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으로 이해하는 붓다의 가르침 19 참나와 나__홍창성

참나와 나

홍창성

미네소타주립대학교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나는 지난 몇 호에서 ‘마음은 없다’라는 주장을 폈는데, 실은 아무 마음도 없다 는 말이 아니라 소위 참마음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가 일상생 활에서 접하는 친숙한 마음이 아니라 그런 마음의 깊고 깊은 곳에 따로 자리 잡 고 있다는 어떤 근사한 본성(自性)을 가진 실체로서의 참마음이 실재하지 않는다 는 말일 뿐이다. 그래서 마음이 참마음으로서 상주(常住)하지 않는다고 해서 끊임 없이 생멸하며 이어져오는 의식의 과정으로서의 마음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斷滅) 또한 아니다.

한국 불교계 주류에서 이해하기를 거부하는 붓다의 무아(無我)의 가르침에 대 한 심각한 오해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논의했다. 그런데 참나가 존재하지 않 는다는 가르침은 나를 나이게끔 하는 참된 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나를 나이게 해주는 참된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최소한 불교계에서 는 자신의 몸을 참된 자신이게끔 해주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는 어렵다. 그래서 ‘참마음은 없다’는 필자의 주장과 ‘참나가 없다’는 무아론에 대 한 이해는 그 논의의 구조가 거의 일치함을 보일 수도 있다.

논리적으로 요청되는 나의 존재

불교가 무아를 가르친다고 해서 일상생활에서 논리적으로 그 존재가 요구되는 개인 인격체(person)로서의 나의 존재조차 부정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우리가 인 격체로서의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사회에서 정상적인 의사소통을 통 한 상호작용이 불가능하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이순신 장군을 지칭하려고 할 때 불교의 무아론에 지나치게 충실한 나머지 그를 이순신이라는 개인 인격체로 보지 않고 “이러저러한 몸과 그러그러한 지각, 생각, 의지 그리고 의식(오온)의 집 합체”라는 길고 장황한 표현을 쓸 수 없는 노릇이다.

한편 인격체뿐만 아니라 부분들로 이루어진 모든 사물도 자성(自性)이 없어서 실재한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단순체(simple)를 제외한 모든 복합체(composite)를 지칭하기 위해서도 위와 같이 장황하고 어색한 언어 표현을 사용해야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의 언어생활이나 사회생활이 사실상 불가능해질 것이다. 따라 서 우리가 사고체계 대부분을 지배하는 언어 사용과 관련된 규칙을 지금과 같이 유지하는 한, 개인 인격체로서의 나의 존재와 복합체의 존재가 최소한 논리적으 로는 인정되어야 한다. 그래서 칸트식으로 말하자면, 나와 복합체의 존재가 논리 적으로 요청된다.

실용적으로 요청되는 나의 존재

인격체로서의 나의 지속적인 존재가 실용적으로 요구된다. 참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신한 내가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한번 가정해보자.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집합체뿐이어 서, 오늘밤에 잠자리에 들 이 오온(五蘊) 덩어리는 내일 아침 이 자리에서 깰 오온 덩어리와 전혀 다르다. 따라서 현재의 이 복합체와 상관없는 다른 복합체가 내일 아침에 상쾌하고 건강하게 일어나라고 지금 굳이 이를 닦고 샤워하며 일찍 잠자 리에 들 이유가 없다. 무아를 깨달아 번뇌에서 벗어나서 좋은데, 현재에 만족하면 되었지 왜 내일 아침에 일어날 다른 색수상행식 복합체 좋으라고 지금 굳이 치실 까지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하는가?

미래를 염려하지 말고 현재를 만끽하며 사는 것이 마치 깨달은 사람이 보이는 멋진 삶인 것처럼 가르치는 이야기가 많다. 내 생각으로는 이것은 하나만 알고 둘 은 모르는 소리다. 불교에서도 고통이 줄고 행복이 늘면 좋다는 점에 아무도 반대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삶은 근시안적으로 현재의 행복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누적된 결과로서의 고통과 행복의 총량을 고려하며 설계해야 한 다. 행복의 총량이 더 많아지는 데는 상주(常住)하는 참나가 존재하지 않아도 문제 없다. 오온의 복합체로서의 인격체가 존재하고, 이 인격체가 끊임없이 변화하더 라도 오늘밤 이 인격체가 내일 아침에 깨어날 좀 다른 인격체와 인과적(因果的)

 

참나는 없지만 나는 편리상 있다.

나는 참나로서 상주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존재하지도 않는 무(無, 斷滅)도 아니다.

나는 묘(妙)하게 있다.

 

로 연결되어 있는 이상, 오늘밤 현재의 복합체가 이를 닦고 치실을 하며 샤워를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주는 것이 내일 아침 좀 다른 복합체가 더 건강하고 행 복하게 일어나도록 도와주어 이 인격체의 행복 총량을 증가시켜준다.

행복의 총량을 증가시켜줄 행위를 지속적으로 행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나’라 고 불리는 인격체가 존재하고 또 수십 년 동안 내가 동일한 인격체로서 존재한다 고 가정하면서 사는 편이 여러모로 편리하고 좋다. 사람들은 그래야 좀 더 적극적 으로 미래를 위해 저축하고 보험도 들며 노후생활에 대비도 하게 된다. 인격체로 서의 나의 가상적 존재는 실용적(實用的)으로도 요청된다.

도덕적· 법률적으로 요청되는 나의 존재

인격체의 존재는 도덕적·법률적으로 필요불가결하다. 시저를 찔러 죽인 오온 복합체(브루투스)가 여러 날 동안 이 오온에 끊임없이 일어난 생멸의 과정 이후 다른 오온 복합체가 되어 법정에 서게 되는 장면을 상상해보자. 이때 전자의 오온 복 합체와 후자의 오온 복합체가 동일한 인격체 브루투스가 아니라면, 법정은 후자의 복합체로서의 브루투스를 살인죄로 처형할 근거를 잃게 된다. 후자가 전자와는 다 른 인격체라면 전자가 저지른 살인죄에 대해 후자를 처벌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밀린다왕문경』에서 들판에 난 불의 예로 설명한 것처럼 이 두 복합체가 인과 관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법정에 선 여러 날 뒤의 브루투스를 처벌할 수 있 다고 설명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보다는 참나는 없지만 색수상행식 오온의 복 합체로서의 인격체가 오랜 시간에 걸쳐 동일한 인격체로서 존재한다고 간주하는 것이 우리의 사회적 삶 안에서의 도덕적·법률적 목적을 위해 효과적이다. 그래 서 인격체로서의 나의 가상적 존재는 도덕적·법률적으로도 요청된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간단히 정리해보자면, 영원불변 불멸의 자성을 가지고 실 체로서 존재하는 영혼과 같은 참나는 존재하지 않지만, 색수상행식의 복합체인 인격체로서의 가상적 존재인 나는 수십 년 동안 끊임없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논 리적, 실용적, 도덕적 및 법률적으로 동일한 존재자로 남아 있는다. 그래서 말하 자면, 참나는 없지만 나는 편리상 있다. 나는 참나로서 상주하지는 않지만, 그렇 다고 해서 전혀 존재하지도 않는 무(無, 斷滅)도 아니다. 나는 묘(妙)하게 있다.

서양 철학사에서 전개된 자아(self)와 인격체에 대한 논의

17세기 영국 철학자 존 로크(John Locke)는 인격체 동일성을 결정하는 기준으로 기억(memory)을 제시했다. 내 의식 속에 있는 기억이 나를 나이게끔 해주는 근거 라는 것이다. 나는 내게 일어났던 과거의 모든 일들을 가장 잘 기억하고 있는 사 람이고, 따라서 나의 나에 대한 기억이 나를 나이게끔 해주는 기준이라는 점은 직 관적으로 설득력 있다. 일란성 쌍둥이처럼 똑같이 생긴 왕자와 거지 각각의 정체 성(identity)을 결정하는 것은 그들이 의식 속에 가진 기억들일 뿐이다. 그래서 만약 이 두 사람이 서로의 기억을 모두 바꾸게 된다면 원래 왕자는 거지가 되고 원래 거지는 왕자가 될 것이다. 한편 기억을 모두 상실한 사람은 더 이상 동일한 인격 체가 아니며 또 의식 없이 코마 상태에 있는 식물인간은 법적으로 인격체로 인정 받지도 못한다.

영국 교회의 주교를 지낸 조지프 버틀러(Joseph Butler)는 로크의 주장이 선결 문 제 요구의 오류를 범한다며 날카롭게 지적한다. 버틀러는 기억이란 언제나 누군가 의 기억이기 때문에1) 내가 기억하는 것은 언제나 나의 기억이어서 나의 동일성이 먼저 확보된 다음에야 기억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격체 동일성 의 기준으로 내놓은 기억은 이미 인격체 동일성이 확보된 다음에야 말할 수 있는 것이어서 로크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오류라는 것이다. 서양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버틀러의 논증은 로크의 주장을 결정적으로 무력화시킬 정도의 힘이 있다.

그러나 로크의 견해에 반대하며 제시한 버틀러 자신의 주장 또한 어려운 문 제에 직면한다. 인격체 동일성과 관련해 버틀러는 동일성 개념을 느슨한 동일성 (loose identity)과 엄밀한 동일성(strict identity) 두 가지로 분류하는데, 인격체 동일성 이 해당된다는 둘째 것이 문제다.

(1) 느슨한 동일성(loose identity) – 모든 사물은 계속 변하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 에서는 아무것도 동일하게 남아 있지 않지만, 우리는 보통 그냥 느슨하게 그것들 이 동일하다고 본다. 집 앞의 아름드리 50년 된 소나무가 50년 전 그 자리에 심어 진 작은 소나무와 동일한 (identical) 소나무인가? 상식적으로 말할 때는 같은 소나 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크기와 생긴 모양, 색깔, 구성하고 있는 세포를 채 우고 있는 물질 등이 모두 다른 둘이 정말로 동일할 수는 없다. 시간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는 바위, 산, 집, 자동차, 동물 등도 모두 마찬가지다. 이것들은 모두 느 슨하게만 동일할 뿐이다.

1) 불교는 이 점에 반대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그 논의를 생략하기로 한다.

(2) 엄밀한 동일성(strict identity) – 버틀러에 의하면, 다른 모든 존재자와 달리 인 격체는 엄밀한 의미에서도 동일한 존재자로 남는다.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해 저항 할 수 없는 직관을 가지고 있고, ‘person’이라는 개념은 가장 원초적인(primitive) 개념이어서 어떠한 정의도 불가능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빨강, 차가움, 건조함 등은 가장 기본적인 원초적 개념이어서 더 이상 개념 분석이 불가능해 이것들을 말로 정의하고 설명할 수 없다. 버틀러에 의하면 person도 개념적으로 분석해서 정의하거나 설명할 수 없지만 person의 존재는 우리에게 직관적으로 명백하다. 그리고 person은 시간이 경과해도 결코 변치 않기 때문에 person이 엄밀한 의 미에서 동일하다는 점에 추호의 의심도 없다고 한다.

person이 엄밀한 의미에서도 언제나 동일하다는 버틀러의 주장이 내게는 직 관적으로 하나도 명백하지 않다. 그런데 주교직을 맡아 영원불변 불멸의 영혼을 매일같이 가르쳤을 버틀러에게는 그것이 분명했던 모양이다. 그는 말로 설명할 수 없다는 ‘명백한 직관’으로 엄밀한 의미에서의 person의 동일성을 주장했는데, 이것은 그의 직장인 교회의 영혼설과 다를 바가 없다. 그는 self(soul)와 person을 구별도 하지 않았다.

철두철미한 경험론의 입장에서 삶과 세계를 보았던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버틀러와는 정반대되는 주장을 내놓았다. 그는 자아(self)의 존재를 믿었던 당시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우리에게 self가 존재한다면 그것이 육체의 일 부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렇다면 의사와 과학자들이 이미 오래전에 우 리 몸속에서 self를 발견했을 테니까. 그래서 self가 존재한다면 몸이 아니라 마음 속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번 눈을 감고 스스로의 마음속을 구석구석 철저히 내성(內省)하며 self를 찾아보라. 과연 우리는 self와 마주칠 수 있을까? – 그럴 수 는 없다. 우리가 내성하며 마주치는 것들은 언제나 과거의 특정한 경험에 대한 기 억이나 상념들일 뿐이지, ‘진정한 나’라는 self는 결코 마주칠 수 없다. 그래서 self 는 우리 몸속에도 마음속에도 없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20세기 후반 영국 철학자 데릭 파핏(Derek Parfit)도 인격체의 존재란 단지 의식의 (인과적) 연속성 이외에는 달리 아무것도 없다고 논하며 서구 전통에서 믿어온 self 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러면서 그는 그의 저술에서 인간은 self의 존재를 부정하 면서는 살 수 없다고 주장한 오거스틴(Saint Augustine)이 틀렸고, 비록 어렵기는 해 도 self의 존재를 부정하고 극복할 수 있다고 한 붓다가 옳았다고 분명히 한다. 20 세기 후반 자아와 인격체 동일성 연구 분야 서구 최고 권위자였던 파핏이 자신의 가장 중요한 저서에서 무아(無我)를 가르친 붓다가 옳았다는 결론으로 논의를 마 무리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칸트가 ‘예리한 철학자’라고 여러 차례 칭송한 데이비드 흄이 18세기에, 그리고 데릭 파핏이 20세기에 겨우 도달한 무아의 결론을 붓다는 2,500여 년 전에 이미 훨씬 더 섬세하고 세련된 논증으로 설파했다. 이것이 내가 불교를 최첨단 철학이 라고 생각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참나는 없다

나는 오랫동안 서양 종교의 영혼관과 불교의 무아론이 형이상학적으로는 정반 대이지만 우리 삶을 잘 살아가는 지혜와 좋은 가르침을 주는데 있어서 서로 별 차 이가 없다고 생각해왔다. 예를 들어 서양 종교에서는 가난한 이웃을 돕는 일은 스 스로의 영혼을 위해서 좋은 일이라고들 하는데, 불교에서는 무아의 입장에서 ‘나’ 라고 불리는 오온 집합체가 가난하든지 아니면 다른 오온 집합체가 가난하든지 아 무 차별 없이 그 가난을 동등하게 구제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내 몸에 난 상처나 다 른 사람 몸에 난 상처 모두 같이 치료해주는 것이 좋다는 가르침도 두 종교관으로 부터 똑같이 나올 수 있다. 이와 같이 모든 이타적(利他的)인 행위 실현과 정의(正義) 의 구현에 대해 영혼론과 무아론은 서로 별 차이 없이 좋은 가르침을 줄 수 있다.

그런데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오랫동안 되새기다 보니, 스스로의 영혼을 돌보아야 한다는 서구 종교의 가르침이 오히려 영혼에 대한 무한한 집착을 야기하지 않는가라는 의문이 들게 되었다. 영혼을 이롭게 하고 구제해 천국으로 이끄는 행위는 모두 좋고, 영혼 구제에 도 움이 되지 않거나 구제와는 반대 방향으로 가게 하는 행위는 모두 멀리해야만 할 까? 서양 종교의 역사에서 신(神)의 뜻을 따름으로써 영혼을 천국으로 이끈다는 미명(美名) 아래 저질러진 수많은 참혹한 전쟁과 살육 행위들을 상기해보면, 영혼 에의 집착도 분명 심각한 문제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영혼에 대한 너무도 강 렬하고 무한한 집착이 없고서야 어떻게 그토록 참혹한 짓을 수천 년 동안이나 지 속할 수 있었겠는가?

서구 종교들과는 달리 스스로의 영혼의 존재마저 부정하며 모든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야만 깨달을 수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 아래서는 불법을 위한다는 이름 으로 전쟁과 살육 행위들이 일어나서는 안 되고 또 역사상 그런 적도 거의 없었 다는 점이 반갑다. 불자들은 자부심을 가질 자격이 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한국 불교계에서는 힌두교의 아트만 또는 서양 종교의 영혼과 똑같은 참나를 줄기차 게 가르쳐왔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이번 호를 끝으로 <현대적으로 이해하는 붓다의 가르침>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좋은 원고를 보내주신 홍창성 선생 님께 감사드립니다.

홍창성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 박사. 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 철학과 교수. 형이상학과 심리철학 그리고 불교철학 분야의 논문을 영어 및 한글로 발표해왔고, 유선경 교수와 함께 현응 스님의 저서 『깨달음과 역사』를 영역하기도 했다. 『미네소타주립대학 불교철학 강의』를 출판했고, 유선경 교수와의 공저 『(가제)생명현상과 불교』가 출판될 예정이다. 「Buddhism for Thinkers」를 집필 중이며, 불교의 연기(緣起)의 개념으로 동서양 형이상학을 재구성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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