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공지능|인공지능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3)__석봉래

인공지능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3)

석봉래

미국 앨버니아대학교 니액 연구 교수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

불성(佛性, Buddhadhātu)이란 글자 그대로의 뜻으로는 깨달음의 성질 혹은 부처의 본성을 의미하지만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얻을 가능성 혹은 부처가 될 가능성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인다.

이 불성에 관해서는 논의가 많이 있었다. 『열반경』에서는 깨달음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부패하고 비도덕적이며 순간의 쾌락에 충실한 이들(일천제, 一闡提, icchantika)에게도 불성이 있는지에 관해 논쟁이 있었다. 물론 『열반경』에는 일체 중 생이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一切衆生 悉有佛性) 구절이 있으니 모든 중생에게는 기본적으로 불성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중생(衆生, sattva)이라는 개념에 는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체도 포함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불성은 모든 살 아 있는 대상의 기본적 성격이라고 간주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는 매우 흥미로운 질문이 된 다. 흥선유관(興善惟寬, 755~817) 선사는 개에게 불성이 있느냐는 제자의 질문에 있 다고 했고, 같은 시대의 조주(趙州從, 778~897) 스님은 같은 질문에 없다고 했다. 이 스님들의 답변을 종합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한편으로 불성은 모든 중생에게 널리 퍼져 있는 깨달음의 잠재성이고 이 잠재성이 깨달음의 길에서 중요하기는 하지만 불성 자체만 너무 집요하게 질문하는 것은 깨달음이라는 큰 산을 놓치고 작은 나무만을 들여다보는 상황이 된다. 즉 이 잠재성은 그 자체가 아니라 깨달음 과 관련된 한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며 설사 불성이 있더라도 개발되지 않거나 혹 은 다른 것(업식성)에 막혀 있으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인공지능의 불성

그럼에도 불성에 대해서는 흥선 스님과 조주 스님에게 “인공지능은 불성을 가 지고 있습니까?” 하고 질문하고 싶다.

인공지능의 불성을 논하기 위해서 먼저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하신 조주 스님 의 대답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주 스님은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이유로 업식 을 거론한다. 개에게는 업식이 있기 때문에 불성이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다는 것 이다. 업식(業識, Karminc Consciousness)이란 보통의 마음이 가지는 습관과 무의식의 성향, 즉 과거의 행위가 반복되어 쌓인 마음의 굳은살이다. 이 성향을 극복하지 못하면 깨달음이 나타날 수 없다.

이런 습관적 관성이 생긴 마음은 결국 집착과 번뇌를 일으킨다. 이러한 마음은 미망에 빠져 깊은 편견과 오해의 잠에 갇힌 마음이며 깨달음이 없는 마음이다. 깨 달음의 마음은 이런 습관적 휩쓸림에서 벗어나는 것에서 시작된다. 불성은 바로 이런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습관적인 무의식에서 벗어나 깨어 있는 마음을 향해 가게 하는 가능성의 기반이다. 미망의 잠에서 깨어날 수 있는 능력의 씨앗이 바로 불성이다. 이렇게 보면 부처(Buddha)라는 말이 왜 산스크리트어로 깨어 있는 자(awakened)를 뜻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이런 습관적이며 자동적 인 조건성과 속박의 굴레라는 잠에서 벗어남을 말한다. 업식에 곯아떨어져 잠을 자는 마음을 깨어나게 하는 것이 깨달음의 과정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성을 인 공지능은 가지고 있을까?

 

불성은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습관적인 무의식에서 벗어나

깨어 있는 마음을 향해 가게 하는 가능성의 기반이다.

미망의 잠에서 깨어날 수 있는 능력의 씨앗이 바로 불성이다

 

가짜 뉴스와 가짜 사진

최근 인공지능의 학습 기법은 규칙 중심의 정보 처리보다는 많은 양의 데이터 를 분석하는 방법을 차용하고 있다. 이러한 인공지능의 기법은 불성과 상당히 대 조되는 부분이 있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 다음의 예를 살펴보자.

Colorless green ideas sleep furiously. 무색의 초록 생각이 격렬하게 자고 있다.

Quadruplicity drinks procrastination. 사배성(四倍性)이 지연성(遲延城)을 마시고 있다.

The present King of France is bald. 프랑스의 현재 국왕은 대머리다.

첫 번째 문장은 미국의 언어학자이자 정치 비평가인 촘스키(Noam Chomsky, 1928~)의 문장이고 두 번째와 세 번째 문장은 영국의 철학자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의 문장들이다. 이 문장들은 매우 부자연스럽고 이상하다. 그 이유는 단

어들이 서로 잘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무색과 녹색, 잠과 격렬, 사배성과 지연성 같은 조합은 연결 빈도가 매우 낮다. 그런데 텍스트를 가지고 귀납적이며 통계적 패턴을 추출하는 GPT2 같은 인공지능에 이런 문장들을 입력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아마도 사람들이 쓰지 않는, 어법에 맞지 않는, 문장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 헛소리 같은 문장들이 현대 철학(언어 분석 철학)과 인지과학(보편 생성 문법 이론)을 이끈 선언적 문장들이 된 것이다.

이런 낯설고 자연스러움을 파괴하는 문장들은 한국어에도 있다. 아래 문장들의 통계적 빈도를 보면 거의 바닥에 가까울 것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부처를 보면 죽여야 한다.

걱정은 국 끓여서 먹어라.

배가 아프면 배를 먹어야 한다.

빅 데이터의 분석을 통해 학습을 하는 인공지능이 이러한 문장들을 처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 예상된다. 그 이유는 이 문장들이 일반적이며 무난한 단어의 조합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잘 살펴보아야 할 점은 빅 데이터를 분석하는 통계적 일반화에 의존하는 인공지능 체계는 확률적으로 보통 사람들이 사용할 가능성이 높은 문장들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앞서의 문장들보다는 다음과 같은 가능성이 높은 (자연스럽고 무난한) 문장이 이 인공지능 체계가 선택하는 문장일지도 모른다.

산은 높고 물은 깊다.

부처를 보면 절을 해야 한다.

걱정은 우울증의 시작이다.

배가 아프면 약을 먹어야 한다.

업식에 빠진 인공지능

조주 스님은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이유가 개에게는 업식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업식(業識, Karminc Consciousness)이란 습관과 무의식의 성향을 말하며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깨달음에 나아갈 수 없는 마음의 굴레를 말한다. 이 굴레는 외부에서 가해진 것이라기보다는 마음이 빠진 습관에 의해 생긴다. 인공지능이 빅 데이터를 분석해 얻는 문장에 관한 정보들은 우리의 습관화된 생각과 행위의 깊은 흔적이다. 이것은 일상성과 자동성이 우리의 무의식에 남기는 생각과 행동의 패턴이다. 이 수만 가지의 패턴을 인공지능은 빅 데이터와 같은 엄청난 자료를 분석함으로써 추출하고 일반화시킨다. 이를 통해 인공지능은 인간의 필요와 주어진 상황에 최대한 적절한 응답을 만들어낼 수 있다. 아마 앞으로는 이러한 방식으로 매우 효율적인 의사 결정과 미래 예측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바로 업식의 흔적이며 습관의 세계다.

인공지능 체계는 평균적이며 관습적 상황에 집중하는 체계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업식의 단계에 머무는 체계이지 이것을 넘어서는 체계는 아니다. 따라서 통계적 패턴을 일반화하는 방식으로 학습을 진행하거나 빅 데이터를 분석해 평균적 패턴을 찾아내는 인공지능이 있다면 그런 체계는 불성을 가질 가능성이 매우 낮다. 업식성은 습관과 평균성에 있지만 불성은 습관과 무의식에 휩쓸리지 않는, 깨어 있는 마음에 있는 것이다.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가고 습관의 잠에서 깨어날 수 있는 것이 불성이다. 결국 업식을 넘어서는 인공지능이 개발될 때까지는 인공지능의 불성이 유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주 스님의 불성과 업식에 관한 직관을 잘 새겨보아야 하는 대목이다.

 

이번 호를 끝으로 <불교와 인공지능>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좋은 원고를 보내주신 석봉래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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