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으로 이해하는 붓다의 가르침 18 내 마음은 내 것이 아니다__홍창성

내 마음은 내 것이 아니다

홍창성

미네소타주립대학교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백 보를 양보해서 당신의 마음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은 당신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 여기서 불교의 무아론(無我論)으로 ‘처음부터 당신이란 존재가 없으니까 당신이 마음을 소유할 수도 없다’는 식으로 쉽게 끝내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가 일상에서 상식으로 믿는 것처럼 당신이 정말 존재하고 또 당신의 마음도 우리가 매일 이야기하듯이 똑바로 깨어 있다고 해도 그 마음은 당신 것이 아니라는 좀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이 글에서 전개할 내 논증은 불자들의 주의를 끌 만한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겠지만 그 주요 논지는 실은 지난 반세기 동안 서양 철학자들이 연구한 ‘심리 상태의 내용’에 대한 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는 어떤 심리 상태의 내용이 그것 자체에서 내적(內的)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심리 상태가 속한 주변 자연환경 또는 사회 환경과의 관계에 의해서 외적(外的)으로 결정된다는 주장이다. 마음이 가진 가장 중요한 기능이 언어 및 개념 등을 그 안에서 처리함으로써 언어의 의미와 사고(思考)의 내용을 다루는 것인데, 현대 서양의 언어철학과 심리철학은 이 기능이 마음 자체에 의해서 독자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마음이 환경과 맺는 관계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본다.

위와 같은 현대 서양 철학의 결론이 옳다면 내 마음이란 알고 보면 내가 가지고 노는 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이 가지고 노는 셈이 된다. 그래서 내가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가지고 놀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실은 내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 된다. 가장 쉬운 예부터 들자면, 우리가 마음속에서 어떤 이름으로 사람을 가리키는 경우에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단지 사회적 역사적으로 형성된 연결 고리를 따라가서 그 사람을 지칭하게 된다.

인과의 고리(causal chain)

우리는 이순신 장군과 관련한 많은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다. 어릴 적부터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이 충신에 대한 숱한 일화와 영웅담을 들어왔다. 누구나

‘이순신’이라는 이름으로 500여 년 전에 살았던 전설보다도 더 멋진 이 인물을 이야기해왔다. 한국인뿐만 아니라 이순신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는 외국인도 ‘이순신’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역사에 존재했던 이분을 가리킨다. 여기서 철학자들은 질문한다. 이 고유명사가 어떻게 500여 년 전에 살았던 인물을 제대로 찾아 지시할 수 있는가?

위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먼저 우리가 이순신에 대해 알고 있는 이야기들이 실은 모두 원균이 이룩한 업적들이라는 반(反) 사실적 상황(counterfactual situation)을 가정해보자. 칠천량해전에서 잘못된 판단으로 조선 수군의 궤멸을 초래하고 전사한 사람이 이순신이고, 한산대첩, 명량해전, 노량해전 등에서 승리한 사람이 원균이라고 상상해보자. 만약 이와 같이 우리가 이순신에 대해 알고 있는 내용이 모두 원균에 대한 것들이라면, 우리는 ‘이순신’이라는 고유명사로 실제로는 원균을 가리키는 것일까? 그리고 ‘원균’이라는 고유명사는 이순신을 가리킬까?

우리의 직관은 ‘그렇지 않다’고 답하게 한다. 비록 이순신이 아무 해전에서도 승리하지 못했더라도 이순신은 이순신이 아니었던 것이 아니어서, 우리는 ‘이순신’이라는 고유명사로 여전히 이순신을 가리킬 것이다. 원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역사상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었다는 점을 알고 있는데, 만약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를 실제로 가르친 적이 없었고 또 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자조차 아니었더라도 그는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였을 것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그리고 이런 반 사실적 상황에서도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이름을 언급할 때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대로 지칭되리라는 점에도 동의한다. 이런 통찰은 20세기 후반 미국 철학자 솔 크립키(Saul Kripke)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이순신’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유명사의 기능은 그 지시되는 대상에 대한 기술(description)이 아니라 단지 지칭(designation)일 뿐이라는 그의 주장에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동의해왔다.

그러면 여러 세기 전에 살았던 인물들에 대한 이런 제대로 된 지칭은 어떻게 가능할까? 크립키에 의하면 우리 세계에는 ‘이순신’이라는 고유명사를 500여 년 전에 살았던 이순신으로까지 연결해주는 인과의 고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 옛날 이순신의 부모가 태어난 아기를 ‘이순신’으로 명명(命名)했을 것이고, 그 이름은 당시 사람들에 의해 사람에서 사람으로, 즉 (인과의) 고리에서 고리로 퍼져 나갔다.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이런 인과의 고리들을 통해 전해 내려온 그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다. 그래서 설혹 이순신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이 많이 잘못되었더라도 이런 인과의 고리가 사회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언급하는 ‘이순신’이라는 이름이 500여 년 전 이순신으로까지 성공적으로 연결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다른 모든 고유명사도 마찬가지다.

위의 통찰이 마음에 대한 우리 논의의 맥락에서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마음속에서 이순신을 떠올리고 그의 이름을 말하더라도 우리 마음은 마음속의 이순신

내 마음의 내용은 내가 아니라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

그래서 내 마음은 내 것이 아니다.

을 역사상의 그 인물로 연결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연결은 오직 마음 밖에서 우리 사회와 역사 안에 존재하는 인과 고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마음이 다루는 무수히 많은 이름들은 마음 자체가 아니라 마음이 속한 사회와 역사라는 환경의 기능에 의해서만 쓸모 있게 된다. 마음이 내적(內的)으로, 독립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적다. 어쩌면 전혀 없을지도 모른다.

언어 노동의 분업(division of linguistic labor)

지금은 작고했지만 한국을 방문하기도 한 미국 철학자 힐러리 퍼트넘(Hilary Putnam)은 ‘느릅나무(elm)’와 ‘너도밤나무(beech)’라는 두 단어를 예로 들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 특히 보통명사의 뜻이 우리 마음속에서 결정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내가 쓰는 말의 뜻은 내 마음속에서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쓰는 말이 속한 언어 공동체(linguistic community) 전체의 분업을 통해서 결정된다고 하며 그 점을 아래와 같이 논증했다.1)

미국 동부에는 느릅나무길(Elm Street)과 너도밤나무길(Beech Street)이라는 길 이름이 이곳저곳에 흔한데, 아마 원래는 이런 나무들이 많이 심어져 있어서 그렇게 이름이 붙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오늘날 대도시에 사는 미국 사람들 대부분은 한국의 도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느릅나무와 너도밤나무를 구별할 줄 모른다. 그래도 우리는 ‘느릅나무’와 ‘너도밤나무’라는 말을 서로 의사소통하는 데 아무 불편 없이 잘 사용한다. 비록 각자는 느릅나무와 너도밤나무를 찾아 구별할 줄 모르면서도 이 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서로 이견(異見)이 없다. 나무에 무지한 도시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현상이 어떻게 가능할까?

퍼트넘은 우리 언어 공동체 안에 있는 나무 전문가들의 존재와 그들의 도움으로 이런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본다. 우리가 ‘느릅나무’ 또는 ‘너도밤나무’라는 단어가 지칭하는 나무에 대해 질문 거리가 있으면 그때마다 식물학자에게 물어보아 문제를 해결하면 되기 때문이다. ‘느릅나무’나 ‘너도밤나무’라는 말도 처음에는 이 두 종류의 나무를 구별할 줄 아는 사람에 의해 사용되기 시작해 다른 사람에게도 그 쓰임새가 전달되었다가 결국 이 두 나무를 보지도 못한 사람에게까지 그 단어들이 퍼져 나가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사람에서 사람으로 퍼져 나가는 연결고리가 전문가에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사용하는 말의 정확한 의미나 그 지시 대상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없어도 그 말을 사용하는 데 불편이 없다. 이와 같은 설명은 나무뿐 아니라 우리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다른 모든 단어들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언어 공동체에는 분야마다 전문가가 있어서 우리가 사용하는 말의 정확한 의미와 지시체를 확보해줄 수 있다. 그래서 비전문가가 쓰고 있는 말을 스스로 엄밀히 정의(定義)하지 못하거나 또 그것의 지시 대상을 구별하지 못하더라도 언어 사용에 문제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회에는 언어 노동에 있어서의 분업이 이루어져 있고 그것이 언어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내가 쓰는 말의 의미는 내가 아니라 내가 속한 언어 공동체 안의 전문가 집단의 기여에 의해서 정해진다.

마음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마음이 가진 의식 상태가 어떤 내용을 품고 있는가이다. 선한 생각을 가지면 선한 마음이고 악한 생각을 품으면 악한 마음이 된다. 그래서 심리 상태 또는 의식 상태에 본질이 있다면 그것은 그 상태의 내용(content)이다. 그런데 위에서 살펴본 논의에 의하면 언어를 사용하는 내 의식 상태의 내용이 나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가 속해 있는 언어 공동체에서 내가 다른 사람들과 맺고 있는 어떤 관계를 바탕으로 그 사람들에 의해 결정된다. 그렇다면 내 의식 상태의 내용이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고 따라서 그런 의식 상태의 내용은 진정으로 내 것은 아니라는 말이 된다. 그리고 내 마음이 생각하는 모든 것의 내용이 내 것이 아니라면 내 마음 또한 내 것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것이 내가 마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은 내 것이 아니라는 이유다.

언어 공동체와의 관계에 의해 말의 참 거짓도 바뀐다

또 다른 미국 철학자 타일러 버지(Tyler Burge)는 퍼트넘의 견해와 같은 노선에서 우리가 어떤 단어를 이용해 문장을 만들 때 이 문장이 제대로 쓰여 참인 문장이 되는가의 여부는 이 말이 실제로 어떤 사회 안에서 쓰이고 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고 설명한다.2) 그의 예를 다소 변형해 이야기를 풀어보겠다. 어떤 이가 다리뼈에 염증이 생겼는데 병원에 가서는 arthritis(관절염)에 걸렸다며 의사에게 진료 및 치료를 요구하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그런데 arthritis란 관절에만 생기는 염증이지 관절이 없는 다리뼈에 생기는 질환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의사는 그렇게 설명해줄 것이고, arthritis를 잘못 이해하고서는 ‘다리뼈에 arthritis가 생겼다’고 한 이 환자의 말은 참이라고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런데 남미 어디엔가 외부 세계와 많이 고립된 사회가 있는데 오래전에 이 지역으로 이주한 영어권 사람들이 어쩌다가 ‘arthritis’라는 말이 관절뿐 아니라 뼈에 생기는 염증까지도 포함해 지칭하게 된 경우를 상상해보자. 만약 우리의 환자가 우연히 이곳을 여행하다가 다리뼈에 염증이 생겨 그 지역 의사를 찾아가 arthritis(?)를 치료해달라고 부탁하면 그 의사는 제대로 찾아왔다고 하며 치료에 나설 것이다. 우리 입장에서는 이 환자의 증상은 arthritis가 아니지만, 이 환자가 말하는 ‘다리뼈에 arthritis가 생겼다’라는 동일한 문장이 이 지역에서는 참으로 받아들여진다. 같은 말이라도 쓰이는 사회가 바뀌다 보니 거짓이었던 문장이 참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위의 예는 우리가 속한 사회에 따라 우리가 하는 말의 참 거짓이 다르게 결정되곤 한다는 논지를 전해준다. 퍼트넘식으로 표현하자면, 우리가 소속하게 되는

다른 언어 공동체의 다른 전문가 집단들의 다른 견해에 따라 우리가 하는 말의 참 거짓이 달리 결정된다는 것이 된다. 물론 굳이 전문가 집단을 특정하지 않고서도 다수의 언어 사용자들이 사용하는 방식으로 말의 내용과 그 참 거짓이 정해진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겠다. 이렇게 소속하는 사회에 따라 우리가 하는 말의 내용과 참 거짓이 결정된다는 이야기는 결국 언어로 표현되는 의식 상태의 내용이 자기 안에서 자기 마음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 사용되는 사회와의 전체적인 관계의 맥락에서 정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경우에도 내 의식 상태의 내용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이고, 따라서 내 마음은, 그것이 존재하더라도, 내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언어 노동의 분화가 없더라도 내 마음은 내 것이 아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내 것이 아니라는 진리는 언어 공동체 또는 소속된 사회와 같은 인간 집단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도 여전히 성립한다. 힐러리 퍼트넘의 유명한 쌍둥이 지구(Twin Earth)의 예를 조금 변형해 이 점을 설명해보겠다.

우리 지구상에는 강과 호수를 가득 채우고 있는 무색무취의 투명한 액체가 있다. 사람들은 이 액체를 마시고 갈증을 해소하며 생존해나간다. 한국인들은 그것을 ‘물’이라고 부르며, 과학자들은 물이 H2O의 분자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이미 오래전에 밝혀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치 영화처럼 신종 바이러스가 창궐해 인류가 전멸하고 학교에 다닌 적이 없는 나이 어린 다섯 살짜리 길동이만 살아남았다고 가정해보자. 길동이는 혼자서 먹을 것을 찾고 물을 마시며 겨우겨우 생존해나간다. 그런데 생태계도 바이러스 때문에 점점 피폐해져 길동이는 더 이상 살아남기 어렵게 된다. 이때 우연히 지구를 지나가던 외계인들이 길동이를 가엾게 여겨 길동이를 수만 광년 떨어진 곳에 있는 지구와 완전히 똑같이 생긴 행성(쌍둥이 지구)에 데려다주고 그들은 갈 길을 간다. 길동이는 이제 깨끗한 자연환경에서 새로 먹을 것을 찾아 먹고 마실 물도 마시면서 잘 살아나간다.

그런데 길동이가 전혀 모르고 있지만 이 쌍둥이 지구에는 원래의 지구와 다른 것이 하나 있다. 이 쌍둥이 지구의 강과 호수 등을 채우고 있는 무색무취의 투명한 액체는, 비록 길동이는 ‘물’이라고 중얼거리며 목마를 때마다 마시지만, 실은 그 분자 구조가 H2O가 아니라 XYZ라는 전혀 다른 액체이다. 전에 있던 지구에서나 지금 사는 쌍둥이 지구에서나 길동이는 목마를 때마다 무색무취의 투명한 액체를 마음에 떠올리며 찾아 마시는데, 지구에 있을 때는 목마른 길동이의 의식 상태가 H2O의 분자 구조를 가진 액체와 연결되어 있었지만 쌍둥이 지구에서는 그 의식 상태가 XYZ라는 분자 구조가 전혀 다른 액체와 연결된다. 학교를 다닐 기회가 없던 나이 어린 길동이가 이런 차이를 알 도리가 없다. 또 그 차이를 알려줄 어떤 전문가도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지구에 있을 때 길동이의 마음 상태는 H2O를 지향했었고 이제 쌍둥이 지구에서는 같은 마음으로 XYZ를 지향한다. 이런 차이를 길동이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길동이가 각기 다른 자연환경과 맺는 관계에 의해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가 가진 의식 상태의 내용이 바뀌게 된다.

위의 논의는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가 맺고 있는 환경과의 어떤 형이상학적 관계에 의해 내 심리 상태의 내용이 결정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물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같은 구조의 논의가 적용된다. 이는 위에서 퍼트넘이 지적한 언어 공동체 안의 전문가 집단이나 버지가 말하는 소속 사회조차도 존재하지 않는 경우라도 내 마음의 의식 상태는 그것이 이 우주 삼라만상과 맺는 형이상학적 관계에 의해 그 내용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내 마음의 내용은 내가 아니라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 그래서 내 마음은 내 것이 아니다.

홍창성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 박사. 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 철학과 교수. 형이상학과 심리철학 그리고 불교철학 분야의 논문을 영어 및 한글로 발표해왔고, 유선경 교수와 함께 현응 스님의 저서 『깨달음과 역사』를 영역하기도 했다. 『미네소타주립대학 불교철학 강의』를 출판했고, 유선경 교수와의 공저 『(가제)생명현상과 불교』 출판될 예정이다. 「Buddhism for Thinkers」를 집필 중이며, 불교의 연기(緣起)의 개념으로 동서양 형이상학을 재구성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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