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불교에서 윤회는 하나의 신화인가?__안성두

불교에서 윤회는

하나의 신화인가?

안성두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윤회(sasāra)는 불교뿐 아니라 모든 인도 종교와 철학에서 핵심적인 개념으로 서, 중생에게 있어 그치지 않는 생사의 순환을 의미한다. 즉 모든 중생은 생 → 사 → 재생 → 재사 → 재재생 (…)의 무한한 순환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윤회의 반대는 해탈(moka)로서, 이런 생사의 반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이 개념은 우리가 바라문교라고 부르는 고대 인도 전통에서 유래한 것으로 일 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영향 관계는 그리 간단히 규 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라문 전통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인 베다의 찬가에서 윤회 개념은 암시되고 있지만 아직 분명한 이론적 형태는 설해지지 않았다. 최초 의 우파니샤드로 인정되고 있는 브리하다란야카 우파니샤드(Bhadārayaka-upaniad) 에서 윤회의 원인은 업(karma)이라고 분명히 설하고 있지만, 여기서도 윤회 과정 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없다.

사실 윤회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최초의 우파니샤드 이후에 등장했던, 우리가 사문(沙門, śramāṇa) 전통이라고 부르는 불교와 자이나교에 이르러 나타난다. 오늘 날 우리는 사문이란 말을 불교 승려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지만, 그 원래 의미는 ‘노력하는 자’로서 베다 전통의 설명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궁극적인 것을 증득 하려는 수행자를 가리키는 일반명사였다. 우리가 육사외도(六師外道)라고 부르는 수행자들이 바로 사문이었고, 붓다 석가모니는 바라문 전통에 의존하지 않고 스 스로의 해탈의 길을 탐구했던, 넓은 의미에서 사문의 일원이었다.

아래서 보듯이 이들 사문들의 탐구에서 가장 중심적인 주제가 된 것은 윤회와 해탈, 업의 문제 및 이와 관련된 형이상학적 문제였다. 붓다는 이들 문제들과 대 결하면서 다른 사문들과 구별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고, 이것이 우리에게 불설(佛說)의 형태로 전승되고 발전되어왔다. 그리고 붓다의 교설에서 윤회 개념 은 당연한 것으로서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윤회 개념이 불교적인 것이 아니라거 나 또는 붓다가 바라문에서 유래한 이 개념을 단지 방편으로서 차용했지 실은 불 교 교설에서 본질적인 것은 아니라는 등의 주장은 문헌적 근거가 전혀 없을 뿐 아니라 반불교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이제 중생이 윤회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 함축성에 대 해 생각해보자. 여기서 불교의 입장이 가진 특색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이들 문제 에 대한 당대의 다른 사상가들의 해석과 비교하는 것이 좋기 때문에 우파니샤드 와 다른 사문들의 해석을 아울러 제시하겠다. 그럼 윤회가 사(死)→재생(再生) 사이 의 끊임없는 이어짐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서 시작해보자. 여기서 우리는 윤회 의 문제를 우선 두 가지 항목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누구의 윤회인가? 둘째, ‘연 결’이라고 할 때, 그것에 법칙이 있는가 아니면 우연적인 것인가? 첫 번째 문제는 윤회의 주체와 관련된 문제이고, 두 번째는 윤회의 법칙성과 관련된 문제이다.

첫 번째 누가 윤회하는가의 문제는 필히 그 반대 항인 해탈과 연관되어 있다. 여기서 (무아설의 맥락을 떠나) ‘누가’가 산하대지와 같은 무생물체가 아닌, 지각하는 생명체, 즉 불교 용어로 유정(有情, sattva)을 가리킨다는 것은 자명할 것이다. 누구

 

업의 인과성은 일반인의 직접 지각에 의해서는 입증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 타당성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업의 작용은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불교는 그것의 존재성을

우리는 직접 지각에 의거한 추론에 의해서 확인할 수 있다

 

도 지각력이 없는 산하대지가 윤회한다고 말하지도 않으며, 또 그것에게 생사가 문제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윤회하고 있는 유정의 본질은 무엇 인가? 무엇이 그를 구성하고 있는가? 생명체가 기본적으로 신체를 갖고 있고 그 것은 물질로 구성되어 있지만, 동시에 생명체의 특징은 지각을 하고 그 지각 작용 은 결코 물질적 요소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에 물질 요소 외에 심리 요소를 본질 로 하고 있다는 것은 고대 인도에서도 당연시되고 있다. 이미 베다와 우파니샤드 에서 심리 요소는 명(名, nāman)으로, 물질 요소는 색(色, rūpa)으로, 양자는 한 쌍의 개념으로 언급되고 있다. 즉 유정은 심리적 요소와 물질적 요소들의 복합체다.

그런데 명색에 대한 해석과 관련해서 여러 선택지들이 있다. 첫 번째는 색이 본 질적 존재라는 입장이다. 이런 입장을 취하는 자는 보통 유물론자로서 물질만이 일 차적 실재이며 정신적 요소는 이차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현대의 심리철학이 나 물리학에서 주류를 이루는 물리주의도 이런 사고의 연장선에 있을 것이다. 사문전통에서 이런 유물론적 입장을 취한 사람은 아지타 케사캄발린이다. 그에 따르면 유정은 지·수·화·풍이라는 네 가지 물질 요소들로 환원된다. 4종 요소들은 더 이상 환원될 수 없는 최종적인 물질 요소이며, 만물의 다양성은 이들 요소들의 조합 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다. 반면 심리적 요소란 물질적 요소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 는 것으로서, 죽은 후에 사대의 결합이 풀어지면 정신도 따라서 소멸한다고 주장했 다. 따라서 그에게 윤회 관념은 인정되지만, 이제 이것은 어떤 정신적 요소와도 관 련이 없는 물질적 조합과 해체라는 순전한 물리적 순환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윤 리적 행위로서의 업의 작용도 부정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의 유물론적 관점은 불 교에서 비판받았다. 붓다는 중생을 구성하는 요소를 정신적 요소와 물질적 요소라 고 명확하게 구분함에 의해 그의 교설을 시작하고 있다. 그것이 인도 불교의 출발점 이라면, 아지타의 유물론적 관점, 즉 정신적 요소가 물질적 요소의 수반 현상이거나 부산 현상이라는 주장은 용인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붓다의 사유의 출발점은 현 대의 물리주의자들의 관점에 대한 비판으로서도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최종적으로 물질적 요소만이 존재한다면, 따라서 모든 정신현상이 물리적인 것으로 환원된다 면, 윤리적 행위의 당위성과 정신적 자유의 필요성은 어디에 있겠는가?

두 번째 선택지는 심리적 요소에 보다 근본적인 실재성을 부여하는 입장이다. 사문 전통에서 이를 대변하는 사상가는 없지만, 인도사상 전체에서 보면 유식사 상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세 번째는 양자에 대등한 실재성을 부여하는 길이다. 이런 입장은 사문 전통에 서 빠꾸다 까짜야나에 해당될 것이다. 그는 지·수·화·풍과 고·락·생명력의 7종 요소를 가장 근원적인 실체라고 간주했는데, 적어도 고락이 심리적 요소라고 한다면, 그는 일종의 심신 이원론의 입장을 취했던 인물이라고 보인다.

이제 윤회에 과연 법칙성이 있는가 하는 두 번째 문제로 돌아가보자. 윤회의 원 인이 업이라고 우파니샤드가 선언했을 때, 그것은 중생의 삶이 우연적인 것이 아 니라 어떤 법칙에 의해 규정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인과

성이 우리의 직접 지각에 의해 확인되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이때 우리에게 남겨 진 선택지는 모든 것이 선결정된 프로그램에 따라 진행된다는 숙명론을 받아들 이거나 아니면 모든 것이 완전히 우연적 확률에 의해 지배된다는 우연론을 받아 들여야만 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 사문 전통에 속한 사상가들은 이에 상응하는 두 가지 설명을 제시하고 있 다. 하나는 업의 인과성을 강한 결정론의 방식으로 해석하면서, 원인과 결과 사 이의 관계는 이미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중간의 어떤 작용도 그 결정성을 돌이킬 수 없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이 입장은 마칼리 고살라(Makali Gosala)라는 사명외도 (邪命外道, ājivika)에 의해 주창되었는데, 그는 모든 것은 확정적인 운명(niyati)에 따라 진행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윤회의 과정에는 시작과 끝이 있으며, 840만의 대겁을 지나면 모든 존재는 자동적으로 해탈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윤회라는 현상 은 인정했지만 그것은 중생들의 도덕적 행위와 무관하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반면 다른 설명은 원인과 결과 사이의 이러한 관련성이 직접 지각에 의해 확인 되지 않기 때문에 업의 법칙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문 전통에서 뿌라나 까사빠는 업과 윤회 사이에는 어떤 인과관계도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 했으며, 그럼으로써 윤리적 행위의 전제로서의 업의 타당성을 부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두 해석이 과연 우리의 삶을 정신적으로 행복하고 의미 있게 만 들 수 있을까? 결정론이나 우연론이라는 두 극단이 고통으로부터의 해탈하는 길 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제3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데, 두 극단을 피하는 중도의 길 을 찾기가 쉽지는 않다고 보인다. 왜냐하면 우연론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고통에 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고 하는 인과성의 법칙을 받아들여야 하지만, 동시에 그 인 과성이 자유로운 심리적 선택의 영역을 완전히 부정한다면 이는 다시금 결정론 의 함정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문 전통 중에서 특히 불교의 업의 해석이 주목받는 이유는 바로 이 문제와 대결하면서 이를 해결해나간 점에 있다. 그리고 나는 그 해결책이 위에서 말했듯이 인과성으로서의 업의 법칙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행위에 있어서 심적 선택 의 자유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전자와 관련해, 붓다는 어떤 업이 어떤 결과를 낳는가를 구체적으로 아는 것은 일반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지만, 그럼에도 업은 아무리 많은 시간이 경과한다고 해도 그 결과를 낳기 전에는 소멸하지 않는다고 설하셨다. 다시 말해 업의 인과성은 일반인의 직접 지각에 의 해서는 입증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 타당성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 한 업의 작용은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불교는 그것의 존재성을 우리는 직접 지 각에 의거한 추론에 의해서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왜냐하면 고통이나 무상 은 직접 지각에 의해 확인된다는 점에서 자명한 사실이지만, 업의 비소멸성이나 타세(他世)의 존재성은 이런 직접 지각에 의거해서 추론되는 것으로서 마찬가지로 자명한 것이라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후자와 관련해, 매 순간 우리의 의식을 결정하는 확정력이 업에는 결코 인정되 지 않았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업은 단지 우리의 현존의 양태를 조건 지우는 것 으로 작동하지만, 결코 중생의 의식 작용은 업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여 기에 바로 불교의 업설이 지닌 윤리적 측면과 자기결정성의 측면이 두드러진다.

불교의 업의 교설이 현재의 나의 존재 양태가 과거의 나의 윤리적 행위에 의해 깊이 영향을 받고 있음을 가르치는 것이라면, 이는 이 세계를 단지 물리적 힘으로 설명하기보다 심리적, 정신적 의미에서 하나의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관계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의 윤리적 행위가 촉발되고 우리가 보다 깊은 위안을 받을 수 있다면, 불교가 말하듯 업의 타당성이 추론에 의해 증명 되는 것과 상관없이 그 자체만으로도 업설을 받아들일 가치가 충분할 것이다.

안성두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교육과를 졸업하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한국불교철학 전공으로 석 사 학위를 받았다. 독일 함부르크대 인도학연구소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금강대를 거쳐 현재 서울대 철학과 교 수(인도불교 유식학 전공), 한국불교연구원 원장으로 있다. 역서로 『대승불교란 무엇인가』, 『보성론』, 『보살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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