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으로 이해하는 붓다의 가르침 15|무아(無我) (3)__홍창성

무아(無我) 3

홍창성

미네소타주립대학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지난 호에서 우리는 참나 또는 자아(self)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부분도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떤 단순한(simple) 존재자여야 한다는 점을 논의했다. 부분이 있다면 원칙적으로 부분들로 분리될 수 있기 때문에, 불변 불멸해서 영원하다는 참나 또는 아트만의 자격 조건을 충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단순체(simple)가 존재한다는 증거도 또 존재해야 할 필요도 없음을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참나 또는 자아가 색수상행식이라는 부분들이 모여 이루는 집합체(composite) 또는 전체로부터 새로이 창발되는(emerge) 어떤 존재자라는 주장을 검토해보겠다. 수만 개의 부품이 모여 만들어지는 자동차는 어느 부품도 가지지 못하는 새로운 속성과 기능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자동차를 단지 부품의 모임으로만 보지 않고 부품들의 집합을 넘어(over and above) 존재하는 새로운 대상으로 생각한다. 의자, 책상, 집, 비행기, 도시 등도 부분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전체로서 새로이 창발된 존재자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견해를 우리 스스로에게 적용해보면, 색수상행식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새로이 창발되는 인격체(person)가 존재하고, 그것은 나름대로의 고유한 본성(intrinsic nature, 自性)을 가진 참된 나(참나)라는 생각이 들 만도 하다. 그래서 오온다발 전체로서의 나는 실재한다고 느끼게 되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철학적으로 면밀히 검토해보면 이러한 견해가 결코 유지될 수 없음이 드러난다. 그 이유들을 살펴보겠다.

허구(fiction)로서의 전체(whole)

불교에서는 부분들(parts)이 실재(實在)하더라도 그것들이 모인 전체(whole)는 실재가 아니라 허구라는 논증이 여러 문헌에 나타난다. 예를 들어 『밀린다왕문경』에서 나가세나 존자는 전차(chariot)라는 전체(whole)는 실재하지 않는 허구에 불과하다는 점을 논증한다.1) 우리도 생활에서 접하는 사물을 통해 동일한 이치를 볼 수 있다. 앞에 놓인 책상이 20kg 나간다고 해보자. 우리 일상의 상식으로는 (전체로서의) 책상이 실재하며, 그것의 무게는 20kg이다. 그런데 책상 다리와 서랍 그리고 책상 윗부분등, 이 책상의 부분들을 모두 합쳐도 무게가 20kg이 된다. 실재하는 부분들의 무게가 20kg이고 실재하는 전체로서의 책상도 20kg이니까, 여기 있는 이 물건은 둘 다 합쳐서 40kg이 나가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 20kg에 불과하다. 그래서 둘 가운데 하나는 실재가 아닌 허구이다.

만약 부분들과 전체가 두 다른 존재자가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존재자에 대한 두 기술(description)일 뿐이라면 이 책상이 20kg인 이유가 쉽게 설명된다. 춘원이 60kg이고 이광수가 60kg이라도 춘원 이광수가 120kg의 거구일 이유가 없는데, 그 이유는 춘원과 이광수가 동일 인물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부분들과 전체가 하나의 동일한 존재자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그러나 부분들과 전체 사이에는 그런 동일성(identity)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체는 수적으로 하나(one)지만 부분들은 여럿(many)이기 때문이다. 하나인 것이 여럿인 것과 동일할 수는 없다. 그래서 부분들과 전체가 동일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위에서 지적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성공하지 못한다.

결국 부분들과 전체 둘 가운데 하나는 실재하지 않는 허구라고 보아야 책상이 20kg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을 설명할 수 있다. 부분들과 전체는 개념적으로는 상호의존한다. 개념적으로는 부분 없는 전체는 없고 또 전체 없이 부분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특히 인과관계의 측면에서 보면 부분들은 전체 없이도 각자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데 반해, 전체는 부분들에 의존해서만 생겨날 수 있다. 존재론적으로 전체는 부분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둘 가운데 실제로 존재하는 하나만을 고른다면 우리는 부분들을 고르게 된다. 전체란 부분들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어서 나름대로의 고유한 본성(自性)을 가질 수도 없기 때문에 실제로는 허구(fiction)에 불과하다.

1) 필자는 졸저 『미네소타주립대학 불교철학 강의』의 <제7강 열반은 있지만 열반하는 것은 없다>에서도 관련된 논의를 전개했다. (불광출판사, 2019년)

전체가 실재한다고 보아줄 수 없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전체는 부분들이 모여 행하는 (인과적) 작업 외에 따로 그것만이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는 아무런 (인과적)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상이 가진 모든 기능과 인과적 힘은 그것을 이루고 있는 부분들과 그 부분들 사이의 관계로 남김없이 설명되고 존재론적으로 환원될 수 있다. 자동차의 모든 기능도, 비록 한두 개의 부품의 기능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수많은 모든 부품들과 그것들 사이의 밀접한 관계로 설명되고 환원될 수 있다. 다른 사물에 대해서도 모두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부분들과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넘어서 전체가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는 기능과 인과적 힘은 무엇인가? – 그런 것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아무런 차이나 변화를 따로 만들어낼 수 없는 전체가 그것을 이루고 있는 부분들을 넘어서서 독자적으로 존재한다고 보아줄 이유가 없다.2) 그래서 전체는 실재하지 않는 허구이다.

전체가 허구라는 점을 직관적으로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더 논의해보겠다. 동부전선을 방위하는 국군 제27사단이 국군의날을 맞아 모처럼 퍼레이드를 벌인다고 상상해보자. 1만여 명의 중무장한 군인들과 장갑차, 야포, 탱크, 그리고 사단장을 비롯한 지휘부가 거리를 지나 행진한다. 아이들은 어른들을 따라 나와 구경하며 환호와 갈채를 보낸다. 수많은 인원과 장비가 먼지를 휘날리며 모두 지나간 후 문득 한 아이가 어른에게 묻는다. “씩씩한 군인 아저씨들과 장군 그리고 탱크와 장갑차를 다 보았어요. 그런데 27사단은 어디 있나요?” 이런 질문에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

대학에 재직하다 보면 일 년 내내 캠퍼스 투어를 오는 고등학생들이나 편입 희망자들을 보게 된다. 이들은 본부 건물과 여러 강의동, 도서관, 체육관 등을 구경하고 재학생들 및 교직원들과 대화를 나눈다. 두 시간에 걸친 투어를 마친 후 한 학생이

2) 이 논증은 심리철학에서 잘 알려진 김재권 교수의 배제 논증(the exclusion argument)을 원용했다

안내원에게 묻는다. “지금까지 많은 건물과 학생들 그리고 교직원을 만나보았습니다. 그런데 대학은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이 엉뚱한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옳을까?

위의 두 예는 20세기 중반 영국의 철학자 길버트 라일이 ‘범주 오류(caterory mistake)’라고 부른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27사단은 병사와 장교, 그리고 그들이 운용하는 무기로부터 따로 떨어져 다른 존재론적 범주 안에 속하는 어떤 추상적인 존재자가 아니다. 그 군인들과 무기 모두가 바로 그 27사단이다. 이 점을 오해하면 27사단이 다른 존재의 범주에 속하게 된다고 착각하는 범주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이 점은 대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어떤 추상적인 대학이 따로 다른 범주에 속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소속 학생과 교직원 그리고 건물들 등이 바로 그 대학이다.

색수상행식의 오온으로 구성되어 있는 개인 인격체(person)로서의 나 또한 이 오온을 넘어서서 존재하는 어떤 독립적인 추상적 존재자가 아니다. 나는 오온이 속하는 범주가 아닌 다른 존재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위에서 지적한 범주 오류를 범하게 되고 만다. 개인 인격체 또는 나는 색수상행식이 존재하는 범주를 넘어설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기껏해야 색수상행식 전체를 인격체 또는 나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위에서 이미 전체가 허구라는 점을 검토했다. 색수상행식을 부분으로 하는 전체로서의 나는 허구에 불과할 뿐이다.

이 절(節)에서의 논의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

(1) 색수상행식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진 전체로서의 나는 허구이다.

(2) 전체로서의 나가 하는 모든 일은 실제로는 색수상행식 다섯 부분과 그것들 사이의 관계와 기능으로 환원된다. 전체로서의 나는 색수상행식이 모여 하는 일 외에 아무런 변화나 움직임도 새로 만들어낼 수 없다. 따라서 나는 실재하지 않는다.

(3) 나는 색수상행식과 그것들 사이의 관계와 기능을 초월해 독자적으로 다른 범주에 속해 존재하는 어떤 추상적인 대상이 아니다. 색수상행식과 그것들 사이의 관계와 기능 모두가 바로 나이다. 그런데 이러한 나가 허구임은 (1)(2)에 의해 이미 논의되었다.

결론 : (1), (2), (3)으로부터 나는 허구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쓸모 있는 개념적 허구(useful conceptual fiction)로서의 나

색수상행식 다섯 부분이 모인 전체로서의 나는 허구이지만, 실은 대단히 쓸모 있는 허구이다. 이렇게 ‘전체’라는 개념적 허구가 쓸모가 많다는 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설명될 수 있다.

1. 전체로서의 자동차는 수만 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동차의 모든 것은 이런 부분들과 그들 사이의 관계 및 기능으로 완전히 분석되어 환원될 수 있기 때문에 자동차는 실제로는 개념적인 허구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우리가 일상을 살기 위해서는 ‘자동차’라는 개념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 매일같이 운전하는 자동차를 그것이 허구이기 때문에 ‘네 바퀴와 그것을 연결하는 축들, 운전대, 엔진, 연료 탱크 등이 그러그러하게 연결되어 있는 물체’라는 식으로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자동차뿐만 아니라 부분들로 이루어진 주변의 모든 물체들을 –의자, 책상, 나무, 학교, 숲, 도시, 연필, 컴퓨터, 가방 등- 이렇게 불러야 한다면 우리 사회에서 의사소통이 사실상 불가능해져서 일상생활을 제대로 영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 밖에도 이런 ‘전체’들을 하나의 존재자로 가정하며 사유할 때 편리한 수많은 다른 이유들도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 공장에서는 자동차를 몇 대 생산하고 판매하는 것이 중요하지 볼트와 너트를 몇 개 만드느냐는 별 관심사가 아니다. ‘전체’는 개념적 허구이지만 실제로는 필요불가결해서 우리가 매일같이 사용하는 대단히 유용한 허구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도 색수상행식이라는 다섯 부분과 그것들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 전체여서 궁극적으로는 개념적 허구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의사소통의 편리를 위해 이 사람을 “홍창성”이라고 부른다. 나도 각각 나름대로의 색수상행식 다발들로 이루어진 전체인 다른 사람들을 “박수현”, “나지용”, “Mark Siderits”, “Jay Garfield” 등으로 부른다. 그리고 이들 모두는 각각 자신들의 오온다발 전체를 지칭할 때 “나”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개인 인격체(person)는 고유명사로 지칭되든지 아니면 “나”라는 일인칭 대명사로 지칭되든지 모두 색수상행식이라는 부분들로 만들어진 전체이고, 전체는 쓸모 있는 개념적 허구이다.

2. 개념적 허구가 쓸모가 많은 두 번째 이유를 살펴보자. 사물 가운데는 의자나 책상, 펜이나 컴퓨터같이 그 모양이나 재질 등이 아니라 그것이 수행하는 기능에 의해 존재 이유가 결정되는 것들이 많다.3) 예를 들어 책상은 보통 나무로 만들지만 플라스틱이나 금속, 유리, 심지어는 얼음으로도 만들 수 있다. 모양도 윗면이 네모난 것, 둥근 것, 긴 것, 짧은 것, 평평한 것, 기운 것 등 다양한 모양의 책상이 있다. 책상 다리의 길이나 재질 또한 천차만별이다. 그럼에도 이 모두가 책상인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책상의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 즉 우리는 그 위에서 책과 문방구를 놓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쓸 수 있다. 그 밖에 의자나 펜 그리고 컴퓨터 등에도 동일한 관점이 적용된다. 이 모두는 기본적으로 그것들이 각각 수행하는 기능에 의해 정의되는 것들로서, 이들의 개념은 모두 기능적 개념들(functional concepts)이다.

그런데 이런 기능(function)이란 어떻게 존재하는 것일까? 플라톤의 형상(形相, 이데아)처럼 천상이나 어떤 형이상학적 공간에 존재하다가 지상의 사물에 예화(例化, instantiation)되는 것일까? 그런데 이렇게 우리 세계 밖에 별도로 존재하는 대상을 설정하는 일은 ‘불필요하게 존재자의 수(數)를 늘려서는 안 된다’는 (사유와) 존재의 경제성의 원리에 위배될 것 같다. 그리고 이런 형상들은 연기(緣起)하지도 무상(無常)하지도 않은 존재자들이기 때문에 불교의 존재론 안으로 들어올 여지도 없겠다.

필자는 기능이 형이상학적 대상(entity)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대상

3) 일부 철학자들은 그렇지 않은 사물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붓다의 무아(無我)의 가르침이 영원불변 불멸하게 고정된 실체로서의 아트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속제로서의 동일 인격체의 지속적 존재마저 부정할 이유는 없다. 그래서 붓다의 무아론(無我論) 또한 중도(中道)의 가르침이다

을 편리하게 지칭하는 단지 지시어의 역할만 한다고 보는 편이 존재론적으로 깔끔 해서 좋다고 본다. 우리는 ‘책상’이라는 개념을 그것이 수행하는 기능으로 이해하며, “책상”이라는 단어로 이 기능을 수행하는 온갖 다양한 개개의 물체(책상)를 경우에 따 라 지시할 수 있다. 책상 그 자체(책상의 형상)와 같은 형이상학적 대상은 실재하지 않 지만, “책상”이라는 말로 구체적인 책상을 그때그때 골라내어 지칭할 수 있다. 책상, 의자, 펜, 그리고 컴퓨터 등은 모두 개념적 허구들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우리 일 상생활에서 대단히 쓸모 있는 허구임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철학에서는 이런 단어 들을 보통 ‘편리한 지시어(convenient designator)’ 또는 ‘2차 지시어(2nd-order designator)’ 라고 한다. “나”라는 단어도 일종의 편리한 지시어 또는 2차 지시어로 볼 수 있겠다. 이번 호 에서는 색수상행식이 모인 전체로서의 개인 인격체 ‘나’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 으니까, 여기서는 “나”라는 지시어가 입으로 이 단어를 말하는 오온다발 전체를 지시한다. 색수상행식의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이 “나”라는 일인칭 대명사가 지시하는 대상도 끊임없이 변하는 오온다발이다. 그래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비록 “나”라는 같은 단어가 사용되지만, 그것에 의해 지시되는 대상이 같은 오온다발일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무상한 오온다발을 그때그때마다 지시해주는 편리한 지시어 또는 2차 지시어일 뿐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많은 변화가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라는 동일한 일인칭 대명사를 씀으로써 무상한 오온의 다발이 시간선상에서 인과적으로 (연기관계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할도 동시에 수행한다.

“나”라는 단어는 무상한 오온이 연기하는 과정에서 그때그때마다 이 오온다발을 편리하게 지시하는 역할을 하는 일인칭 대명사다. 이 대명사의 지시체에 해당하는 고정불변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제의 오온다발로서의 나와 오늘의 오온다발로서의 나는 같을 수가 없다(not the same). 그러나 그럼에도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그 지시 대상인 오온다발들이 인과적/연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 완전히 구분되는 것도 아니다(not distinct).

비록 ‘나’라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아서 나는 개념적 허구(conceptual fiction)에 불과하지만, 이것은 참으로 쓸모가 많은 허구이다. 마지막으로 그 이유를 간단히 살펴보겠다.

나의 존재와 관련된 속제(俗諦)와 진제(眞諦)

근본적으로 개인 인격체로서의 나는 무상한 오온다발의 인과적 과정(causal series 또는 연기적 과정)일 뿐이다. 이것이 나의 존재에 관한 궁극적 진리, 즉 진제(the ultimate truth)이다. 우리는 이 진리를 숙지하고 철저히 내면화해야만 깨달음과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 이 궁극적 진리는 깊은 공부와 명상 속에서 음미하고 체득할 수 있는 것이지 평소 분주한 우리 삶 속에서 쉽게 얻을 수는 없겠다. 그런데 일상을 성공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오히려 우리가 시간의 경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인격체(person)로 존재하는 나의 존재를 상정하는 편이 실용적으로 유리하다.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가 동일 인물이 아니라면, 내일 새로 생겨날 다른 사람 좋으라고 굳이 오늘밤 피곤한 내가 이를 닦고 치실을 하며 샤워를 할 특별한 이유가 없겠다. 몇 년 후 졸업장을 받을 다른 사람을 위해 오늘 내가 놀지 않고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할 필요도 없다. 수십 년 후 은퇴할 다른 이를 위해 젊은 내가 왜 저축을 해야 할까. 이 모두는 우리의 삶을 진제의 관점에서 궁극적으로만 바라볼 때 야기되는 문제들이다. 그래서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인격체로 지속하는 나의 존재를 상정하고 받아들이는 우리의 상식적 삶이 실은 우리의 삶을 실용적으로 더 성공적이게 만들어준다. 불교에서는 이렇게 우리의 행위를 성공으로 이끌어주는 진리를 속제(the conventional truth)라고 부른다.

깨달음과 열반으로 이끌어주는 진제의 관점에서는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필자는 우리 일상의 삶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주는 속제의 측면에서 보면 우리가 한 평생 80여 년 동안 동일한 인격체로서 지속하는 나가 존재한다고 받아들이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필자는 붓다의 무아(無我)의 가르침이 영원불변 불멸하게 고정된 실체로서의 아트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여주지만 (상주론常住論 배격), 그렇다고 해서 속제로서의 동일 인격체의 지속적 존재마저 부정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단멸론斷滅論 배격). 그래서 붓다의 무아론(無我論) 또한 중도(中道)의 가르침이라고 본다.

홍창성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 박사. 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철학과 교수. 형이상학과 심리철학 그리고 불교철학 분야의 논문을 영어 및 한글로 발표해왔고, 유선경 교수와 함께 현응 스님의 저서 『깨달음과 역사』를 영역하기도 했다. 『미네소타주립대학 불교철학 강의』를 출판했고, 유선경 교수와의 공저 『(가제)생명현상과 불교』가 출판 예정이다. Buddhism for Thinkers를 집필 중이며, 불교의 연기(緣起)의 개념으로 동서양 형이상학을 재구성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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