꿈, 농민의 사랑이 가 능한 세상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잃어버려서는 안 될 아름다운 세상이 아닐 까. 나는 하얀 눈발이 날리는 추운 겨울날, 고집 센 염소에게 짝짓기를 재촉하는 엘렌, 언덕으로 추락해 다리가 부러진 암소 루사의 마지막 밤을 함께하는 조제프 와 마르틴이 바로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와 아빠, 우리가 지켜야 할 이 시 대의 농민들임을 기억한다. 도시인들처럼 쿨한 척, 세련된 척 연기하지 않고, 마 음에 있는 말을 그대로 표현하는 농민들의 솔직함과 따사로움이 오랫동안 내 마 음속 환한 등불이 되어 나를 지켜줄 것 같다. 『끈질긴 땅』에서 주인공 장은 죽은 자들이 살아 있을 때 미처 해주지 못한 말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정의가 이루어 질 겁니다.” “언제?” “살아 있는 이들이 죽은 이들의 고통을 알게 될 때요.” 우리는 죽은 이들의 고통을 이해하는 살아 있는 자들이 되어, 그들이 끝내 하지 못한 말 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정여울 작가. 저서로 『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월간정여울-똑똑』 등이 있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5 × on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