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에서 온 편지__김산들

‘비움’과 ‘채움’,

자연에서 조화로운 삶의

태도를 배우다

 

둘째가 놀이터에서 놀다가 팔뼈가 부러진 일이 있었다. 아이가 힘들어하자 남편은 이런 말로 위로하곤 했다.

“있잖아, 지금 아파서 괴롭고 달아나고 싶고 심지어 왜 나만 그래 하며 화나는 마음도 들 거야.

하지만 가장 좋은 점이 뭔지 아니? 최악이 지나갔다는 거야. 이제 회복될 날만 남았으니 얼마나 기뻐?”

그렇다. 인생은 올라갔다 내려가고 내려갔다가도 올라간다. 아무것도 가질 수 없기에

채워 넣을 수 있고, 채워져 있기에 다시 비워야 하는 그런 계절의 순환과 같은 삶을 우리는 살고 있다.

최악을 찍고 나면 그것보다 못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제 최상을 위해 올라가는 일만 하면 된다

 

“얘들아, 내일은 참나무 집 오는 길에 있는 사과나무에서 사과를 따자. 더 추워 얼어붙기 전에 얼른 따둬야 저장해서 겨울에도 먹을 수 있지!”

그러면 그다음 날 아이들은 학교에서 오자마자 고사리손으로 열심히 사과를 딴다. 평소에는 여유를 부리며 뭘 해야 하나 고민하던 아이들이 자연이 주는 일에는 참 적극적이다. 우리 가족은 계절이 주는 숙제에 익숙해지면서 이 ‘비움’과 ‘채움’의 삶의 태도 또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계절이 변해 싹이 트고 잎이 자라 무성한 채움이 생기는 봄과 여름을 보내고 나면, 하나씩 하나씩 열매와 잎을 떨어뜨리고 무거운 옷을 벗어버리는 추운 계절을 맞이한다. 계절의 순환은 역시나 비우고, 채우고, 또 비우고, 또 채움이다. 지구의 어느 곳에서도 자연은 항상 비우고 채우는 순환을 한다.

스페인 고산의 자연에서 보아온 비움과 채움의 순환은 삶의 모든 면을 자각하게 한다. 때 되면 우리도 자연에 맞춰 비축하는 일이 생기고, 또 비축한 것을 비워야만 하는 때도 있다.

그런데 이것은 ‘물질’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정신적인 가치관의 어떤 밑거름이 되었다. 어떻게 ‘비움’과 ‘채움’을 잘 받아들이고 적응해야 하는가. 이것이 삶을 지탱해주는 아주 중요한 진리가 되었다.

한번은 스페인 경제 악화로 다들 두려움에 떨며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던 때였다. 그런데 우리보다 외진 곳에 사는 페페 아저씨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이 다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야. 우리의 행복이 누군가의 불행 때문에 생겨난 것일 수도 있고, 우리의 부가 누군가의 희생으로 생겨난 것일 수도 있어. 스페인은 그동안 잘 먹고, 잘살고, 잘 지탱해왔어. 이제는 경제 악화로 어려워졌다고 무너져버리면 안 되지. 그만큼 이 불행도 이치에 맞게 잘 견뎌내고 잘 극복하면 되는 거야. 누군가는 낮은 자리에 있어야 하는 때도 있는 거지.”

국가의 문제를 이렇게 단순하게 표현한 페페 아저씨는 개인의 문제 또한 참 단순하다며 위로하곤 했다. 우리가 항상 행복만을 누릴 수 없는 진실을 말하며 말이다.

우리는 내가 행복하면 세상 다 가진 듯 즐겁다. 그런데 내가 불행하면 왜 나만 불행한가, 좌절하며 괴로워하곤 한다. 그 불행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마치 어떤 겨울나무가 잎을 피우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에너지를 쏟아내는 것처럼 부자연스럽다.

겨울나무는 에너지를 비축하고 다시 도약할 계절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 우리의 불행도 새로운 행복을 위해 비축하는 준비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내가 가진 것이 있으면 그것도 하나씩 비울 수 있어야 하고, 비워진 것이 있다면 가치 있게 채워 넣을 수도 있어야 한다.

겨우내 장작 난로에 불을 피우다 보면 난로에 재가 쌓이고, 연통에 그을음이 가득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재와 그을음을 제거해줘야만 한다. 만약 재를 치우지 않으면 불이 잘 붙지 않고, 연통의 그을음을 치우지 않으면 화재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 그래서 반드시 불을 붙이기 위해서는 난로를 잘 비워야만 한다. 또한 이 비운 공간에 잘 채워 넣어야만 불이 잘 붙는다. 무조건 장작을 채워 넣는다고 불이 붙는 건 아니다. 화력이 좋은 불쏘시개를 넣고, 바람과 햇살에 잘 마른 장작을 넣어야만 불이 잘 붙는다. 즉 잘 준비된 것을 채워야만 원하던 목적을 이룰 수 있다.

비울 때도 마찬가지로 그냥 버리면 안 된다. 잘 버려야 한다. 우리는 물건을 비울 때 흔히 체념이라도 한 듯, 마지못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버리고 비울 때는 지혜도 필요하다. 당장 따뜻하자고 재의 불씨를 식히지 않고 버린다면 큰 화재가 일어날 수도 있다. 또 바람 부는 곳을 향해 재를 버린다면 온통 재투성이가 되기 일쑤다. 그렇듯 우리가 지혜를 모아 비우지 않는다면 다시 그 고뇌는 나에게로 되돌아오곤 한다.

항상 비우고 채우는 그 과정을 깬 눈으로 진실하게 적응해간다면 ‘행복’과 ‘불행’의 그 경계도 희미해지지 않을까 싶다. 결국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나의 불행도 불행이 아닌 삶의 한 준비 과정으로 바뀔 테니 말이다.

자연의 섭리처럼 우리 가족도 올해 월동준비에 들어갔다. 텃밭에서 수확한 채소를 말리고, 병조림해서 겨울 반찬도 만들었다. 수확한 가을 버섯은 조리해 냉동실에 얼리거나 말려 보관했고, 장작은 수시로 자르고 말려 창고에 가득히 쌓아두었다. 물론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 크게 준비할 필요는 없다. 그저 폭설이나 폭우에 대비한 간단한 월동준비다. 하지만 마음은 든든해지는 겨울이 된다. 채우고 비우는 과정을 자연에 맞추다 보니 우리도 그 이치대로 생활하게 되는 요령이다.

다가오는 이 겨울도 지난겨울처럼 또 조금은 나를 낮추고 움츠리고 내 안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겨우내 옷을 벗은 저 앙상한 나무가 지금은 볼품없고 불안해 보이고, 없어 보이지만 누가 아는가. 저 나무가 풍성한 잎을 달고 찌는 더위에 지친 누군가에게 얼마나 풍성한 존재로 다가오는지를….

 

김산들 스페인에서 언어와 도자기를 공부했다. 스페인 관련 블로그(www.spainmusa.com)를 운영하면서 여러 방송 매체에 스페인 정보를 제공, KBS 다큐 <공감>, <인간극장>, EBS 세계견문록 <스페인 맛에 빠지다> 등에 출연했다. 현재 해발 1,200m 스페인 고산평야에서 친자연적인 삶을 살면서 한국과 스페인의 일상과 문화를 글로 소개하고 있다. 저서로 자연 친화적이고 생태적인 삶을 다룬 『우리 가족, 숲에서 살기로 했습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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