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으로 이해하는 붓다의가르침 16 | 마음은 없다__홍창성

마음은 없다1)
홍창성
미네소타주립대학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삼라만상 모든 현상은 마음이라는 바다에서 일어나는 물결이다, 마음은 사물처럼 볼 수도 잡을 수도 없지만 실은 가지각색의 사물들을 바라보고 있는 그것이 바로 마음이다, 마음공부를 게을리하지 말아라, (…) 이들은 모두 한국 불교계에서 하루에도 여러 차례씩 듣는 귀에 익숙한 소리들이다. 현재 모든 불교 사회 가운데 한국만큼 마음공부를 강조하는 곳도 없다. 마치 마음 하나만 제대로 다룰 수 있으면 누구나 이르고자 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처럼.그리고 이러한 마음공부를 위해서는 책을 읽으며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되고 오로지 앉아서 호흡 조절하면서 명상하고 참선해야 한다는 점이 특히 중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마음공부는 문자(文字)를 쓰는 나 같은 심리철학 교수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경지라는 소리를 귀가 따갑게 들어왔다. 그럼에도 내가 보기에는 불자들이 마음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최소한 마음의 존재론적 성격과 그 본질에 대해서는 좀 알고 해야
할 것 같아 아무래도 몇 마디 해야겠다.

근본적으로 물리적인 이 우주 어디에 마음이 존재할까?
나는 먼저 2,500년 전 석가모니 시대의 세계관이 아니라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의 세계관으로 마음의 존재와 그 본질을 규명해보자고 제안한다. 오늘날 자연과학에서 물리학이 가장 앞선 분야라는 데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없다. 물리학은 물질의 가장 미시 차원으로부터 가장 거시 차원의 속성들을 모두 연구하는 것을 임무로 하고 있고, 수학이라는 강력한 도구를 십분 활용해 다른 어떤 연구 분야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앞선 결과들을 산출해왔다. 그런데 우리 시대 최고의 지성인 물리학자들의 연구 및 관찰 결과에 의하면 이 우주 어느 구석에도 한국 불교계가 늘 입에 달고 사는 마음을 발견했다는 보고는 없다. 왜 그럴까. 1)  이 원고는 2년 전 필자의 페이스북과 불광미디어의 인터넷 사이트에 발표하고 독자들로부터 코멘트 받은 에세이를 토 대로 수정 보완하고 내용을 추가해 완성했다. 당시 코멘트를 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붓다는 인간 존재가 오온(五蘊)으로, 즉 물질과 네 종류의 심리 상태로 되어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 광대하고 복잡한 물리계는 그냥 하나의 범주에 넣어버릴 수 있지만 마음속 심리 상태는 네 가지 종류로 나누어야 할 만큼 다양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심리 상태들이 물질과는 분류를 달리해야 할 정도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존재 한다고 본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존재 세계가 한 가지 종류로 되어 있다고 본 일원론자(一元論者, monist)가 아니라 이원론자(二元論者, dualist)였다. 그런데 우리 한번 생각해보자. 물질적 토대 없이도 심리 상태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뇌가 없는데도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또 감각을 가질 수 있을까? 붓다는 심리 상태들이 몸에 의존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 같이 말했고, 또 불교 역사상 유식학에서는 의식 상태의 존재만 인정할 뿐 물리 세계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사실은 잠시 옆으로 제쳐두고,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의 앞선 입장에서 이 문제를 상식적으로 고려해보자. 근본적으로 물질로 되어 있는 이 세계에 정말 아무런 물질적 토대 없이도 의식과 심리 상태들이 존재할 수 있을까?

마음이 본질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라고 본 데카르트
서양에서는 수천 년 동안 마음(mind)을 물리 세계에 종속되지 않는 영원불변하고 불멸이라는 영혼(soul)과 동일시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17세기의 데카르트다. 그에 의하면 마음과 체(body)는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實體, substance)로서 본질은 서로 상반된다. 연기와 공(空)을 바탕으로 하는 불교에서는 실체와 본질의 존재를 부정(否定)하는데, 그렇게 부정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도 먼저 실체와 본질을 철학적으로 정의(定義)하고 설명해보아야 하겠다.

실체 =  (정의) 독립적 존재(independent existence). 스스로의 존재를 위해 다른 아무것
도 필요하지 않은 것.

예를 들어 서양인들은 내 앞에 있는 물체인 책상은 그 스스로 존재할 뿐, 그 존재를 위해 다른 아무것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독립적 존재인 실체라고 생각한다. 돌, 집, 물 등 모든 물체 또는 물질적 대상은 실체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 책상의 그림자는 이 책상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실체가 아니다. 얼굴의 미 소, 책상의 표면도 얼굴과 책상 없이는 존재하지 못하므로 실체가 아니다.2)그런데 데카르트에 의하면 마음 또한 우리 몸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이다. 뇌가 없어도 마음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영원불변불멸하다는 영혼의 존재를 믿어본 적이 없는 동아시아인들에게는 생소한 소리인데, 영혼불멸설을 기본으로 하는 기독교 전통에서 수천 년을 산 서양인들에게는 그것이 상식으로 통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마음과 물체가 두 실체라고 보았다.3)데카르트에 의하면 마음과 물체의 본질은 서로 정반대이다. 여기서 본질이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
본질 =  (정의) 어떤 것이 이것 없이는 그 스스로일 수 없는 그것(that without which
something is not itself)
말하자면 어떤 것의 본질은 그것을 그것이게끔 해주는 필요불가결한 속성이다. 물을 물이게끔 해주는 속성은 그 분자 구조인 H2O이기 때문에 H2O의 분자 구조를 갖는다는 점이 어떤 것을 물이게끔 해주는 본질이다. 금의 본질은 원자 번호 79인 원소라는 점이고, 또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삼각형의 본질은 세 변으로 이루어진 닫힌 2)  한국 불교계에서는 독립적 존재로서의 실체(實體)와 ‘실제로 존재한다’는 의미의 실재(實在)를 혼동하는 경우를 여러 번 보았다. 미소, 표면, 왈츠 등은 보기에 따라 실제로 존재하는 실재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이들을 독립적 존재 라는 의미의 실체로 보아서는 안 된다. 3)  물론 신(神)만이 엄밀한 의미에서 유일한 독립적 존재이고 마음과 물체는 그 지속적 존재를 신이 넣어준 힘 (concurrence)에 의존한다는 면에서 단지 파생적 의미에서의 실체에 불과하다. 그러나 철학에서는 통상 이 점을 무시하고 논의를 진행한다. 다각형이라는 점이다.4)데카르트에 의하면 물체의 본질은 외연(外延, extension, 공간적 부피)이고 마음의 본질은 사고(思考, thinking)이다. 공간적 부피를 가지지 않으면 물질적 존재자가 아니고, 또 생각하지 않는다면 마음이 아니다. 먼저 물리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살펴보자. 물질적인 것으로서 공간적 부피를 가지지 않은 것이 단 하나라도 있는가? 없다. 반대로, 공간적 부피를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물질적이지 않은 것이 단 하나라도 있는가? 없다. 그리고 모든 물체는 공간적 부피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쪼갤 수 있다는점도 논리적으로 도출된다 : 모든 물체는 원칙적으로 나눌 수 있다(divisible). 만약 물리적으로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궁극의 입자가 발견된다고 해도 그것은 최소한 수학적으로는 나눌 수 있다. 한편 마음의 본질은 생각함이다. 어떤 주어진 존재자가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음이 아니다. 그런데 데카르트가 말하는 생각함이란 논리적 사고와 같은 고차원의 인지 기능만을 지칭하지 않고 마음의 모든 작용을 포함한다. 그는 감각 작용, 감정, 의지, 기억 등과 같은 마음의 모든 작용을 생각함(thinking)이라고 불렀다.5) 그런데 데카르트는 마음이 결코 공간적으로 나누어질 수 없다고 보았는데, 이는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이 ‘한글을 발명한 분은 세종대왕이시다’라고 생각할 때 이 생각을 공간적으로 (예를 들어 반으로) 나눈다는 것은 전혀 의미가 통하지 않는 이야기다. 또 올해 한국의 경제 성장률이 미국 경제 성장률 예상치보다 높았으면 좋겠다고 희망한다면 그 희망을 어떻게 공간적으로 나눌 수 있겠는가. 통증이나 간지러움이라는 감각, 그리고 사랑한다는 마음, 우울하다는 느낌, 질투 등의 감정도공간적으로 쪼갤 수 없다. 여기서 데카르트 철학의 중대한 결론 하나가 도출된다 : 공4)  이러한 본질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2,400년 전 플라톤 이래 서양 철학을 관통하고 있는 전통으로서, 만물이 연기(緣起) 하기 때문에 본질이 없이 공(空)하다는 불교의 가르침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5)  데카르트가 마음이 실체로서 존재하면서 필연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본 것인지 아니면 생각함이라는 본질 그 자체가 마음이라는 실체도 되는 것이라고 본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간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쪼갤 수 있기 때문에, 만약 원칙적으로도 나눌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공간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결코 쪼개질 수 없는 우리의
마음은 공간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짓게 된다. 데카르트는 마음과 물체의 본질이 각각 다를 뿐만 아니라 그 본질이 서로 필연적으로 정반대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마음은 생각하지만 결코 외연이 없고 (다시 말해 공간적 부피가 없어서 공간 속에 존재하지 않고), 반면에 물체는 외연은 있지만 결 코 생각하지는 않는다.6) 그런데 마음을 이렇게 물체와는 정반대의 본질을 가지고 물질적 바탕 없이도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데카르트는 결국 철학적으로 넘지 못할 벽에 부딪히게 된다.

데카르트의 마음은 이 세계의 아무것도 바꾸거나 변화시킬 수 없다

나는 한국 불교계 일부에서 무비판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마음이라는 것이 실은 데카르트의 마음과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마음이야말로 나를 진정한 나이게끔 해주는 바로 그것이라고 보는 입장인데, 데카르트도 나를 ‘생각하는 존재자(thinkingthing)’로서 이해하며 나란 다름 아닌 나의 마음이라고 주장했다. 참마음이 나를 참나이게끔 해주며, 이 참마음은 나의 물질적 바탕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다시 말해 이 몸뚱이와 그 속의 축축한 뇌와는 아무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이렇게 공간 속에 존재하는 물체로부터 분리되어 스스로 그 정반대의 본질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마음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이토록 근본적으로물리적인 세계에는 한 발자국도 들어올 수 없다는 난제에 직면하게 되고 만다. 데카르트 생존 당시 이미 보헤미아의 엘리자베스 공주는 서신으로 데카르트에게 마음과 물체의 본질이 그토록 정반대라면 어떻게 인과적인 상호작용이 가능하냐 6)  데카르트는 컴퓨터나 뇌와 같이 공간 속에 존재하는 물체는 사고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오직 마음(그는 영혼 과 마음을 동일시했다)이나 천사 그리고 신(神)과 같이 순수하게 영적(靈的)인 존재자만 사고가 가능하다고 볼 것이다.

외연이 없는 실체로서의 마음 또는 참마음으로는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가 보여준 인간의 지성과 의지가 자연에 성공적으로 개입해온 현상을 전혀 설명해주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실체로서의 마음 또는 참마음이 우리의 근본적으로 물리적인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어야 한다. 마음은 없다.

는 질문을 던진다. 마음은 생각함이 본질이지만 공간 속에 존재하지 않는데, 생각하지는 못하지만 공간 속에 존재하는 물체를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고 변화시킬 수 있느냐는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예를 들어 내 마음이 오른손을 들기를 원한다고 해도 공간 속에 없는 마음이 어떻게 공간 속으로 들어와 오른손이 올라가게 만들 수 있는가? 또 그 반대의 경우도 문제가 된다. 내 손에 큰 상처가 나서 무척 아플 때도 공간속에 있는 내 몸의 변화가 어떻게 공간 속에 존재하지 않는 마음에 전달될 수 있는가? 데카르트도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이런저런 논증을 통해 해결하려고 했지만 어느 시도도 신통치 못했고, 결국 그가 이 문제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했다고 스스로 시인했다. 그리고 그 이후 지금까지 데카르트의 견해를 따르는 그 어느 학자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우리는 몸을 움직이며 우리의 의지를 주변 환경에 투사해 환경에 적응하고 자연을 변화시켜 우리 삶에 더 잘 맞도록 바꾸어왔다. 이런 과정이 우리가 삶과 세계에 임하는 모습이라고 이해하고 있고, 인류는 이런 면에서 대단히 큰 성공을 거두어왔다. 그런데 본질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인 데카르트식의 영혼으로서의 마음과 한국 불교계 일부에서 말하는 신비한 아트만과 같은 참마음은 그 속성상 공간 속에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에 결코 공간 속에 존재하는 이 물리 세계에 들어올수조차 없다. 따라서 외연이 없는 실체로서의 마음 또는 참마음으로는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가 보여준 인간의 지성과 의지가 자연에 성공적으로 개입해온 현상을 전혀 설명해주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실체로서의 마음 또는 참마음이 우리의 근본적으로 물리적인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어야 한다. 마음은 없다. 현대 영미(英美)권의 심리철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드라마틱한 질문으로 위의 요점을 부각시킨다 : ‘존재 세계에서 마음을 모두 제거한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물리적인 이 자연 세계에 어떤 변화가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철학자들은 ‘아무 변화도 없을 것이다’라고 답한다. 지금까지 뇌의 작용을 비롯한 모든 물리현상은 공간 속에 들어오지도 못하는 실체로서의 마음의 작용과는 독립적으로 진행되어왔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에 이 세계는 마음의 존재 여부와는 상관없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흘러갈 것이다. 그래서 데카르트의 마음이나 한국 불교 일각에서 말하는 참마음은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서는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 그 존재 가치가 없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 마음 또는 참마음은 우리 세계에 존재할 이유가 없다. 본고의 주제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지금까지 우리의 논의는 서양 종교에서 전능하다고 말하는 신(神)의 존재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을 간단히 논하겠다. 그들의 신이 있다면 전적으로 정신적이고 영적(靈的)인 존재일 텐데, 그런 완벽한 존재가 모든 면에서 불완전하고 한정된 영역인 물리 세계의 일부로서 존재할 것 같지는 않다. 데카르트의 마음과 같이 신도 공간을 초월해서(?) 공간 밖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데카르트가 직면했던 마음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신도 이 물리 세계의 변화와 움직임에 인과적으로 개입할 수 없다. 공간 속에 존재하지도 않는 신이 공간 속에만 존재하는 이 물리 세계에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이치 때문에 그렇다.결국 서양 종교의 신은 비를 내리거나 천둥 번개를 일으킬 수 없다. 서양인들의 전통적 상식과 일치하는 데카르트의 철학 체계를 따르자면 그렇다.
정말 마음이 없을까?
지금까지 ‘마음은 없다’라고 몇 번 말했지만, 그것은 실은 데카르트가 말하는 대로 본질을 지니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마음이 없다는 뜻이고, 또 한국 불교계 일부에서 말하는 형용할 수 없는 오묘한 본질을 가진 실체로서의 참마음이 없다는 뜻이지, 실체가 아닌 다른 형태로 존재할 수도 있는 심리 상태들의 존재까지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위에서 붓다가 가르친 오온(五蘊)에서 네 가지 심리 상태를 언급했는데, 이 네 종류의 다발들은 실체라기보다는 심리 상태(mental states) 또는 심리 현상(mental phenomena)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게 보이기도 한다. 현대 신경과학이나 생리학 그리고 철학은 실체로서의 마음은 인정하지 않지만 뇌에서 일어나는 이러저러한 물리현상에 존재론적으로 의존하며 생멸하는 의식 또는 심리 상태가 있음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며 그 속성을 연구하고 있다. 말하자면 독립적인 실체로서의 마음은 없다고 해도 현상(現像, phenomenon) 또는 가(假, provisional)로서의 심리 상태 또는 심리 현상의 존재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연기에서 벗어난 본질을 가진 실체로서의 ‘경직된’ 마음은 존재하지 않지만, 물리현상에 의존하며 변화하는 심리 상태 또는 심리 현상으로서의 마음은 실제로 존재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음 글에서 이 주제를 다루기로 한다.
홍창성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 박사. 현 미국 미네소타주립 대학교 철학과 교수. 형이상학과 심리철학 그리고 불교철학 분야의 논문을 영어 및 한글로 발표해왔고, 유선경 교수와 함 께 현응 스님의 저서 『깨달음과 역사』를 영역하기도 했다. 『미네소타주립대학 불교철학 강의』를 출판했고, 유선경 교수와 의 공저 『(가제)생명현상과 불교』가 출판 예정이다. Buddhism for Thinkers 를 집필 중이며, 불교의 연기(緣起)의 개념 으로 동서양 형이상학을 재구성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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