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으로 이해하는 붓다의 가르침 14

무아(無我) 2

홍창성
미네소타주립대학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지난 호의 결론을 다시 검토하자면, 붓다의 무아론은 영원불변 불멸하고 고정된 자아(self, 참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서 우리와 같은 인격체(person)가 궁극적으로는 실재(實在, real)하지는 않는다는 가르침이다. 무아론은 우리가 아트만과 같은 실체로서 실재한다는 상주론(常住論)을 배격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전혀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허무주의나 단멸론(斷滅論)도 배제한다. 무아론은 중도(中道)의 진리다.

붓다는 우리가 동일한 사람으로서 지속적으로 존재하게 해주는 영혼(soul)이나 자아(self)와 같은 어떤 단일한 부분은 없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무아의 진리를 논증한다. 그런데 붓다의 논증을 직접 살펴보기에 앞서 우리가 영혼이나 자아와 같은 존재자의 특성을 검토해보면 의외로 재미있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영혼이나 아트만 또는 참나는 불변하고 불멸하는 무엇이다. 그런데 어떤 존재자이든지 그것이 물리적, 심리적, 또는 개념적으로 여러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것은 영원히 불변하거나 불멸할 수 없다. 왜냐하면 원칙적으로 그 존재자는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부분들로 분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변 불멸하는 것은 복합체(composite)일 수 없고 반드시 아무런 부분도 가지지 않은(impartite) 단순체(simple)여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논리적으로 타당한 통찰이 우리에게 단순체로서의 영혼이나 참나가 가질 수밖에 없는 여러 철학적 문제를 보여준다.

이런 단순체는 아무런 속성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만약 어떤 속성을 갖는다면 그것은 그 속성을 하나의 부분으로 갖는 것이므로 그것이 복합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혼이나 자아와 같은 존재자들은 아무 속성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의 영혼이나 자아를 서로서로 맞바꾸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아무 속성이 없으니 그냥 아무것이나 하나 가지고 있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이것은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곤란한 이야기다.

이런 단순체가 물리적으로 공간을 차지한다면 그 공간을 차지하는 더 작은 공간들을 부분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셈이 되기 때문에 또 복합체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영혼이나 자아는 공간을 가질 수 없고, 따라서 공간 속에 존재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공간 속에 존재하는 우리의 몸을 공간 속에 존재하지도 않는 자아가 이리저리 움직이게 만들 수는 없다. 결국 영혼이나 자아는 우리 몸을 움직일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결론이다.

영혼이나 자아와 같은 단순체는 시간선상에서 지속적으로 영원히 존재한다고들 하는데, 그렇다면 그것의 존재가 시간선상의 무수히 많은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이 되어 그것을 복합체로 간주하도록 만든다. 그렇다면 단순체여야 하는 영혼이나 자아가 시간선상에서 어느 순간(instant)을 넘어 지속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다. 그래서 만약 그런 것들이 존재한다면 그것들은 오직 찰나 동안만 존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런 결론은 영혼이나 자아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와 상충한다.

이와 같이 나는 영혼이나 자아 또는 참나의 존재에 대한 주장이 자기모순적(self-refuting)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렇게 논리적으로 모순인 개념을 바탕으로 한 주장들을 얼마나 진지하게 고려해주어야 할까 망설일 때도 있다. 그러나 붓다가 바라문교의 아트만론에 대해 반박한 논증이 역사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번 호에서는 붓다의 무아를 위한 논증을 소개하고 논의해보겠다.

오온(五蘊)

붓다는 우리 개개인을 오온, 즉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라는 다섯 가지의 다발이 모여 있는 복합체로 보았다. 이 오온의 각각을 간단히 살펴보겠다.

1. 색(色) – 모양을 가진 것, 즉 물질적 또는 물리적인 대상을 말한다. 물리적인 모든 것은 그것이 보이든지 보이지 않든지 공간 속에 존재하고, 공간 속에 존재하는 한 그것은 모양을 갖는다.

2. 수(受) – 쾌락이나 고통의 감각, 또는 이 둘 다 아닌 무덤덤한 감각.

3. 상(想) – 대상의 감각적 속성을 파악하는 심리 상태를 말한다. 하늘의 푸른빛 보기나 꽃향기 맡기, 또는 종소리 듣기와 같은 것들이다.

4. 행(行) – 심신의 활동을 가져오는 심리적인 동력, 예를 들어 탐욕과 분노, 애증, 집중, 시샘 등이다.

5. 식(識) – 심신 상태의 자각 또는 그 자각 자체를 말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명색(名色)’이라는 말은, 모양을 갖는 물질적 대상인 색(色)과 모양이 없어서 이름(名) 불려지기만(named) 하는 심리적 상태 네 종류를 함께 묶어 인간 존재를 지칭한다. 여기서 이 다섯 가지의 다발이 언제나 하나씩 활동하는 것은 아니고, 몇 개씩 서로 모이고 흩어지면서 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모든 현상을 끊임없이 생겨나게 하고 또 소멸되게 만든다. 그 하나하나의 다발 또한 끊임없이 생멸한다.

붓다는 우리 인격체(person)에 이 오온 이외에 영혼이나 아트만과 같이 어떤 추상적이거나 신비적인 것이 추가로 더 존재한다고 말씀한 적이 없다. 붓다는 지극히 경험적이고 논리적인, 즉 과학적인 가르침을 폈다. 그래서 분명 그는 우리가 그 존재를 확인할 길이 없는 어떤 신비적이고 예외적인 대상을 거론하는 것이 상식과 이치에 맞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에 굳이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일부 참나론자들은 붓다가 이 오온 이외에 참나가 추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명시적으로 말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참나의 존재를 부정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곤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영혼이나 참나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내게는 이 주장이 다음과 같은 이유로 궁색하게만 보인다.

붓다는 인간 존재를 오온으로 설명했다. 그가 아트만 또는 참나의 존재를 인정한 적은 없고, 또 그것으로 인간 존재를 설명한 적도 물론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트만이나 참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 너무도 상식적이었기 때문에 붓다가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참나론자들은 붓다가 참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으니, 그는 참나도 존재한다고 보았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는 마치 붓다가 ‘결혼한 총각’이나 ‘둥근 사각형’ 또는 ‘2+5=10’이 불가능하다고 말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가 이 세상에 결혼한 총각과 둥근 사각형이 존재할 수 있고 또 ‘2+5=10’이 참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고 해석하는 것과 같은 억지다. 이런 것들이 불가능하다는 점은 붓다에게도 또 우리에게도 너무도 상식적이기 때문에 특별히 언급될 필요가 없을 뿐이다.

이제 밑에서 참나론자들의 주장을 붓다의 논의를 따라가며 좀 더 철학적인 방식으로 반박해보겠다.

오온의 무상(無常)함과 무아(無我)
무아에 대한 붓다의 몇 가지 논증이 있는데, 우리에게 잘 알려지고 또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논증은 오온 각각이 무상하다는 통찰과 함께 진행된다.

1. 우리의 존재를 구성하는 색수상행식의 오온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무상하다.

2. 자아(참나)나 영혼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영원불변 불멸이다.

3. 그러므로 참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색수상행식 하나하나가 무상하다는 점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자명하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지극히 상식적이기 때문에 붓다가 굳이 논증의 일부로 삼지 않았다고 보는 명제는 ‘우리에게는 오온밖에는 아무것도 없다’이다. 그래서 우리의 존재를 남김없이 구성하고 설명해주는 오온이 모두 무상하다면 영원히 불변 불멸하다는 신비한 영혼이나 아트만 또는 참나가 우리의 존재 안에 들어올 구석이 없다. 이것이 무아의 가르침이다.

붓다가 논증했듯이 우리 인간이 색수상행식으로 구성되어 있고 또 인간의 모든 활동이 색수상행식의 이합집산(離合集散)에 따라 이루어진다면, 우리가 과연 영혼이 나 참나의 존재를 추가로 도입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해 현대 분석철학은 그럴 이유가 없다며 단호히 거절할 것이다. 그 이유는, 가장 먼저, 서양 철학에서 금과옥조로 여기는 소위 ‘오컴의 면도날’로 불리는 ‘사유와 존재의 경제성의 원리’다. 우리가 존재 세계를 설명할 때 존재하는 대상의 종류는 적을수록 좋고, 또 세계를 설명하는 이론은 보다 작은 수의 가정이나 원리를 가질수록 좋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복잡한 이론보다는 단순한 이론을 선호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서양 철학은 영혼이나 아트만과 같이 경험적으로 확인할 길이 없는 알쏭달쏭한 대상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도 존재 세계에 대해 동일한 설명력을 유지하는 붓다의 이론이 더 좋은 이론이라고 판단하게 될 것이다.

붓다의 견해가 영혼이나 아트만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이론보다 선호되어야 하는 철학적으로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존재와 활동을 오온의 이합집산으로 남김없이 설명할 수 있다면, 영혼이나 아트만에 그것이 존재할 이유를 부여할 수가 없다는 통찰이다. 다음의 질문을 통해 이 점을 살펴보자. 오온 외에 영혼이나 참나가 추가로 존재할 경우 존재와 사유의 세계에 특별히 더 나타날 어떤 새로운 변화가 있을까? 그런 것은 없다. 색(色)의 세계를 다루는 우리의 물리학은 이 우주 어느 곳에서도 영혼이나 참나의 존재를 확인한 적이 없고, 또 그런 것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고서도 존재 세계의 움직임을 성공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수상행식의 세계를 다루는 현대 심리학도 영혼이나 참나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고서도 우리 심리 세계를 잘 설명하고 있다. 현대 과학자들에게는 영혼이나 참나가 그들이 연구하는 대상의 세계에 어떠한 작은 변화도 가져올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그런 것의 존재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럴 이유가 없다. 존재하는 것은 이 세상에 어떤 방식으로든지 변화를 가져온다. 그래서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면 존재한다고 보아줄 이유가 없다. 영혼이나 참나가 그런 것이다.

 

오온에 대한 호오(好惡), 오온의 변화, 그리고 무아

니까야에서 전개되고 있는 붓다의 무아에 대한 논증 가운데는 철학적으로 깊이 분석해보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붓다는 ‘나는 오온의 각각에 대해 스스로 그것을 싫어하기도 하고 또 변화시키고자 원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아트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일견(一見) 뜻이 통하지 않아 보이는 난해한 논증이다. 그래서 인도에서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온 중요한 통찰 하나를 살펴보면서 붓다의 가르침을 더 이해해보기로 한다.

손가락은 달을 가리킬 수 있지만 달을 가리키는 그 스스로를 가리킬 수는 없다. 손가락은 스스로로 향할 수 없다. 이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스스로로 향할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를 싫어하거나 비난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스스로에 대해 호오의 감정을 갖는 일도 스스로로 향할 수 있어야 가능한데 그것이 처음부터 원칙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칼은 무를 자를 수 있지만 그 스스로를 자를 수 없다. 칼의 경우에도 칼이 스스로로 향할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를 자를 수 없다. 그리고 스스로로 향할 수 없기 때문에 칼 또한 그 스스로를 싫어하거나 변화시키려고 원할 수 없다. 귀는 소리를 듣지만 소리를 듣는 그 스스로를 들을 수 없고, 코는 냄새를 맡지만 냄새를 맡는 그 스스로를 맡을 수는 없다. 이와 같이 귀와 코, 그리고 그밖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 대해 방금 밝힌 손가락과 칼에 대한 논의가 그대로 적용된다. 이 모든 논의가 아무것도 그 스스로로 향할 수는 없다는 통찰로부터 비롯된다.
영혼이나 아트만 또는 참나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몸과 네 가지 심리 상태를 조종하고 통제하며 또 변화시키는 어떤 사령탑 같은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영혼이나 자아의 중요한 역할이다. 나의 참나는 내 못생긴 몸(色)을 싫어해서 어떻게든 변화시키려 할 수 있다. 참나는 내 몸을 향해 이러저러한 호오(好惡)의 감정을 가지고 또 그것에 변화를 초래하기를 원하며 가끔은 그 변화에 성공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참나는 내 몸을 향해 제대로 설 수 있다. 그런데 위 단락에서 논의했듯이, 아무것도 스스로로 향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 몸은 참나 또는 아트만이 아니라고 결론지어야 한다.

 

우리 인간 존재에는 이 오온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참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붓다는 우리 몸뿐만 아니라 네 종류의 심리 상태, 즉 수상행식(受想行識) 하나하나에 대해서도 동일한 논의를 전개한다. 우리의 심리 상태 그 어느 것도 아트만이 싫어하고 변화시키기를 원할 수 있기 때문에, 즉 아트만이 제대로 향해 설 수 있기 때문에, 이 가운데 아무것도 아트만이 될 수 없다. 결국 색수상행식 오온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아트만이 아니다. 그런데 위에서 이미 논의했듯이, 우리 인간 존재에는 이 오온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영혼이나 아트만 또는) 참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붓다가 그의 무아의 가르침을 위해 제시한 두 번째 논증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논증이지만, 참으로 이치에 맞는 탁월한 가르침이다.

우리는 스스로로 향할 수 없다. 내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는 것은 내가 나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내 눈과 의식이 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향하는 것일 뿐이다. 아무것도 스스로로 향할 수조차 없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서는 좋다거나 싫다고, 또는 고칠 것이 많다거나 적다고 생각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일상에서 스스로를 사랑한다거나 미워한다는 식으로 느끼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는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일부가 다른 일부를 사랑한다거나 미워하는 것일 뿐이다. 예를 들어 ‘나는 내가 싫어!’라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는 ‘수상식(受想識)이 모여 색(色)을 향해 하는 말(예를 들어, 자기 몸이 못생겼다고 여기는 경우)’일 수도 있고 또 ‘행식(行識)이 색(色)과 수상식(受想識)의 모임에 대해 하는 말(몸에 병이 생겨 통증으로 고통받는 경우 등)’일 수도 있겠다. 우리는 해외 토픽에서 어떤 의사가 비상 상황에서 마취 없이 스스로를 수술했다는 기사를 가끔 읽는데, 이것은 의사를 구성하고 있는 다른 부분들이 의사의 몸 한 부분, 예를 들어 맹장 같은 곳을 수술했다는 말일 뿐이다.

그런데 위와 같이 설득력 있고 철학적으로 거부하기 어려운 통찰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제어하고 조종해주는 사령탑으로서의 영혼이나 아트만과 같이 어떤 고정되고 독립적인 실체의 존재에 대한 집착을 끊기가 어려운 것 같다. 언제나 변함없이 심신에 명령을 내리고 실행하게 하는 고정된 주체로서의 참나에 대한 애착이야말로 모든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해탈하고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중대한 장애가 아닐 수 없겠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영혼이나 참나에 대한 집착만큼 강렬한 탐심(貪心)이 또 있을까? 그래서 내가 좋아하고 즐겨 쓰는 예를 한 번 더 들어가며 이 문제를 다시금 비판적으로 고찰해보겠다.

해인사 승가대학에 ‘가야산 호랑이’라는 농구 팀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팀 다섯 명 선수의 법명은 무애, 보일, 진휴, 법장, 그리고 토불이다. 이 팀은 어느 한 스님께서 고정적으로 다른 선수들을 이끌며 경기에 임하지 않고 경우에 따라 그때그때마다 다른 스님이 주장을 맡는다. 어제는 무애 스님이 주장이셨지만 오늘은 보일 스님이 팀을 이끌고 계시며, 내일과 모레는 진휴 스님과 법장 스님이 각각 주장을 맡으신다. 간혹 한 경기 중에도 여러 번 주장이 바뀌기도 한다. 한편 토불 스님은 보일, 진휴, 법장 스님이 주장이 되실 때마다 언제나 함께 주장의 역할을 보조한다. 때로는 두세 분의 스님이 함께 주장이 되어 팀을 이끌기도 한다. 그래서 이 ‘가야산 호랑이’ 농구 팀에는 언제나 주장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상 변치 않고 고정된 특정 스님이 주장인 것은 아니다.

위에서 다섯 분의 스님은 물론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을 비유적으로 지칭하고, ‘가야산 호랑이’는 이런 오온이 모여 이루어진 우리 개인 인격체(person)에 대한 비유이다. 우리에게는 그때그때마다 심신을 제어하고 조종하는 사령탑의 역할을 하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 존재에서 (영혼이나 참나와 같이) 고정되고 변치 않는 어떤 특정 부분인 것은 아니다. 나는 이와 같은 비유를 통해 우리 개개인이 스스로의 심신을 제어하고 조종할 수 있지만 그것이 영혼이나 참나를 통해 그럴 이유가 없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영혼이나 참나와 같이 추상적이고 신비적인 존재를 상정하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심신 제어와 조종의 역할을 잘 설명할 수 있는 붓다의 견해가 사유와 존재의 경제성의 원리에 더 적합해서 좋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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