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불교와 정서 1

불교 정서란 무엇인가
– 연민, 견딤, 그리고 멈춤 또는 비움

여연 스님
한국차문화협회 이사장

 

수행자의 마음을 다스리는 정서들
정서는 “사람의 마음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감정 또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기분이나 분위기”를 가리킨다. ‘불교의 정서’라고 하면 “불교의 수행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감정이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기분 또는 분위기”가 아닐까 한다. 쉽게 말해서 사부대중의 마음에 일어나는 감정이나 기분 또는 분위기이다. 불교의 정서의 주체는 절이나 부처님이 아니라 절에서 수행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비구 비구니 스님들과 우바새 우바이 신도들일 것이며 스님들이 좀 더 중심에 가깝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불교의 중심은 전통적으로 승가이기 때문이다. 이 정서를 학문적으로 접근하면 심리학으로써 설명할 수 있으며 일상적으로 접근하면 수행자의 마음이 아닐까
한다. 불교의 정서를 세 가지로 나누어 이야기하겠다.
가야산 해인총림 금강계단에서 거행되는 수계식은, 지금은 출가자 수가 줄었지만 한창 때는 500명이 넘는 젊은 출가 사문들이 맑고 신선하고 의젓한 자세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겠노라고 약속하는 출발의 자리이다. 속세에서의 이력이나 출가의 이유들은 모두 다르겠으나 출가해 수행자가 되는 것은 일상의 세속적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 그 잡다한 얽매임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의 시작이다. 출가는 우리의 생존 그 자체에 내재한 존재의 매듭을 투철히 인식해 그것들이 공함을 깨닫고 극복하려는 새로운 출발이다. 그것은 우리들 생존의 밑바닥에 존재하는 무지, 무명으로 끝없이 헤매게 하는 존재의 조건들, 그 갇혀진 세계에서 자아의 망집을 극복하고 열린 세계로 이르고자 하는 눈부신 출발이다. 이런 자유로운 세계에의 길을 실현하려면 세존께서 깨달으신 고귀한 법과 진리에 대한 바른 인식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바른법을 참구해서 실천 수행하는 것이 출가 수행자의 본분인 것이다. 사실 사미승이든 비구승과 비구니승이든 이런 진리의 길을 편력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수행자는 자기의 본질적 자아를 건지는 장인이다. 장인은 한길로 한 사물을 절실하게 다룸으로써 그들의 삶으로 하여금 미래의 역사를 빛나도록 만드는 이이다. 대장장이, 옹기장이, 소리꾼, 환쟁이의 삶이 역사의 숨결로 이어지듯이 수행자의 삶 역시 그런 길을 간다. 그래서 수행자의 길은 고통이 놓여 있는 역사의 발판으로 가는 예언자적 숨결이며 늘 그런 가슴을 안고 산다. 좁게는 자기의 본질적 자아를 건지고 넓게는 인간의 본질적 자아를 건진다. 그 인간에는 차별이 없다. 그가 불교도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수행자는 그들의 자아를 건진다.
그래서 수행자의 정서에는 경계도 차별도 없다. 우리의 모든 절에는 공통점이 있다. 국립공원에 속한 절은 입장료라는 절차가 있지만 누구든지 절에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다. 수행 공간을 제외하고는 자물쇠도 채워져 있지 않은 곳이 절이다. 그것이 절집과 불교의 정서이다.
어느 날 아란과 함께 산책하시던 세존께서 문득 멈추어 조용히 눈을 감은 채 눈물을 주룩 흘리셨다. 깜짝 놀란 아란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아직도 가슴에 서리는 무슨 슬픔의 흔적이 남았습니까?” 세존께서는 말씀하시되 “아란아, 너는 거기 숲속 카드나무 잎새에 어리는 한 물방울이 떨고 있음이 보이지 않느냐? 나는 저런 작은 풀잎, 하찮은 나뭇잎 하나에 어리어 무심히 떨리는 한 방울의 물빛 속에서 전 우주의 떨림, 그 진한 고통을 느낀다. 작은 풀잎 하나에서 개화되는 생명의 씨, 그것들의 흔들림은 우주의 고통이다.” 세존의 깊은 심연에서 피어오르는, 모든 사물에 고여 있는 존재의 넋에 동참한 울음은 생명에 대한 가장 절실한 연민이며 자비이다. 이것이 불교의 정서이다.

 

불교에서 또 하나의 정서는 견딤이다. 인간의 위기는 간난(艱難)과 신고(辛苦)와
결핍을 참지 못하는 데서 온다. 어려움을 받아들이지 않고,
고통을 피해가는 방법만 쉽게 얻어 각자 개인만이 안락해지려 한다.
확대된 에고로 현실만을 살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은 나뭇잎 하나에 어리어 무심히 떨리는 한 방울의 물빛 속에서 전 우주의 떨림, 그 진한 고통을 느낀다. 작은 풀잎 하나에서 개화되는 생명의 씨, 그것들의 흔들림은 우주의
고통이다.” 세존의 깊은 심연에서 피어오르는, 모든 사물에 고여 있는 존재의 넋에 동참한 울음은 생명에 대한 가장 절실한 연민이며 자비이다. 이것이 불교의 정서이다.
이렇게 싱싱하게 무 자체로 울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나와 사물과 그것들이 이루는 세계와 하나가 된다. 그리고 이것이 승가의 수행자들이 출가하면서부터 성불
할 때까지 일관되게 가지는 마음이며 정서이다.

불교에서 또 하나의 정서는 견딤이다. 인간의 위기는 간난(艱難)과 신고(辛苦)와 결핍을 참지 못하는 데서 온다. 어려움을 받아들이지 않고, 고통을 피해가는 방법만 쉽게
얻어 각자 개인만이 안락해지려 한다. 확대된 에고로 현실만을 살려는 데 문제가 있는것이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 인류의 역사 상황이 하나같이 치달리고 있는 문명사의 위
기이기도 하다.

절은 홈 네트워크가 작동되고 인텔리전트 빌딩들이 숲을 이루는 도시와 비교할 때 대단히 불편한 공간이다. 우리가 천 년 고찰이라고 말하는데 그야말로 천 년 동안 가장 기본적인 문명의 변화만을 받아들인 곳이 절이다. 그런 곳에서 수행자들은 큰 불편 없이 산다.

『아함경』에 나오는 두 목동 이야기처럼,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거친 물살이 출렁이는 강을 건너는 일이다. 강의 이쪽이 우리의 삶의 터전을 이루는 현실의 마당이라고 한다
면 강 바깥 저쪽 목초지대는 우리가 건너야 할 미래의 밭이다. 현대의 메마르고 거친 밭에서 강 언덕 저쪽에 펼쳐진 미래의 풍요한 목초지대에 도달하려면, 물살이 넘치고 거
친 돌자갈들이 놓여 있는 현실이라는 강의 장애물을 극복해야 한다. 강을 건널 때 닥치는 수많은 어려움을 견디지 못한다면 강을 건너지 못하고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서두르지도 말 것이고 불편하다고 불평하지도말 것이며 잘되지 않는다고 포기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것이 불교적 견딤의 정서이다.

세 번째 정서는 멈춤 또는 비움인데 차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자 한다. 작은 절의 노스님이 명상에 잠겨 있을 때, 그 시대의 명걸이라고 이름난 학자가 스님을 찾아왔다. 학자는 지식도 지위도 권세도 대단해서인지 마음속에는 오직 자의식만이 넘쳤다. 그는 노스님께서 공부를 많이 했다는 소문을 듣고 노스님과 논쟁해서 무너뜨리면 자신이 더욱 유명해진다는 공명심에 사로잡혀 스님을 찾은 것이다.

스님은 차를 학자에게 대접했다. 평상시에는 나이 어린 사미승으로 하여금 차를 달이게 했는데 그날은 스님이 직접 차를 달였다. 스님은 학자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차가
잔에 가득 찼지만 스님은 멈추지 않고 계속 부었다. 보다 못한 학자가 차가 가득 담겼다고 몇 번을 말하자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자신 속 깊이 뿌리내린 아만과 독선이 가슴 밖으로 넘쳐 너를 버리게 하는 불을 모르고 찻물이 넘치는 것만 보이느냐?”

오늘의 현실은 차가 넘치는 대신, 서구의 산업사회가 몰고 온 갖가지 가치 구조와 흑백논리로 가득 찬 사고방식과 자연을 앗아간 공장 지대의 공해와 인구와 혼란한 논리 구조가 홍수를 이루고 있다. 그것들이 우리의 가슴을 피폐하게 만든다. 오늘날 한국인도 멈춤을 모른다. 백만 원을 손에 쥐면 천만 원이 눈에 아른거리고 천만 원을 쥐면 일억 원이 아른거린다. 그러다 보니 삶은 사라지고 노예의 노동만이 남는다. 피폐한 사상도 건조한 이성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성을 고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이성이 아니라 정서인 것이다.

『러시아 혁명사』를 쓴 베르자예프는 이렇게 말했다. “모스크바 중심가 화려한 식당에서 한 귀족이 그의 가족들과 즐기는 한 끼의 호사스러운 저녁 식사는 그 빌딩의 광장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수많은 노동자를 굶게 한다.” 자연의 질서는 신비하리만큼 고운 질서를 누리고 있다. 반면에 인간이 모여서 문화를 이루고 역사를 만들어가는 삶의 터전은 다른 사물들이 차지한 공간보다 더 많은 빈터를 누리고 살면서도 혼란과 대립으로 점철돼 있다. 인간 사이의 바람직하지 못한 대립의 양상은 개인과 개인의 대립에만 그치지 않고 국가 사이의 대립, 민족이나 인종 사이의 대립, 부자와 빈자 사이의 대립,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대립 등으로 확산되어 인간 역사의 모든 구조 속에 깊게 얽혀 있다. 왜일까? 그저 채우는 데만 미련이 남아 멈춤과 비움을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멈추고 비우면 그것이 타인에게 돌아가는데 그것마저도 아까운 것이다.

잔은 비어 있는 데에 그릇으로서의 생명이 있고, 빈 그릇으로 있을 때라야만 무한한 용기의 가능성이 있다. 가득 차 있는 그릇은 든 것을 비워낼 때 비로소 다른 것을 담을 수 있듯이 우리 안의 심혼도 비워내는 작업을 통해 맑아진다. 그것이야말로 색으로부터 공으로 가는 수행의 길이기도 하다. 어차피 마음은 공이 아니던가?

넘쳐야 할 것은 차가 아니라 봄날의 부드러운 햇살처럼 가을의 풍요로운 바람처럼 차 마시는 마음이 우리의 가난한 마음속에서 너그러운 자비심 되어 넘치게 해야한다. 이것이 차의 길이며 불교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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