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불교와 정서 4

감정에서 해방되는 길
아잔 수메도 스님
명상수행불교 지도자

 

이 찌는 듯한 무더위에 대해서도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법을 수행할 수 있다. 삶을 통제하려 하거나 삶에서 달아나거나 저항하지 않고 수용의 자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수용은 저항과 반대이다. 우리는 문화적으로 저항하도록 길들여져 있다. 마음을 열어 받아들이면 무언가에 장악될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 말살되지 않기 위해서 또는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언가 나를 보호할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피해망상증도 있다. 악에 저항하려는 자세 또는 악마를 죽이고 악의 세력을 깨부수어야 한다는 마음 자세도 있다.

하지만 불교적 마음 자세는 만물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자애(metta)다. 자애가 커지면 결국 모든 조건 지어진 현상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승인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날씨가 이러면 안 돼”라거나 “사태가 이렇게 되는 것을 나는 바라지 않아” 등의 말을 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지 않거나 원치 않는 어떤 것들을 두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사물을 수용하는 자세가 아니다.
자신의 싫어하는 마음에 대해서도 자애로울 수 있다. 자신의 비판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에 절망과 혐오를 느끼는 것은 마음의 또 다른 함정이다. 비판적인 마음에 자애로워라. 저항하는 마음에 자애로운 것은 마음의 자세일 뿐 자신의 입장은 아니다.

그렇다 해서 모든 것을 자애로 품으라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해도 긍정적 감정을 가질 수 없는 대상이나 사람이 누구에게나 있다. 그 이름만 들어도 분노가 치밀어 “당신이 행복하기를!”이라는 구절을 억지로 말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모든 이가 행복하기를 빌면서도 마음속은 분노와 원한이 용암처럼 끓어오를 수도 있다.

이상주의, 즉 영원한 사랑, 모든 존재에 대한 사랑 등을 인간은 생각할 수 있다. 조건없는 사랑도 하나의 이상이다. 지성을 활용해 최고의 이상을 만들어낼 수 있고, 우리는 그 이상에 영감을 받는다. 그렇게 고양되어 온 우주에 자애를 내보내는 수행을 한 후에 누군가가 갑자기 문을 쾅 닫으면 화가 나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제 혼란이 온다. 분노는 이상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이상과 실제 감정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다.

언젠가 교육을 많이 받은 한 여성이 매우 감정적인 상태가 되어 나를 찾아왔다. 울음을 터뜨리며 그녀는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바보 같고 어리석다는 것 알아요.” 그녀는 계속 울면서 말했다. “이게 말도 안 되는데 저도 어쩔 수가 없네요.” 그녀의 지성은 이 상황을 승인하지 않으며 “울면 안 돼, 이렇게 울며 나약해지면 안 돼. 넌 통제를 잃고 있잖아. 이건 수치야”라는 강경 노선을 취하고 있었다. 사람의 지성은 매우 폭력적일 수 있다. “네가 정말 제대로 된 여자라면 이렇게 울고불고하지 않겠지.

감정을 잘 조절했겠지. 그런데 이 스님 앞에 널부러진 네 꼴을 봐.” 이렇게 지성은 사물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한다. 하지만 이상은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 이상에 집착할 때 우리는 이 순간의 삶을 느끼지 못한다. 문제를 겪고 있는 누군가에게 매우 무신경하고 둔감할 수 있는 것도 이상에 집착한 결과이다. 심지어 세심함이라는 이상도 세심함과는 거리가 있다. 서로에게 세심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을 하나의 이상으로 이해할 뿐 실제로는 전혀 세심해지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뒤돌아볼 때 우리는 세심함이란 이런 것이고 이런 느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심함은 감각의 영역이지 이상의 영역이 아니다. 감각 영역에는 최선과 최악, 그리고 그 사이에 청아한 아름다움과 미학에서부터 가장 잔인하고 징그럽고 역겨운 조건까지 온갖 단계가 있다. 반추하는 알아차림 속에서 우리는 판단하지 않고 삶의 실재를 알아차린다. 이상에 따라 이렇게 되어야 하는 삶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알게 된다.

우리가 쌓아온 감정적 습관, 즉 칭찬과 비난, 성공과 실패, 건강과 질병 등에 보이는 우리의 반응을 보면 합리적이지도 이상적이지도 않다. 지성은 합리적이지만 감정은 그렇지 않다. 바닥에 널부러져 엉엉 울 때 그것은 이성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 그래서 이성이 비판하며 말한다. “넌 그러면 안 돼”라고 이상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다.

내 경험을 보면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자신이 감정적으로 미숙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끔찍하게 놀랐다. 서른 살이면 이제 늙었다고 청춘이 다 갔다고 생각했는데 감정적으로 나는 아직 유치했다. 몸은 성인이었고 지성적으로도 발전해 성숙한 척할수는 있었다. 왜 출가했냐고 묻는 친구에게 ‘고통이 많아서’라고 대답했더니 놀라며 말했다. “너는 고통받는 것처럼 보인 적이 없어. 항상 행복해 보였어.” 아마도 행복해 보이는 내 모습은 내가 남에게 보여주는 얼굴, 즉 페르소나였을 것이다.

때맞게 적합한 역할을 연기할 수 있었지만 내 방에 돌아와 조용히 있노라면 나는 성숙하지도 쿨하지도 않았다. 나는 두려웠고, 삶에 실망하고 불안했으며, 미성숙하고 유치한 반응을 보였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내면의 폭군은 말한다. “아, 넌 그저 자라면 돼.” 그래서 나도 자란 것처럼 행동했다. 사람들 앞에서는 짜증을 내지 않았지만 때로 그 짜증은 내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겉으로는 미소 짓고 담배도 피우고 칵테일도 한잔하고 있었지만 내면은 쿨하고 침착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명상은 그 어두운 터널 끝에서 발견한 빛이었다. 진정 성숙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며, 궁극의 깨달음까지 가서 완전한 해방을 맛보게 해주는 길이었다. 그런 것을 두고 무엇하러 어린애 같은 사회에서의 성숙에 만족하고 있겠는가? 사람들은 헛된 것에 마음을 두고 영적 발전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혹여 그런 말을 꺼내면 마치 내가 부적합한 말이라도 한 듯 또는 내가 멍청이란 듯 나를 보았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내 주변 사람들은 단지 외모, 패션, 정치 운동에만 관심이 있었고, 영적 발전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지난 33년을 비구로 사는 동안 나는 이 문제의 뿌리로 다가갈 기회가 있었다. 직관적 알아차림(intuitive awareness), 공성만이 우리의 감정적 습관을 해결할 수 있다. 감정적 반응에서 놓여나는 방법, 유일하게 효과를 확인한 방법은 조건 지어진 영역(conditioned realm)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알아차림은 무사(無死; the deathless)의 문을 열고, 마음을 죽음이 없는 실재로, 담마로 열어준다. 그곳에서 비로소 감정적 습관은 이성에게서 놓여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아잔 수치토가 말했듯 “우리는 그저 타이태닉호의 갑판에서 의자를 이리저리 재배치할 뿐”인 것이다. 조건을 바꾸는 것은 가구를 재배치하는 것과 같다. 방 저쪽에 놓인 소파가 싫증나서 이쪽으로 옮기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의 출구를 보기 시작하면 마음챙김(mindfulness)이 무사로 가는 길임을 알게 된다. 자애는 조건 없는 사랑(unconditioned love)이다. 상황이 아무리 끔찍해도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한다. 네가 아무리 끔찍해져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에 대한 사랑을 파괴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네가 세상에서 가장 미치광이가 되어도 최악의 악인이 되어도 악마가 되어도 나의 조건 없는 사랑을 약화시키지도 오염시키지도 못한다. 조건 없는 사랑은 상대를 좋아하거나 승인하지 않아도 가능하다. 좋아하는 것에도 좋아하지 않는 것에도 우리는 자애를 가질 수 있다. 기독교도가 적을 사랑하듯, 그렇게 적을 좋아하지 않아도 자애를 가질 수 있다. 좋아한다는 것은 상대가 내가 승인하는 일을 할 때에 가능하다. 조건 없는 사랑은 좋아함의 문제가 아니라 미워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고 대신 수용하고 인내심을 갖는 문제다. 그 대상이 분노든 내면의 폭군이든, 미성숙한 감정이든, 어리석고 바보 같은 생각이든 말이다. 조건 없는 사랑 또는 자애는 조건을 만들지 않는다. 다만 현재 실재가 그러함을 알고 모든 조건 또한 무상함을 안다.

 

직관적 알아차림을 내 삶의 흐름에 적용하는 것이 도전일 수도 있지만,
그에 대한 통찰이 늘어갈수록 믿음도 커질 것이다. 자신이 처한
물리적 조건에 좌우되지 않고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하지도 않고
마음은 맑고 흔들림 없는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이를 자신의 수행에 적용해보라. 부정적이고 어두운 것이 의식에 떠오르면 “이것을 받아들인다”고 말하라. 진실로 그것을 수용하고 무엇이 일어나는지 보라. 침묵의 소리로 생각을 잘라버리면, 이제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느낄 수 있다. 날것 그대로의 느낌에 다가가라. 그 느낌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비판단과 인내로 안고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라. 이제 당신은 해결되지 못한 미성숙한 감정을 해방시키고 있다. 그 감정을 조작하고 재배치하고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해방하고 있다. 인간의 업이라는 한계 속에서도 자유와 해방으로 가는 길이 있는 것이다. 때로 삶은 녹록지 않다. 가장 약한 곳을 얻어맞고 속절없이 무너지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의 약점이 무엇인지를 미리 알면 준비할 수 있다. 매일 작은 것부터 수행을 시작해보라. 큰 사건이 터져 진짜 사자들이 어슬렁거릴 때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다 .

감정을 우회한다고 영적 우회자(spiritual bypasser)라는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반대로 자신의 감정을 아주 많이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좋은 면도 있겠지만 감정을 끝없이 말하는 것도 아상이라는 함정에 갇힌 것이다. 감정을 다루는 방법은 우회도 아니고, 감정을 판단하거나 변화시키려 해서도 아니고, 단지 직접 수용하는 것, 감정의 정체를 아는 것이다. 처음에는 감정에 대한 습관적 저항 때문에 어렵다. 그 저항이 어떤 것인지 알아차리기 시작해보라. 감정적 체험을 무시하거나 싫어하는 성향, 불편하고 당황스러우며 편치 않은 느낌, 감정적이 되는 사람들에게서 달아나고 싶은 마음 등등… 이런 직관적 알아차림의 수행 속에서도 당황스러운 자신의 마음에 자애를 가져갈 수 있다. 자신이 감정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 판단하고 감정을 좀 더 잘 아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느끼려고 지나치게 노력할 수 있다.

그러면 꾸민 감정이 된다. 개념에 집착해 억지로 하려 하지 말고 자애를 가지고 감정이 흐르고 드러나도록 놓아두고 지켜보라.
삼보에의 귀의 중 담마에 귀의하는 것은 직관적 알아차림에 귀의하는 것이다. 담마가 이끄는 대로 침묵과 집중 속에서 우리는 쉰다. 저항이 보이면 자애로 감싸 안는다. 오직 조건 지어지지 않은 것(the unconditioned; 절대, 무위)만이 조건 지어진 것(the conditioned; 상대, 유위)을 알 수 있다. 조건 지어진 것은 조건 지어지지 않은 것을 알 수 없다. 조건에 집착하면 조건 지어지지 않은 것, 즉 궁극적 실재를 알 수 없다. 하지만 직관적 알아차림 속에서는 조건 지어진 것을 조건 지어진 것으로 알 수가 있다. 세상을 세상으로, 화를 화로 알며, 비평이나 비난 없이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직접 알 수 있다. 사물은 담마에 따라, 본래 성품에 따라 흐르고 움직일 수 있다. 깨달은 이의 용어를 빌리면 깨달은 사람은 그저 빛의 흐름이다. 그들은 나무 그늘에 앉아 ‘나는 알고 싶지 않아’라고 말하는 영적 우회자가 아니다. 이 직접성, 지성적이 아닌 직관적 알아차림이 있다. 사물을 매우 직접적으로 보고 명료하게 알 수 있다. 그것은 이론적 방법이 아니고 팔리어 사전 정의나 불교 논서에 설해진 방법이 아니다.

마음이 감정에서 해방되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우리는 생기 없는 좀비가 될까?
출가 전에는 나를 보호하는 존재 방식을 발전시켰다. 세상은 매우 경쟁적이라서 살아남기 위한 게임 방식을 배웠다. 그 와중에 자신의 일부를 닫아버리고 둔감하게 된다. 하지만 스님들은 점점 더 민감해지는 길을 간다. 이것은 두려운 일이다. 무적이었던 자신이 그리 터프하지 않음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민감해지는 것이 두렵다. 자신이 더 나약하고 섬세하게 되니까. 전에는 괜찮던 일로 인해 지금은 심히 흔들린다. 아직 기본적 번뇌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점점 열어가는 삶을 살고 있지만 그것을 개인적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귀의처가 없고 단지 승가에서 독려하는 좀 더 고상한 삶의 방식에 익숙해지고 있을 뿐이다.

귀의처가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선하고 윤리적이며 유쾌한 사람들과의 상황에 믿음을 두는 것이 아니라 담마에 믿음을 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직관적 알아차림에의 귀의다. 이 귀의로 나는 어디든 갈 수 있게 된다. 사자굴이나 전장이라도… 그 귀의처는 고상하고 특별한 곳이 아니라 흔들림 없고, 죽음이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점점 더 직관적 알아차림을 인지하고 그를 믿어라. 그를 시험해보고 나날의 삶에서 계속 수행해보라. 가족이나 직장에서 짜증나고 실망스러운 일들이 일어날 때 알아차림을 개발할 수 있다. 눈에 거슬리고 거칠며 이기적인 사람들과 살아야 하는가? 그 상황을 담마를 위해 활용해보라. 직관적 알아차림을 내 삶의 흐름에 적용하는 것이 도전일 수도 있지만, 그에 대한 통찰이 늘어갈수록 믿음도 커질 것이다. 이 원리가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되며 자신감이 커지고 종국에는 부동의 명료성을 경험할 것이다. 자신이 처한 물리적 조건에 좌우되지 않고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하지도 않고 마음은 맑고 흔들림 없는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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