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 생명의 진화와 연기법__문희범

생명의 진화와 연기법

문희범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

 

 

일체 만법이 연기법 아닌 것이 없지만, 불교는 생명, 그중에서도 인간의 고통과 생사에 대해서 깊은 연기적 통찰을 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종교와는 꽤나 다르게 석가모니께서 가장 마음에 두고 계 셨던 것이 인간과 여타 생명의 괴로움이었기 때문이다.

피할 수 없는 이것이 바로 괴로움이고 괴로움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으며 이것 을 바로 봄으로써 반드시 해탈한다는 것이 불교의 요체이니 이 사성제 역시 연기 법이다. 고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려운 것은 괴로움의 참모습, 즉 연기의 실상을 보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여북하면 깨친 경지가 아니면 연기의 법을 알 수 없다는 말이 있겠는가. 부처님 원음으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진다” 하신 것이 연기 법칙 의 원형인데, 마치 갈대 단 두 개가 서로 의지해 서 있는 것과 같다고 설명하는 이 불교적 존재론 안에 공과 중도의 진리가 들어 있다. 초기 경전에 반복해서 나오는 십이연기는 생사 고통의 원인적 구조인데, 열두 개 연기의 가지 중 어느 하나가 있거나 없으면 그에 의지하는 다른 가지도 같이 연생연멸하게 되어 고와 해탈 모 두가 연기법 안에 있음을 설하신 것이다.

대승불교로 넘어오면서 연기법은 여러 개념과 이름으로 변통했으나, 공과 중 관과 법계 사상이 성하면서 십이연기 자체에 대한 논의는 자연히 멈추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이 십이연기의 열두 개 가지 중에서 몇 가지는 아직도 그 뜻이 우리 에게 분명하게 전달되지 않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는데, 근래에 남방불교를 깊이 공부한 분들의 설명을 들어도 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할 무명, 시작 없는 근본 무명에 대해서 역시 그저 탐진치가 무명이라거나 연기를 모 르는 것이 무명이라고 할 뿐, 그 소이연에 대한 해설이 없다.

어리석은 언설이겠지만 무명의 까닭을 모르고서야 어떻게 무명을 멸하여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여 식이 멸하고 하여 생사고뇌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 십이연기 법의 이해에도 어떤 친절한 자애심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맥락은 전혀 다르지 만 기독교에도 비유만 있을 뿐 원죄의 소이연에 대한 설명은 없다.

한때 현대 양자물리학의 성취를 불교의 불이중도에 비교해 과연 불교의 진리가 과학으로도 증명되었다는 생각에 고무된 사람들이 많았고, 스님들의 법문에서도 으레 입자니 파동이니 하는 얘기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종교가 과학이 되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인데도 그러했던 것은 오랜 시간 불교에 덧씌어진 허무주의의 누명을 물질세계를 빌려 벗기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어찌 되었든 불교는 과 학과 대립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근래에 불교 전통의 지관수행이 명상이란 이름 을 달고 역수입되고, 뇌과학과 인공지능 같은 분야가 첨단의 학문으로 등장하면서 마음과 두뇌에 대한 생물학적 이해에도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지난 50년간 생물 학은 전성기의 물리학이 무색할 정도로 발전했고 그 기반에는 19세기 다윈으로부 터 발화한 진화론이 자리하고 있다. 모든 생물학은 진화생물학이요 심리학은 진화심리학이 되어가고 있다.

생명 진화의 역사는 약 38억 년으로 추정된다. 이는 지금부터 44억 년 전 지구 가 만들어진 후 6억 년이 지나서 첫 생명체로 여겨지는 세포가 출현했다는 이야 기다. 모든 생명체는 한 개의 세포든 여러 개의 세포든 세포로 이루어지며, 모든 세포는 반드시 세포로부터 유래한다.

물질로부터 세포가 만들어진 것은 지구의 역사상 단 한 번, 첫 번째 세포가 만 들어진 때일 뿐이며, 이는 물질이 생명으로 변환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우연이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생명의 탄생을 기적이라고 부르며, 이제 원시 지 구의 환경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으니 두 번째, 세 번째의 기적은 기대할 수가 없 을 것이다. 이 기적 이후로 지금까지 세포는 세포로부터만 생겨왔다. 이것이 생명 의 연속성이다.

그 이유는 세포에는 핵산, 흔히 유전자로 불리는 DNA 분자가 존재하기 때문인 데 핵산의 중요한 특징 하나는 스스로를 복제하는 능력이다. 세포가 세포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은 DNA로 이루어진 유전자가 복제되어 새로 생기는 세포에 들어 간다는 말이다. 긴 세월에 걸쳐 DNA에는 미세하거나 급격한 변이가 일어나서 조 상이 같은 개체들이라도 서로 유전자가 다르게 되고 주어진 자연환경하에서 생 존과 번식 능력에 차이를 나타내어 일부는 점차 번성한 집단을 이루고 일부는 소 멸하게 된다. 이를 생명체에 대한 자연의 ‘선택’이라고 한다.

유전자의 변이가 심하면 새로운 계통의 생명체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렇게 자 연의 선택을 받을 뿐, 아무런 자체적 ‘계획’도 없이 장구한 세월 동안 펼쳐진 생명 계의 변화 과정이 진화다. 이를 보면 모든 생명체는 한 그루의 커다란 나무에 달 린 잎과 같아서 하나의 기둥으로부터 수많은 가지가 갈라지지만 모두가 한 뿌리, 한 개의 원시세포로부터 기원한 ‘하나의’ 생명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사람과 쥐 와 꿀벌과 벼가 유전자를 공유하는 이유이다. 한편 나의 유전자는 태초의 세포로 부터 ‘단 한 번의 단절도 없이’ 38억 년 동안 전달되어서야 지금의 나에 이를 수 있었으니, 우리 각자는 이렇게 38억 년을 살아온 생명이라는 사실 앞에서 누구든 경탄을 금할 수 없는 것이다.

유전자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이것은 생물학적 질문이며 철학적 질문이다. 유 전자는 우리 신체의 모습과 구조와 기능을 ‘결정’한다. 물론 뇌를 포함해서다. 뇌 를 포함한다는 말은 유전자가 우리의 성격, 취향, 행동, 의지, 생각을 만들어낸다 는 얘기다. 신체와 정신의 이분법에 오랫동안 익숙해진 사람들은 신체에 속하는 뇌가 정신의 산실이라는 사실에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 정신과 영혼은 신성한 것 이며 몸은 그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마음이라 해도 마찬가지 다. 감각과 감정과 의식이 마음의 일부겠지만 마음에는 우리가 모르는 그 이상의 것이 있으며, 만일 이 모든 것이 신경세포와 유전자의 산물이라면 이는 유물론인 과학이 도달한 편협한 결론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대체 어떻게 물질로부터 정 신이 생길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다시 어떻게 물질로부터 생명이 생길 수 있겠는가로 회귀한다. 생각을 바꾸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 도대체 물질이란 무엇인가.

불교는 마음의 종교다. 불교라고 몸과 형색을 도외시한 것은 전혀 아니지만 불 교의 궁극은 마음에 맞추어져 있다. 일체유심조가 그렇고, 마음이 부처라는 것이 그렇고, 마음이 공해야 색이 공하다는 것이 그렇다. 마음을 깨치는 것, 꿈에서 깨 어나는 것, 미망을 벗어나는 것이 불교의 구경이라면 무명을 전제하지 않은 불교 는 없다. 무명이란 무엇인가. 초기 율장은 이렇게 설하고 있다. “중생은 아뢰야를 즐거워하고 아뢰야를 기뻐하고 아뢰야를 좋아하니 연기의 도리를 보기 어려우며 열반의 도리도 참으로 보기 어렵다.” 생명의 역사에서 언제 의식이, 마음이란 것 이 생겼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지구상에 인간으로 불리는 생물종이 처음 나타났 을 때 그에게는 이미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유전자의 본질에 충실하게 생존과 번 식이 그의 삶의 모든 것이었을 것이다. 욕망과 미움과 공포가 있어도 천지불인, 자연은 인간의 괴로움에 무심했고, 인간은 자신의 본성에 무지했을 것이다. 진화 가 인간의 생존을 위해 만든 최고의 발명은 아마도 ‘자아’에 대한 이기적 감정이 었을 것이다. 이렇듯 유전자는 자신의 복제를 위해 인간의 뇌를 지배하고 미혹에 빠뜨리기도 했을 것이다. 인간의 마음 깊이 애탐의 뿌리를 내려 스스로 그것을 즐 거워하고 기뻐하게 했을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수억 년 진화의 소산이다. 그 어리석음, 무명 또한 진화의 소산 이다. 그러니 무명을 깨뜨리는 것은 유전자와 싸우는 일이다. 어찌 어렵지 않겠는 가. 어쨌든 수많은 생명 중에서 자기 유전자와 대립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유일 하다. 그런 점에서 수행은 생래의 본성을 바꾸려는 노력이다. 유학에서 말하는 수 기, 수신도 욕심을 이기고 타고난 기질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것 이 가능할 수 있는가. 그것은 마음이 마음에 의해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 으로 마음을 닦는다는 것이 이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마음은 뇌를 바꿀 수 있다. 인간의 뇌는 그렇게 진화해왔다고 여겨진다. 마음은 우리에게 속박이고 희 망이다.

인간은 다른 생물에서 보기 힘든 진화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에게는 자연 만이 아니라 인간이 환경이 되기 때문이다. 사회와 문화는 인간 유전자의 산물이 기도 하지만 동시에 진화의 ‘압력’으로도 작용한다. 진화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만 미래에는 자연이 인간 유전자를 선택하는 힘보다 문화의 선택력이 점점 커질 것이다. 인간은 유전자와 문화의 대립과 협동에 의한 연기적 존재다. 누가 알겠는 가. 무시 이래로 무명이 인간을 괴롭혀왔다면 자연스레 마음을 성찰하고 깨닫게 하는 유전자 또한 진화하지 않았을까. 비록 애탐에 묻히고 가려서 드러나기가 심 히 어렵다 하더라도. 그렇다. 우리 모두에게는 해탈의 유전자, 불성의 씨앗이 이 미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을 것임이 틀림없다.

아무런 의도 없이 대자연이 무심히 벌여놓은 생명의 역사, 진화의 풍경은 그 자 체가 진여법계의 모습일 것이다. 한 뿌리 한 생명의 그물망! 그 위에서 종종 차별 과 절대 평등이 무진대연기를 이루고 있다. 고통도 해탈도 모두 무심하게 다만 연 기하고 있다.

 

문희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의학박사). 울산대 의과대학 내과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울산대 의과대학 명예교수로 있으면서 서울아산병원 자문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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