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 연기법과 마음 그리고 윤회__목경찬

연기법과 마음

그리고 윤회

목경찬

불교 저술가

글을 시작하며

우리는 같은 의미로 그 언어를 사용한다고 여기지만, 각각 다른 의미로 그 언어 를 사용할 때가 많다. 예를 들면 ‘영혼’이라는 용어가 그렇다. 어떤 이는 불교에서 는 영혼을 부정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이는 영혼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지만 그에 해당하는 중음신, 마음[心], 식(識) 등을 불교에서 언급하기 때문에 영혼을 부 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들이 사용하는 ‘영혼’은 동일한 의미 일까.

또 어떤 이는 ‘내[我]가 없는데 어떻게 윤회가 성립하는가?’라고 주장하고, 어떤 이는 ‘오히려 내가 없기 때문에 윤회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사용하는 ‘아(我)’는 어떤 의미일까.

따라서 이 글에서는 불교의 핵심 교리인 연기법을 다시 살펴보면서 ‘윤회와 무 아’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연기법의 핵심, 내연기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가장 핵심은 연기법이다. 따라서 경전 곳곳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

– 『중아함경』 제30권, 「상적유경」

여기서 ‘법’은 ‘진리’를 말한다. 따라서 ‘법을 보았다’는 말은 ‘깨달았다’는 의미 다. 따라서 ‘연기를 보는 자는 진리를 깨달았고, 진리를 깨달은 자는 연기를 본다.’

보통 연기를 ‘서로 관계하여 일어나는 것’, ‘다른 것과 관계를 맺어 일어나는 것’ 등으로 풀이한다. 그리하여 연기법을 ‘세상 만물은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고 서로 관계하여 존재한다’는 가르침으로 이해한다. 가령 ‘산소와 수소가 관계하여 물이 있다. 내가 있으니 네가 있고, 네가 있으니 내가 있다. 자연이 있으니 인간이 있고, 인간이 있으니 자연이 있다. 서로 관계하여 존재한다. 이것이 연기법이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연기를 본 자’는 ‘깨달은 자’이고, ‘깨달은 자는 연기를 본다’ 고 했다. 이러한 상호 관계성이 연기법의 핵심이라면 이들은 깨달은 자인가. 그리고 이러한 사물 간의 관계성을 알고자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긴 세월 동안 수행했을까?

그렇다면 연기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서로 관계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 렇게 관계해 일어나는 것이 무엇인지’가 열쇠다. 연기법은 바깥 사물과 사물의 관 계성에 중심을 두는 가르침이 아니라 마음 작용에 대한 관계성에 중심을 두는 가 르침이다.

이쯤에서 『요본생사경(了本生死經)』, 『도간경(稻經)』 등에 언급하는 외연기·내 연기라는 용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전에서는 외연기는 씨앗·싹·줄기 등 의 관계로 설명하고, 내연기는 무명(無明)에 의해 행(行)이 일어나고 나아가 노사 (老死)가 일어나는 관계, 즉 십이연기(十二緣起)로 설명한다.

따라서 외연기는 마음 밖 대상과 대상의 관계, 사물과 사물의 관계를 말한다. 가령 ‘씨앗·싹·줄기 등의 관계’, ‘산소와 수소의 관계’, ‘자연과 인간의 관계’ 등 이다. 반면에 내연기는 마음 작용 간의 관계를 말한다. 가령 무명(無明)[어리석음]에 의해 행(行)이 일어나고 나아가 노사(老死)가 일어나는 관계, 또는 원효 스님의 마 음에 의해 해골바가지 물이 달콤한 물로 드러난 경우, 또는 ‘돼지 눈에는 돼지로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으로 보인다’는 등이다.

불교 공부는 마음공부라고 할 때, 연기법의 중심은 내연기에 두어야 한다. 그렇 다고 외연기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내연기의 가르침은 마음 작용 간의 관계성 이므로 어렵고도 어렵다. 그래서 외연기는 복잡한 내연기를 이해하기 쉽도록 비 유적으로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경우에 주로 언급된다.

“이제 비유로 말하겠소. 지혜로운 사람은 비유로써 뜻을 알게 되는 것이니, 비유하자 면 세 개 갈대가 빈 땅에 서려고 할 때 서로서로 의지하여야 서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그 하나를 버려도 둘은 서지 못하고, 만일 둘을 버려도 하나는 또한 서지 못하여 서로서로 의지하여야 서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 『잡아함경』 제12권, 「노경」

내연기와 제법무아

연기와 관련해 자연스럽게 ‘제법무아(諸法無我)’가 등장한다. 이때 ‘법’은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의 법[=진리]과 다른 의미다. 여기서 법은 삼라만상, 존재, 사 물, 현상 등으로 풀이한다. 쉽게 말하면 우리 앞에 펼쳐진 모든 것이 법이다. 제법 무아는 ‘모든 현상[제법]은 그것[아]이라고 할 것이 없다[무]’는 뜻이다.

A와 B가 관계해 C가 되면[A+B=C], C는 스스로 있을 수 없어 C는 실체가 없다고 한다. C는 그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A와 B에 의해 있기 때문이다. A 또는 B가 없으면 C는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연기로 드러난 것[법]은 그 실체가 없다[무아].

 

 

어리석음[무명]으로 온갖 업을 짓는다[행]. 그 업은 없어지지 않고

마음[식(識)=심]에 저장된다. 그것을 바탕으로 또 어리석음에 의해

온갖 업을 짓는다. 이렇게 중생의 삶은 돌고 돈다.

 

즉 ‘제법은 연기된 것이므로 무아다.’ 모든 현상[제법]은 연기되어 있기 때문에 그 것[아]이라고 할 것이 없다[무].

이를 외연기로 설명해보자. 가령 물은 산소와 수소로 되어 있기 때문에 물이라 고 할 그 실체가 없다. 이제 내연기로 설명해보자. 불교 논서에 일수사견(一水四見) 이라는 말이 있다. 하나의 물에 대해 네 가지 견해가 있다. 인간에게는 물, 하늘중 생에게는 보석, 아귀에게는 피고름, 물고기에게는 집이나 길로 보인다는 말이다. 만약 물이 그 실체가 있다면 모든 중생에게 똑같이 보여야 한다. 각각의 업에 따 라 다르게 보이기 때문에 그 실체가 없다.

‘하늘중생, 아귀, 물고기’를 언급하니, 이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 개 짖는 소리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는 개가 ‘멍멍’ 짖는다고 한다. 그런데 과연 개는 ‘멍멍’ 짖을까. ‘멍멍’ 짖는다면 누구나 ‘멍멍’으로 들어야 하는데 미국인은 ‘바우와우’로 듣는다. ‘멍멍’이니 ‘바우와우’는 실제 개가 짖는 소리가 아니다. 각자의 환경에서 그렇게 여겨왔기 때문이다.

이제 원효 스님의 해골바가지 물을 예로 들어보자. 간밤에 달콤하게 물을 마셨 던 원효 스님은 다음 날 해골바가지 물임을 아는 순간 구역질을 했다. 왜 구역질 을 했을까. 그것은 ‘해골바가지 물은 더럽다’는 이전 학습[행위]이 있었기 때문이 다. 만약 ‘해골바가지 물을 모르고 마시면 무병장수한다’는 말이 그 당시 있었다 면, 원효 스님은 해골바가지 물을 마셨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과연 어떤 반응이었 을까. 한편 해골바가지에 담겼다고 해서 다 더러운 물은 아니다. 더럽다는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연기법의 핵심이 내연기[마음 작용 간의 관계]라고 할 때, 물이 물이거나, 개 짖는 소리가 ‘멍멍’ 등으로 들리거나, 해골바가지 물이 더럽게 인식되거나 하는 것은 이전 행위로 인한 학습에 의해 그렇게 인식될 뿐 그 자체가 물이거나, ‘멍멍’이거 나, 더러운 물은 아니다. 세상은 내가 보는 것처럼 그렇게 있지 않다.

이처럼 각자의 환경에서 행위를 통해 습득된 내용으로써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세상을 인식하고 판단한다. 그리고 그것이 실재한다고 본다. 그런데 아니다. 이때 행위가 바로 업이다.

업과 마음 그리고 윤회

이러한 업은 마음[心]에 저장된다고 본다. 심(心)은 인도어 찌따(citta)를 번역한 말로, 이는 적집(積集)[모으다]의 뜻이다. 어리석음[무명]으로 온갖 업을 짓는다[행]. 그 업은 없어지지 않고 마음[식(識)=심]에 저장된다. 그것을 바탕으로 또 어리석음 에 의해 온갖 업을 짓는다. 이렇게 중생의 삶은 돌고 돈다.

“업과 업보는 있지만 지은 자는 없다. 이 음(陰)이 사라지고서 다른 음이 상속한다 (有業報而無作者 此陰滅已 異陰相續).”

– 『잡아함경』 제13권, 「제일의공경」

경전 말씀에 의하면, 앞서 마음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지은 자가 없다’는 말 은 ‘변하지 않는’ 행위[업]의 주체를 부정하는 말이다. 바로 이어지는 ‘이 음(陰)이 사라지고서 다른 음이 상속한다’에서 ‘상속’이 중요하다.

가령 촛불이 초를 녹여 타올라 촛불이 되고, 그 촛불이 또 초를 녹여 타올라 촛 불이 된다. 이렇게 촛불이 이어지듯이, 마음에 의해 업을 짓고 그 업이 마음을 이 루고, 그 마음에 의해 또 업을 짓고 마음을 이룬다. 이렇게 마음은 이어진다[상속한 다]. 따라서 마음은 고정된[변하지 않는] 실체가 아니라 폭류처럼 요동치며 흘러가는 업들의 흐름이다. 고정된 실체라면 업과 업보는 성립되지 않는다. 변화[업과 업보] 와 고정된 실체는 함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윤회와 무아의 문제도 그렇다. 이때 아(我)는 ‘상주(常住)하고, 하나[獨一]이고, 주 체[主王]이고, 스스로 행동한다[司宰].’ 따라서 ‘아’가 있다면 오히려 윤회할 수 없다. 변하지 않는[상주하는] 아가 어찌 윤회[변화]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무아이기[상주하 는 아가 없기] 때문에 윤회가 성립한다. 이는 용수보살 등 옛 성인들께서 이미 언급 한 내용이다.

마음의 다른 이름으로 부파불교에서는 근본식, 유분식, 궁생사온 등을 언급한 다. 범부는 보통 영혼이라고 한다. 『구사론』 등에는 중음신, 중유라고도 한다. 그 리고 중생은 죽은 뒤 중유 상태로 있다가 자기 업과 맞는 부모에게 빨려 들어가 태어난다고 한다.

업에 따라 다음 생을 받듯이, 우리는 이전 업이라는 선입견으로 지금 세상을 판 단하고 분별한다. 이러한 점에서 업장소멸이라는 말은 이전 업에 의한 선입견을 내려놓고 세상을 바라보는 삶이라고 풀이할 수 있지 않을까.

목경찬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에서 유식철학 전공으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조계사, 각원사(천안) 등 불교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사찰, 어느 것도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유식불교의 이해』, 『연기법으로 읽는 불 교』, 『대승기신론 입문』, 『정토, 이야기로 보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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