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꿈, 의식 1

의식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 4개 층위로 구성된 우리 의식

틱낫한 스님
불교 지도자

 

불교계의 마음 지도(mind map)라 일컬어지는 아비달마는 단지 지적 관심의 대상으
로 남아서는 안 된다. 의식의 구성 요소와 상호작용을 잘 이해해야 비로소 명상 수행
도 할 수 있는 법이라고 틱낫한 선사는 말한다.

우리 의식은 강물처럼 계속 흐르고 있다고 붓다는 말씀했다. 의식을 구성하
는 4개 층위(level)는 심식(mind consciousness), 감각식(sense consciousness), 장식(store
consciousness), 생각식(manas)이다.

먼저 심식은 우리 에너지의 대부분을 소비하는 의식이다. 심식은 판단과 계획을
하고 근심과 분석을 하는 작업 의식(working consciousness)이다. 심식은 뇌가 없이는 작
용 불가능하기 때문에 심식은 체식(body consciousness)을 의미하기도 한다. 몸과 마음
은 동일한 것의 두 개 측면이다. 의식 없이 몸은 존재할 수 없고, 의식 또한 몸 없이
는 출현할 수가 없다.

뇌와 의식이 분리되었다는 잘못된 구별을 우리는 수련을 통해 없앨 수 있다. 흔히

의식이 뇌에서 탄생한다고 하지만 그 역도 사실이어서, 뇌가 의식에서 탄생했다고도
할 수 있다. 뇌는 몸무게의 2%밖에 차지하지 않지만 몸 에너지의 20%를 소비한다.
그러므로 심식은 사용 단가가 높은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생각하고 걱정하고 계획하
는 것은 많은 에너지를 앗아간다.

하지만 심식에게 마음챙김(mindfulness)의 습관을 들이고 나면 에너지를 경제적으
로 사용할 수 있다. 마음챙김으로 현재에 머물 수 있게 되고, 심식도 긴장을 풀어 과
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에너지를 놓아버릴 수 있게 된다.

의식의 두 번째 층위는 오감에서 오는 감각식이다. 인식의 대상이 오감과의 접촉
에서 오기 때문에 불교계에서는 오감을 ‘문’이라 부른다. 감각식에는 항상 3개 요소
가 개입된다 : 감각기관(눈, 귀, 코, 혀, 몸), 감각 대상(우리가 냄새 맡고 소리를 듣는 대상), 그리
고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는 경험이다.

의식의 세 번째 층위는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장식이다. 대승불교는 이를 아뢰야식
(alaya consciousness)이라고도 한다. 테라바다불교는 이를 ‘강처럼 항상 흐른다’는 의미
를 가진 팔리어 바왕가(bhavanga)로 지칭한다. 장식은 때로 뿌리식(root consciousness)이
라 부르는데 그 산스크리트어인 ‘mulavijñanait’나 ‘sarvabijaka’는 ‘모든 씨앗의 총
체’를 의미한다. 베트남어로는 ‘탕(tang) 장식’이라 하는데 ‘탕’은 ‘유지하고 보존한다’
는 의미다.

이로써 장식의 세 가지 측면을 알 수 있는데, 첫째 온갖 씨앗과 정보를 저장하고,
둘째 이들을 보존하며, 셋째 이들을 처리하고 변화시킨다.

장식은 박물관과도 같다. 안에 유물이 전시되면 박물관이라고 부르겠지만, 아무것
도 없이 비어 있다면 그저 건물에 불과하다. 관리 위원은 다양한 전시물을 잘 보존하
고 도난을 방지해야 한다. 장식은 저장하는 행위 자체를 일컫기도 하고 또 저장된 모
든 것, 즉 과거 조상들에게 받았던 정보와 우리의 다른 의식들에서 받은 정보를 의미
하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이 정보가 씨앗으로 저장된다고 한다.

오늘 아침 어떤 염불 소리를 처음 들었다고 해보자. 귀와 그 소리가 합쳐져서 ‘촉’

이라 불리는 특정의 정신적 형성물(mental formation)이 발현하고, 그로 인해 장식이 진
동을 한다. 새로운 씨앗인 이 정보가 저장 연속체(store continuum) 속으로 떨어진다. 장
식은 씨앗을 받아 저장할 수 있지만 또한 그 정보를 처리할 수도 있다.

이 층위에서의 처리 작업은 비용이 비싸지 않다. 장식은 심식만큼 에너지를 많이
쓰지 않는다. 그러므로 에너지를 절약하고 싶다면 생각이나 계획 걱정에 너무 몰입
하지 말고 장식이 대부분을 처리하도록 허용하면 된다.

밤에 잠을 자는 동안 방이 추워지면 우리 몸은 심식의 개입 없이 추위를 감지하고,
장식이 팔에게 이불을 덮으라고 명령을 내릴 수 있다. 장식은 심식의 부재 상태에서
작용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동안 장식은 많은 계획과 결정을 하고 일을 한다.

백화점에 가서 셔츠를 고른다면 우리는 예산이 허락하는 한 나의 자유의지로 무
엇이든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심식을 사용해 자유롭게 판매원
에게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모든 것은 이미 다
장식이 결정해놓았다. 구매 결정의 그 순간 나는 얽매인 상태고 자유인이 아니다. 우
리의 미적 감각,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가 장식의 층위에서 분명히 매우 신중
하게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유라는 환상 속에 살고 있다. 심식이 누릴 수 있는 자유의 정도는 실은
매우 작고, 대부분은 장식이 결정한다. 장식은, 심식의 참여 없이, 계속해서 받아들이
고 수용하고 유지하고 처리하고 결정을 내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행을 해 좀 더 깊
이 알게 되면 우리는 장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장식이 정보를 저장하고 처리하는
방법을 도울 수 있고 더 나은 결정을 내리도록 할 수도 있다.

심식이나 감각식과 마찬가지로 장식도 소비를 한다. 여러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아
무리 나 자신으로 있고 싶어도 나는 그들의 방식, 그들의 장식을 소비하게 된다. 내
의식에 그들의 장식이 투입된다. 내가 결정을 내리고,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이 집단의 관점에 의존하게 된다. 나는 어떤 대상이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해도, 다수
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면 서서히 나는 그것을 아름답다고 받아들이게 된다. 개인의식

은 집단의식(collective consciousness)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달러화의 가치는 객관적 경제적 지표가 아닌 사람들의 집단적 사고로 결정된다.
사람들의 두려움, 욕망, 기대치로 인해 달러화는 오르고 내린다. 우리는 집단적으로
보고 생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주변에 둘 사람의 선택이 중요하다. 주
변 사람의 집단의식에 우리는 밤낮으로 영향을 받기 때문에 주변에 자애와 이해심,
자비심을 가진 사람이 있어야만 한다.

우리가 깨달음을 얻고 변화를 하는 것도 장식 덕분이다. 이 가능성은 장식의 ‘항상
흐르는 성질’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장식의 정원에 우리는 씨앗을 심고, 거기에서 꽃
이 피고 채소가 자라고 과실이 열린다. 심식은 그저 정원사에 불과하다. 정원사는 땅
을 일구면서 동시에 꽃을 피우고 과실을 열게 할 수 있는 땅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수행자로서 우리는 심식에만 의존해서는 안 되고 장식에도 의존해야 한다. 결정은
바로 장식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장식은 정보를 담고 있는 컴퓨터의 하드디스크와도 같다. 정보가 지금 화면에 나
타나지 않아도 여전히 컴퓨터 안에 있어서, 클릭 한 번이면 나타난다. 장식의 씨앗은
컴퓨터의 데이터이다. 원할 때 클릭하면 심식의 화면에 나타난다. 심식은 모니터 화
면이고 장식은 하드디스크라 할 수 있다.

장식이 컴퓨터와 다른 점은 모든 씨앗이 유기성이라서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증오의 씨앗이 약화되어 그 에너지가 자비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다. 반면
사랑의 씨앗은 물을 주어 키울 수 있다. 장식이 저장하고 처리하는 정보의 성격은 항
상 흐르고 변화한다. 사랑이 미움으로 변하고, 미움이 또 사랑으로 변할 수 있다.

장식은 또 희생자이기도 하다. 장식은 애착과 집착의 대상이며 전혀 자유롭지 않
다. 장식 속에 있는 무지(번뇌, 분노, 두려움)는 소유하려 하고 달라붙는 에너지의 힘을
만들어내는데 이것이 의식의 네 번째 층위인 생각식이다. 생각식은 그 뿌리에 ‘분리
된 나’라는 믿음, 즉 개별적 인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 ‘나’라는 의식과 느
낌 본능은 장식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심식이 채택한 관점이 아니다.
내가 아닌 것들과 분리된 자아가 있다는 생각식이 장식 깊은 곳에 들어 있다.

생각식은 또 아다나식(adana consciousness)이라고도 하는데 ‘아다나’는 ‘도용(盜用),
전용(轉用)’을 의미한다. 덩굴 하나가 싹을 틔웠다고 상상해보자. 이 싹은 자라면서 나
무둥치를 휘감는다. 이 뿌리 깊은 미혹(자아가 있다는 믿음)은 무지가 자아내는 두려움의
결과로 장식 속에 자리하고, 그리곤 방향을 바꿔 장식을 끌어안고 그를 유일한 사랑
의 대상으로 삼는 에너지를 일으킨다.

생각식은 항상 작동하며 장식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언제나 장식을 끌어안고 붙
잡고 달라붙어 있다. 그래서 장식은 자유롭지 못하다. 장식이 ‘나’이고 ‘나의 사랑’이
라는 망상이 생각식에게 있다. 밤낮으로 이것이 ‘나’고 ‘내 것’이라는 깊고 내밀한 도
용이 있고, 그것을 그러잡고 보호하고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각식의 기능은 장식을 내 것으로 도용하는 것이다.

장식은 항상 흐르고 중단 없이 현존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심식은 중단될 수 있다.

우리가 꿈 없이 잠잘 때 심식은 작용하지 않고 있다. 혼수상태에서 심식은 완전히 작
동을 멈춘다. 깊은 집중 상태에서도 심식은 완전히 작동을 멈추지만(생각, 계획이 전무),
장식은 여전히 작동한다.

‘형성물(samskara)’이라는 말은 여러 조건이 합쳐져 출현한 대상을 말한다. 한 송이
꽃을 보며 꽃을 꽃의 형태로 출현 가능하게 한 비와 햇빛, 흙, 퇴비, 정원사, 시간, 공
간 등을 본다. 태양도 달도 산도 강도 모두 형성된 것이다. ‘형성물’이라는 말은 그 안
에 분리된 핵심 존재가 없음을 상기시켜준다.

불자로서 우리는 모든 것을 형성물로 보도록 훈련해야 한다. 형성된 것은 항상 변
하므로 무상은 실재의 한 가지 표시자임을 우리는 안다. 의식 속에 있는 형성물을 정
신적 형성물이라 한다. 감각기관과 대상이 접촉하면 감각식이 일어난다. 눈이 대상
을 본 순간 또는 피부에 바람을 느낀 순간 접촉의 첫 번째 정신적 형성물이 출현한
다. 접촉은 장식의 층위에 진동을 일으킨다.

‘생각(vitarka)’이라는 정신적 형성물이 있다. 영어로 ‘생각하다(think)’는 동사는 주어
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생각은 주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생각하는 자 없는 생각
(thinking without thinker)’은 절대적으로 가능하다. 생각은 무언가에 대한 생각이다. 인식
은 무언가에 대한 인식이다. 인식하는 자와 인식되는 대상은 하나이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I think, therefore I am)’고
했을 때 그의 주장은 내가 생각하면 그 생각을 가능케 하는 ‘나’가 있어야 한다는 것
이다. ‘나는 생각한다’고 선언했을 때 데카르트는 그를 통해 ‘나’가 존재함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자아를 믿는 강한 습관이 있다. 하지만 깊이 보면 생각
은 생각하는 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생각이 있을 뿐이다.

데카르트가 여기 있다면 우리는 이렇게 묻고 말할 수 있다. “데카르트 씨, ‘나는 생
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하셨는데, 그럼 당신은 무엇인가요? 당신이 당신의
생각입니다. 생각하기, 그것으로 족합니다. 생각은 자아 없이도 출현합니다.”

생각하는 자 없는 생각. 느끼는 자 없는 느낌. ‘자아’가 없을 때 우리의 분노는 무

엇인가? 그것이 우리 명상 수행의 대상이다. 51가지 정신적 형성물(심소)은 그들이
나타나도록 주선하는 자아가 없이도 출현한다. 우리 심식은 ‘자아’ 또는 ‘생각식’이
라는 관념에 기반하는 습관이 있다. 하지만 지금 마음에 출현하지 않는 모든 정신적
형성물의 씨앗을 저장하고 있는 장식을 좀 더 알아차리도록 우리는 명상할 수 있다.

명상 수행은 습관적으로 사물을 보는 방식에 빛을 비추어 명징하게 보도록 해주
는 ‘깊이 보기’ 수행이다. 무아를 체득할 때 우리의 미혹은 제거된다. 그것을 변화
(transformation)라 부른다. 불교 전통에서 변화는 깊은 이해를 통해 가능하다. 무아를
내면에서 진정 이해할 때, ‘나는 존재한다’는 잘못된 개념인 생각식이 와해되고, 그
때 비로소 지금 이 순간의 자유와 행복을 즐길 수 있게 된다.

발췌, 번역|로터스불교영어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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