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철학과 불교 이야기|연재를 시작하며__박찬국

대화가 가능한

서양 철학과 불교

박찬국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나는 매 학기 15명의 서울대학교 1학년 학생들과 함께 세미나를 하고 있다. 이 세미나에서 가장 먼저 다루는 주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인간이 무엇인지를 이미 알고 있다.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마주하는 어떤 것은 인간이라고 부르는 반면에, 어떤 것은 개라든가 나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말해보라고 하면 말문이 막히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는 보통 어떤 사물이 갖는 특성을 다른 사물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파악한다. 예를 들어 사과가 갖는 특성을 우리는 다른 과일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파악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학생들에게 인간 이외의 동물들과 인간을 비교하면서 둘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하는 방식으로 인간이 무엇인지를 규명해보자고 제안한다. 여러분은 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어떤 학생들은 이렇게 둘 사이의 차이를 규명하려는 시도 자체부터 부정하려고 한다. 이들은 동물과 인간 사이의 차이를 규명하려고 하는 시도 자체가 인간을 다른 동물보다 우월한 존재로 간주하려는 인간중심주의적인 의도를 포함하고 있다고 본다. 경우에 따라서 어떤 학생은 불쾌감까지 드러내기도 한다. 이들은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본다.

흔히 인간과 동물 사이의 차이로 인간은 생각하는 능력인 이성을 갖고 있고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이 거론된다. 그러나 이 학생들은 동물도 인간 못지않게 생각하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언어도 사용한다고 주장한다. 호랑이가 사슴을 공격하려고 할 때 호랑이는 공격하기에 가장 좋은 때가 언제인지를 나름 생각하며, 동물들도 공동생활을 하면서 소통하기 때문에 나름 언어가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진화론을 끌어들인다. 인간은 어차피 동물에게서 진화했기 때문에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고통의 원인과 고통을 극복하는 길에 대한 불교의 설명은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한 냉정한 관찰과

이러한 관찰에 입각한 이성적인 추론에 입각해 있다.

 

이러한 주장을 접하고 나면, 인간만이 이성과 언어를 갖는다고 보면서 인간과 동물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던 학생들이 뻘쭘하기 마련이다. 불교도 언뜻 보기에는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물에는 불성이 깃들어 있다고 말하기 때문에 인간과 다른 동물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인간과 다른 동물들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이 다른 동물처럼 살 수 없다는 것이 인간의 행복이기도 하지만 불행이기도 하고, 영광이기도 하지만 저주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인간뿐 아니라 다른 동물까지도 사랑하는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지만, 수많은 사람을 자신과 종교나 이념을 달리한다는 이유로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살해할 수 있는 악마적인 존재가 될 수도 있다. 불교 역시 모든 생물에게 불성이 깃들어 있다고 보지만 인간만이 불성을 깨칠 수 있다고 보면서 인간과 다른 동물들 사이의 차이도 인정하고 있다.

나는 인간이 동물에 대해서 갖는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인간은 역사적 존재라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개미든 원숭이든 동물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변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인간의 삶의 방식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한다. 조선 시대가 끝난 것은 100여 년 전밖에 되지 않지만,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과 현대인들의 삶의 방식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오늘날의 우리는 조선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하인이나 천민으로 살면서 온갖 차별을 받았던 것을 이해하기 힘들다.

인간의 삶이 이렇게 시대마다 달라지는 것은 인간은 본능에 따라서 사는 것을 넘어서 시대마다의 세계 이해에 따라서 살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사람들을 규정하는 유교적인 세계 이해는 오늘날의 민주주의적인 세계 이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인류를 가장 오랫동안 지배해온 세계 이해는 신화에 의해서 주어졌다. 인간이 지구상에 나타난 이래로 인간은 몇 만 년에 걸쳐서 숲속에는 숲의 신이나 정령이 있고 산속에는 산의 신이나 정령이 있다고 믿어왔다. 이러한 믿음은 오늘날에도 무속신앙이라는 형태로 남아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은 숲이나 산에 신이나 정령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야훼나 알라와 같은 신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믿으며 이러한 신이 인간 개개인의 삶과 역사를 다스린다고 믿고 있다. 신화적 세계 이해는 과학과 기술의 시대라고 불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는 것이다.

신화는 대대손손 이어져오는 신앙에 의지한다. 모태신앙이라는 말에서 보듯 이러한 신앙은 모태에서부터 주입되어져온다. 그러나 인류의 정신이 성숙해오면서 인류는 신화 대신에 철학에 의해서 세계를 이해하려고 하게 된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선조가 믿어왔던 신들에 의거해 세계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감각과 이성에 의거해 세계를 이해하려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세계가 보이는 다양한 현상들을 냉철하게 관찰하면서 이러한 관찰에 입각해 세계의 근원과 구조를 파악하려고 한다.

서양 철학은 만물의 근원을 물에서 찾은 탈레스에서부터 시작한다. 탈레스의 철학은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유치하고 단순하게 여겨질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신화적인 사고를 넘어서 관찰과 이성에 입각해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의 첫발을 내디뎠다는 점에서 서양사의 획기적인 전환을 마련한 사건이라고 할 수있다. 철학의 탄생과 함께 세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과 새로운 삶의 방식이 시작된 것이다. 오늘날에는 과학적 세계 이해가 지배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지만 이러한 과학적 세계 이해도 철학적 세계 이해를 토대로 해서 발전해온 것이다.

불교는 다른 종교들과는 달리 어떤 특정한 신화적인 이야기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앙을 요구하는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인류가 겪는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을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었다는 데서 찾는다. 이러한 설명은 그리스 신화와 마찬가지로 신화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불교는 고통의 원인을 인간의 집착과 탐욕에서 찾는다. 불교는 고통을 극복하는 길도 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앙에서 찾지 않고 집착과 탐욕을 버리는 수행에서 찾는다. 고통의 원인과 고통을 극복하는 길에 대한 불교의 설명은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한 냉정한 관찰과 이러한 관찰에 입각한 이성적인 추론에 입각해 있다.

특정한 신화적 이야기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을 요구하는 종교들 사이의 대화는 지극히 어렵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고조차도 볼 수 있다. 신을 ‘야훼’라고만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인들과 ‘알라’라고만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슬람교인들 사이의 대화는 불가능하다. 이들 사이에는 서로를 이단이라고 단죄하는 것만이 가능하다.

그러나 서양 철학과 불교는 냉정한 관찰과 이성적인 추론에 의거하려 하기 때문에 서로 대화가 가능하다. 이렇게 서로 대화하는 가운데 서로 배울 것이 있을 것이다. 이 연재에서는 불교를 염두에 두면서 탈레스에서부터 들뢰즈에 이르는 서양 철학의 역사를 살펴볼 것이다. 화로 옆에서 정담을 나누는 식으로 가능하면 재미있고 쉽게 서술해보려고 한다. 그래서 ‘서양 철학과 불교 이야기’로 제목을 붙여보았다.

박찬국 서울대학교 철학과 졸업 및 동 대학원 철학 석사, 독일 뷔르츠부르크대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호서대 철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 철학과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 『니체와 불교』, 『원효와 하이데거의 비교 연구』, 『인간과 행복에 대한 철학적 성찰 : 실존철학의 재조명을 통하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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