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불교의 생명관__윤원철

불교의 생명관

사생, 삼계윤회, 연기

윤원철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사생(四生)

생명에 관해 불교는 뭐라고 가르치는지 알아보자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4생이다. 드물게도 생물에 관해 직설적으로 언급하는 개념이기도 하고 『금강경』에도 언급되어서 잘 알려졌기 때문일 터이다.

4생 개념은 생명체가 탄생하는 방식을 난생(卵生)·태생(胎生)·습생(濕生)·화 생(化生) 네 가지로 분류한 일종의 유형론이다. 그러나 이것을 과학적인 유형론으 로 읽으면 곤란하다. 특히 축축한 데에서 한기와 열기가 화합해서 벌레들이 생긴 다는 습생 개념은 이젠 폐기되어야 하겠다.

한편 화생이라는 개념은 우리의 일상적인 어휘에는 없기 때문에 낯설다. ‘본래 없었는데 갑자기 태어나는 것, 의탁하는 곳 없이 업력에 의해 출현하는 것’이라고 풀이된다. 그런데 욕계(欲界)의 6도 중생이 모두 화생의 예로 거론된다. 『아비달마 구사론』의 설명에 의하면 인간은 태생이기도 하고 화생이기도 하다. 축생에는 태생도 있고 난생도 있고 화생도 있다. 아귀는 태생이거나 화생이라고 한다. 지옥 중생과 욕천의 신들은 화생이고, 『무량수경(無量壽經)』에 의하면 아미타불의 서방 정토에 왕생하는 것도 화생이다.

그러니까 이 4생 개념을 두고 똑 부러지는 깔끔한 유형론을 의도한 것으로 받아 들이면 곤란하다. 4생 개념의 메시지를 무난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초점을 화생 에 두는 게 좋겠다. 욕계에 윤회하는 생명체들이 탄생하는 방식은 난생, 태생, 습생 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모두가 화생이다. 즉 윤회 환생은 난생이나 태생 또는 습생 이라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거기에 공통으로 작동하는 원리는 업력임 을 말하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닭은 닭이 낳은 달걀로부터 태어나 는 난생이요, 사람은 모친에게 잉태되어 태어나는 태생이지만, 윤회 환생한 존재 로서는 화생이라는 이야기다. 본래 바로 그 사람과 연속되는 사람이 전생에 없었 는데 여러 인연의 업력으로 현생에 그런 사람 하나가 만들어졌으니 화생이다. 이

 

불교는 우리 모두 연기적 존재이므로 온 세상이 내 책임이라고 여기는

성인의 길을 취하라고 가르치는 종교이다. 그러니 다른 생명의 불행을 대가로 해서

나의 생명이 행복을 누린다면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고 본다.

윤회설의 가장 중요한 초점이 거기에 있다.

 

대목은 나중에 아래에서 ‘연기’를 언급할 때 다시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증일아함경』에서는 세존께서 4생을 설명한 다음 이렇게 말씀하신다. “모든 비 구들아, 너희들은 마땅히 방편을 구해 이 네 가지 생을 버리고 네 가지 진리의 법 을 성취해야 하느니라. 꼭 이와 같이 공부해야 하느니라.”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중생이 탄생하는 방식을 네 가지로 분류하는 유형론이 아니라 바로 이 마지막 대 목이다. 즉 수행 방편을 통해서 4생을 버리고 4성제를 증득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꼭 그렇게 노력하라고 간절하게 당부하셨다. 그러니 중생이 탄생 방 식에 따라 어떻게 분류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윤회의 이치를 깨치고 벗어 나라는 게 초점이다.

삼계윤회(三界輪廻)

알다시피 모든 생명이 업에 따라 윤회한다는 것은 불교 이전부터 인도에 이미 있었던 관념이고 불교에서도 이를 받아들여서 활용했다. 다음 생에 환생할 때 개 인의 업과 업보에 따라 카스트나 그 밖의 조건들이 결정되어 태어나게 되며, 더 좋은 상태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자기의 신분에 따른 사회적 의무와 직무, 그리고 윤리·도덕규범을 충실히 지키고 이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건이었다.

불교의 윤회 교리에서도 그런 내용이 많이 보인다. 하지만 불교에서 윤회의 개 념을 활용해서 얘기하려는 것은 거기에 그치지 않으며, 그 초점이 따로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대개 불교에서는 여섯 가지 존재로 환생하며 윤회하는 것을 가르친 다고 알고 있지만 그건 욕계(欲界)의 6도 윤회일 뿐이다. 생명체의 존재 양상은 욕 계에 한정되지 않으며 3계(三界), 즉 욕계,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에 걸쳐서 자그 마치 31 내지 38가지가 있다고 말한다(경전이나 논서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그렇게 복 잡하고 다양한 존재양상을 나열한 것을 두고 그 하나하나가 다 문자 그대로 실체 를 가리키는 개념이라고 여기는 것은 곤란하다.

즉 삼계는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의 유형을 말하는 게 아니라 정신적인 세계를 비유적·상징적 개념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를테면 “감관의 욕구가 많은 경 우를 욕계라고 하고, 초선에서 제4선까지의 선정의 상태를 색계라고 이름하며, 더욱 정적한 정신통일의 상태를 무색계라고 말한 것”인데 부파불교 아비달마에 서 그걸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여기고 설명을 붙임으 로써 원래의 취지에 어긋난 불합리한 교설이 되어버렸다고 보는 견해가 옳지 싶 다(마성 스님, 『삼계는 실존하는 세계가 아니다』, 불교닷컴). 즉 선정의 수련을 통해서 탐욕의 업력에서 벗어나고 더 나아가서는 심지어 존재의 물리적 제약마저 극복하는 경 지를 달성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 삼계설의 취지이다.

그런 관점에서 불교의 윤회 교설을 다시 앞에 놓고 들여다보면, 초점이 윤회, 환생 그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뭔가 다른 데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게 된다. 결론 적으로 말하자면, 윤회 개념을 동원해서 연기법을 가르치려 했다고 이해된다.

연기(緣起)

불교에서는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생명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비롯했고 그 본질은 무엇인지 등등 우리가 흔히 연상하는 주제에 대해서는 이야 기하지 않는다. 다만 생명현상에 가장 핵심이 되는 중요한 실상을 가르치는 데 교 설이 집중된다. 연기법이 바로 그것이다.

불교에서도 윤회설의 핵심은 업과 업보의 인과응보이다. 그 업의 힘으로 인해 나고 죽고 또 나고 죽는 과정이 끝없이 되풀이된다. 그런데 불교 윤회설의 방점은 업력이 한 특정 생명체의 연속된 환생으로 작동한다는 데 찍혀 있지 않다. 그보다 는 개체 차원을 넘어 온 세상의 모든 생명이 연기적 존재로서 서로 방대하고 긴 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실상을 통찰하는 데 방점이 있다.

이탈리아 출신 영화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영화 <리틀 부다>(1993년)에 불교의 윤회 환생 개념을 잘 비유해주는 장면들이 있다. 한 티베트 고승의 제자 가 스승의 입적 후 7년 만에 자기 스승의 환생을 찾고 보니 세 아이로 태어났더라는 얘기이다. 감독은 그걸 더욱이 미국 시애틀의 백인 남자아이와 인도의 여자아 이, 그리고 부탄의 길거리 아이로 설정했다. 그 의도는 금방 짐작할 수 있을 것이 다. 한 생명이 온 세상의 다양한 존재로 나뉘어 환생할 수도 있고, 거꾸로 여러 생 명이 한 개체로 환생할 수도 있겠다. 달리 말하자면 각 생명체에 온 세상이, 세상 의 과거 현재 미래가 환생되고 반영되어 있다는 관점이다.

찻잔의 비유도 동원된다. 찻잔이 깨지면 깨진 찻잔 조각들은 쓰레기 매립장에 버려지고 흩어져서 더 이상 찻잔이 아니지만, 사금파리로서 세상 속에 나름대로 존재하고 기능을 한다. 찻물도 이젠 마실 수 없는 물이 되어 걸레를 거쳐 하수구 로 흩어지지만 습기로서 세상 속에 유전한다. 생명체의 윤회 환생 또한 그와 같이 이해하는 것이 무아(無我)와 연기를 기초로 하는 불교의 교설에 합당할 것이다.

우리가 절대시하는 우리 각자의 이 한 생명은 불교의 시각으로 보자면 그렇게 온 세상과 연기해 온 세상을 한 몸에 담고 있고 온 세상 속에 스며들어간다. 불교 윤회설의 초점이 바로 거기에 있다. 강의실에서 그런 식으로 설명하자 학생들이 반응하기를, 그렇다면 내가 어떤 업을 짓든지 업보를 나 혼자 직접 받는 게 아니 라 온 세상이 받게 되는 셈이니 마음 편하게 살아도 되겠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거기가 성인과 범부가 갈라지는 지점이다. 싯다르타는 생로병사가 모든 생명들 의 피할 수 없는 괴로운 운명임을 알게 되자, 그렇다면 나도 어쩔 수 없으리라 하 면서 주저앉지 않았다.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생명들의 문제라니 오히 려 이것이야말로 내가 책임지고 해결하겠다며 나섰다. 불교는 우리 모두 연기적 존재이므로 온 세상이 내 책임이라고 여기는 성인의 길을 취하라고 가르치는 종 교이다. 그러니 다른 생명의 불행을 대가로 해서 나의 생명이 행복을 누린다면 그 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고 본다. 윤회설의 가장 중요한 초점이 거기에 있다.

윤원철 서울대학교 종교학 전공으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미국 롱아일랜드에 있는 스토니브룩 뉴욕 주립대학교 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불교사상의 이해』, 『똑똑똑 불교를 두드려보자』, 『종교와 과학』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현대의 종교 변용』, 『깨침과 깨달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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