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불교에서 윤회란 무엇인가?__한자경

불교에서 윤회란 무엇인가?

한자경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

 

무아와 윤회

불교의 윤회설에 대해 흔히 이런 질문이 제기된다. 불교는 처음부터 ‘무아(無 我)’를 설했는데, 즉 자아라고 할 것이 없는데, 과연 누가 또는 무엇이 전생과 현생 과 내생을 이어 윤회할 수 있다는 말인가? 무아와 윤회가 어떻게 양립 가능하다 는 말인가? 그래서 사람들은 쉽게 불교의 무아설은 취하되 불교의 윤회설은 부정 하는 경향이 있다. 윤회설은 석가의 통찰이 아니고 당시 인도에 널리 퍼져 있던 사상을 불교가 관습적으로 또는 윤리 교화를 위한 방편으로 수용한 것이라고 보 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무아설이 과연 윤회설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일까? 초기 경전 『잡아함경』에서 석가는 “업과 보는 있지만, 업을 짓는 자는 없다(유업 보 무작자)”고 했고, “누가 느끼는가를 묻지 말고 무엇을 인연으로 하여 느낌이 있 는가를 묻고, 누가 생각하는가를 묻지 말고 무엇을 인연으로 하여 생각이 일어나 는가를 물어라”고 했다. 느끼는 나, 생각하는 나, 업을 짓는 나, 보를 받는 나, 그런

자아가 따로 있지 않고, 업이 되는 행위들만 이런저런 조건(인연)을 따라 일어난 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업을 짓고, 바로 그 내가 보를 받는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자기동일적 자아가 윤회 주체로 존재해서 전생에서 현생으로 그리고 다시 내생으로 윤회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불교가 말하는 윤회는 자기 동일적 자아를 전제하고서 성립하는 윤회, 즉 내가 업을 짓고 다시 그 동일한 내가 보를 받음으로써 성립하는 윤회(유아윤회) 가 아니다. 불교의 윤회는 업 짓고 보 받는 자아가 따로 없는 윤회, 무아윤회다. 즉 업을 짓고 보를 받는 자아는 따로 없지만, 업과 보는 엄연히 존재하며, 그 둘 간의 인과관계적 연속성이 있기에 성립하는 윤회다. 말하자면 현상적으로 존재 하는 색수상행식 5온이 업을 지으면, 그 업이 남기는 업력(業力)이 잠재적 에너지 로 존재하다가 인연이 갖추어져서 그 에너지가 현실화되면 그 결과의 보(報)로서 다시 그다음의 5온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업과 보의 연속성을 12지연기의 다음 항목들이 잘 보여준다.

⋯ → 무명 → 행 → 식 → 명색 → 육입처 → 촉 → ⋯ <업> <업력> <5온>

→ 수 → 애 → 취 → 유 → 생 → 노사 → ⋯ <업> <업력> <5온의 형성>

이와 같이 업과 보의 연속성은 있지만, 그 너머에 업 짓는 자, 보 받는 자가 자 아로 따로 존재하지는 않기에 무아라고 하는 것이다. ‘5온이 업을 짓는다’는 말을 놓고, 그러니까 5온이 업 짓는 작자, 자아고 따라서 ‘무아’가 아니지 않냐고 반문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무아’가 강조하는 것이 바로 그 5온이 지난 업의 보 로서 형성된 것이지, 업과 보의 연기 관계 바깥에 따로 존재하는 자아가 아니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자아로 여겨 집착하는 색수상행식 5온은 업과 보의 관계 속에 등장하는 인연 화합의 산물, 바람에 출렁이는 물거품이나 허공에 피어나는 환상의 꽃과 같은 존재다. 그래서 무아라고 하고 아공(我空)이라고 한 다. 5온이 업을 지으면, 그 업의 보로서 그다음 5온이 만들어지고, 그렇게 만들어 진 5온이 또 새로운 업을 지으면, 그 업의 보로서 다시 또 그다음 5온이 만들어 진다. 이처럼 자기 동일적 자아는 없지만, 업과 보의 연속성은 있다. 이 업과 보 의 연속성으로 윤회가 성립하며, 5온은 이러한 업보의 흐름을 타고 잠시 나타났 다 사라지는 무상한 현상이기에 무아라고 하는 것이다. 인연 화합의 결과 생성 되는 무상한 5온을 상일주재(常一主宰)의 자아로 집착하는 아집(我執)을 깨기 위해 불교는 무아를 강조하는 것이다.

업력이 저장되는 곳

무아인데도 윤회가 성립하는 것은 5온이 업을 지으면 그 업의 보로서 다시 5온 이 형성되는 방식으로 업과 보 간에 연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업과 보의 연속성은 업이 남기는 에너지인 업력이 보를 낳기까지 보존되기에 가능한 것이 다. 그런 업력을 유식에서는 ‘종자(種子)’라고 부른다. 업이 업력을 남기고 그 업력 이 그다음 5온을 형성하는 것이 마치 나무가 종자를 남기고 그 종자가 땅 아래 묻 혀 있다가 때가 되면 그다음 나무로 자라나는 것과 같다. 업력 내지 종자는 보를 나을 잠재적 에너지란 의미에서 ‘정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업력, 종자, 정보가 과연 어디에 보존되어 있다가 그 보를 이루는가 하는 것이다. 업력은 어디 에 보존되는가? 종자 내지 정보의 저장소는 어디인가? 두뇌 : 업력 내지 정보가 저장되는 곳으로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것은 두 뇌다. 현대 과학이 두뇌를 일체 정보가 축적되고 처리되는 정보처리 시스템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뇌과학을 포함한 현대 과학은 기본적으로 유물론에 입각해 있다. 유물론은 물질을 1차적 근원적 존재로 간주하고, 생명활동이나 마음활동을 물질에 기반해서 생겨나는 2차적 현상으로 간주한다. 즉 생명도 물질로부터 생겨나고, 마음 내지 의식도 물질, 즉 조직화된 두뇌 신경세포의 활성화로부터 생겨난 다고 여긴다. 이런 유물론의 관점에 서면 두뇌를 포함한 몸이 멸하는 죽음은 곧 그 두뇌 안에 포함된 일체 업력 내지 정보의 소멸을 의미한다. 죽음 이후 업력이 나 종자가 남아서 그 보로서 그다음 5온을 형성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이처 럼 업력의 저장소를 두뇌로 여기면, 죽음을 단적인 끝으로 간주하는 단멸론(斷滅 論)이 되며, 윤회는 부정될 수밖에 없다.

만약 석가가 이런 입장이었다면, “죽으면 자아는 지속합니까? 아니면 사라집니 까?”라는 제자의 질문에 석가는 “몸이 멸하는데, 무엇이 남겠는가? 죽으면 끝이 고,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잘라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석가는 그렇게 답 하지 않고 무기(無記)를 보였다. 유물론의 관점에서 불교를 단멸론으로 해석하며 윤회를 부정하는 것은 불교적이지 않다.

유전자 : 종자 내지 정보가 저장되는 곳으로 그다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유전 자다. 업이 남긴 종자 내지 정보가 유전자에 보존되었다가 생식을 통해 다음 세대 로 전달된다면, 개체의 죽음과 상관없이 그다음의 보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기 때 문이다. 불교를 현대 과학, 생물학, 유전학의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그래 서 윤회를 유전자에 새겨져서 부모 자식 간에 일어나는 정보의 전달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은 생물학적 유전이지 불교가 말하는 윤회가 아니다. 불교의 윤회 는 업을 짓던 5온이 죽은 후 그 업력이 남아 보로서 그다음의 5온을 형성하는 것 이므로 한 시기에 업과 보의 두 5온이 함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전자 가 함축하는 생물학적 결정론은 불교의 유전문 아닌 환멸문의 차원, 즉 수행의 차 원을 설명할 수가 없다. 유전자에 새겨진 정보라면 내 노력으로 지울 수 없고, 유 전자에 의해 형성된 근(根)이라면 내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일 것이다. 그런 데 불교는 업력, 종자를 조복시키거나 멸하는 수행을 논하고, 근(根)과 경(境)에 매 인 범부의 식(識)과 달리 수행을 통해 근과 경에의 매임으로부터 풀려나는 해탈의 가능성을 논한다. 불교는 인간 마음의 의도에서 비롯되는 업이 남긴 업력, 종자,

불교의 윤회는 업 짓고 보 받는 자아가 따로 없는 윤회, 무아윤회다. 즉 업을 짓고 보를 받는 자아는 따로 없지만, 업과 보는 엄연히 존재하며, 그 둘간의 인과관계적 연속성이 있기에 성립하는 윤회다.

정보가 축적되는 저장소를 인간의 마음이 다가갈 수 없는 별도의 영역으로 설정 하지 않는 것이다. 아뢰야식 : 유식은 두뇌를 포함한 인간의 몸, 즉 근(根)을 가진 몸인 유근신(有 根身)과 그 근에 상응하는 경(境)으로서의 세계, 즉 몸들이 의거해서 사는 기세간(器 世間), 둘 다 업의 보라는 것을 강조한다. 유근신은 정보(正報)고, 기세간은 의보(依 報)다. 유근신과 기세간이 보라는 것은 근과 경, 나와 세계, 아와 법이 모두 종자의 실현, 정보의 구체화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근과 경으로 현실화할 종자들이 축적되어 있는 곳을 살아 있는 중생의 심층 마음, ‘아뢰야식’이라고 부른다. 아뢰 야의 범어 ālaya는 ‘함장하다’는 뜻이다. 업력인 종자들을 함장하는 식이기에 ‘아 뢰야식’이라고 한다. 아뢰야식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음과 등치하는 의식(제6 의 식/식識)보다도 더 깊고, 우리가 본능적으로 나라고 집착하는 자아식(제7 말나식/의意) 보다도 더 깊은 마음이어서, ‘제8식’, ‘제8 아뢰야식’, ‘심(心)’이라고 부른다. 불교의 윤회는 업 짓고 보 받는 자아가 따로 없는 윤회, 무아윤회다. 즉 업을 짓고 보를 받는 자아는 따로 없지만, 업과 보는 엄연히 존재하며, 그 둘간의 인과관계적 연속성이 있기에 성립하는 윤회다.

종자가 축적되고 처리되는 곳을 물리적 두뇌나 유전자라고 하지 않고, ‘식(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그 안에 축적된 종자, 업력의 힘에 의해 완전하게 규정된 자, 결정된 자가 아니라는 자각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의 삶은 아뢰야식 내 종자로부터 형성된 유근신과 기세간, 근과 경에 매인 방식으로 유지되지만, 그 래서 습관처럼 아집과 법집을 갖고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누구나 마음 깊 은 곳에서 자기 자신을 일체의 규정성, 업력의 규정성까지도 넘어선 자유의 존재, 수행을 통해 근과 경에의 매임을 풀어 해탈할 수 있는 존재로 알고 있다. 이러한 심층 마음의 자기 자각성을 불교는 인간의 본래적 각성인 ‘본각(本覺)’이라고 부른 다. 업력 내지 종자가 축적되는 곳은 바로 이러한 본각의 식, 아뢰야식인 것이다. 아뢰야식 안에 함장된 종자는 번뇌에 물들어 있지만, 아뢰야식 자체는 나라는 개 체성이 없는, 모두가 하나인 마음이기에 일심(一心)이고, 일체의 상(相)을 벗은 마 음이기에 진여(眞如)다.

유식에서의 윤회

일체 종자 내지 정보의 저장소를 아뢰야식으로 설명하는 유식에서 윤회란 무 엇인가? 우리는 음악을 듣기 위해 라디오가 필요한 것처럼, 감각하고 사유하기 위해 인식 기관인 6근이 필요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의 신경 체계를 총 괄하는 두뇌가 필요하다. 라디오가 고장나면 소리가 나오지 않듯이, 두뇌가 고장 나면 인식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라디오가 음악 소리의 궁극 적 발원지인 것은 아니다. 라디오는 방속국에서 보내는 전파에 주파수를 맞춤으 로써 단지 그 소리를 전달해주는 매개자의 역할을 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두뇌 또 한 인식의 궁극적 발원지가 아니라 단지 정보를 전달해주는 매개자일 뿐이다. 그 렇다면 6근 내지 두뇌는 어디에서 정보를 받는 것일까? 두뇌가 주파수를 맞춰야 할 방송국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일체 종자를 함장한 아뢰야식이다. 라디오를 통해서만 음악을 들을 수 있듯이 두뇌를 통해서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일상의 식(識)이 그렇게 근에 매여 있는 식이기 때문이다. 괜찮은 라디오로 들으면 음악 소리가 선 명하고, 시원찮은 라디오로 들으면 음악 소리가 탁하듯이, 괜찮은 두뇌로 사유하 면 인식이 예리하고, 시원찮은 두뇌로 사유하면 인식이 둔하다. 그러다가 어느날 라디오가 완전히 고장나면 음악을 듣지 못하게 되듯이, 두뇌가 완전히 고장나면 인식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죽음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근에 의거한 인식인 감각(전5식)과 제6 의식과 제7 말나식이 멈추는 것이지, 제8 아뢰 야식의 자각성 그리고 그 안에 담겨 있던 종자인 업력의 에너지가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라디오가 고장난다고 방송국이 없어지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업 의 종자는 그대로 남아 다시 새로운 몸, 새로운 근을 형성해 새로운 5온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이렇게 보면 유식에서 삶이란 마음이 몸(근)과 결합해 생로병사의 고통을 감내하는 기간이며, 죽음은 삶으로 지친 마음이 낡아버린 근으로부터 풀 려나는 것이고, 윤회는 그렇게 몸을 잃고 어둠을 헤매며 당황하던 마음이 다시 새 몸을 만들어 이 세계로 복귀하는 것이 된다. 마음이 마음 본래 자리에서 눈뜸으로써 자신이 일체 종자의 규정성 내지 일체 의 상(相)을 벗어난 자성청정심이라는 것, 자타분별을 넘어선 불이(不二)의 일심이 고 진여라는 것, 무시 이래로 항상 깨어 있는 본각(本覺)의 마음이라는 것을 확철 대오하지 못하는 한, 인간은 자신을 근(몸/유근신)에 매이고 경(환경/기세간)에 묶인 존재라고만 생각하며 살아갈 것이다. 따라서 목숨이 다해 근으로부터 풀려나게 되어도 계속 그 생각, 그 망상을 좇아 곧 다시 새로운 근을 형성해 거기에 자신을 매어놓고 풀려나지 못할 것이다. 이처럼 자기 마음을 알지 못하는 그 무명(無明)으 로 인해 우리가 세세생생 윤회의 길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자경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에서 서양철학(칸트)을, 동국대 불교학과에 서 불교철학(유식)을 공부했다. 현재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이며 저서로 『칸트와 초월철학: 인간이란 무엇인가』, 『자아의 연구』, 『자아의 탐색』, 『유식무경: 유식 불교에서의 인식과 존재』, 『불교의 무아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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